당평제명석조각자唐平濟銘石槽 부여박물관에 소재한, 백제 하대(下代)의 원형(圓形) 석조(石槽) 주위에 새긴 것으로 석조의 외구경(外口徑)은 1.65m, 전체 높이는 1.6m이며 명문은 자경(字徑) 3.9cm의 해서(楷書)이다. 총 22행이며 1행은 11자씩으로 되어 있다. 「당평제비(唐平濟碑)」의 앞부분인 “원부황왕(原夫皇王)~저축함비(杼軸銜悲)”까지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는 제18행 제19자인 “동벌친린(東伐親鄰) 근위(近違)”(「당평제비」의 제15행 제4자에 해당)까지가 판독이 가능하다. 연대는 신라 660년(무열왕 7)으로 추정된다
大唐平百濟國碑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654년(의자왕14년) 추정 1948년 부여읍(扶餘邑) 관북리(官北里)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발견된 것은 비의 일부로서, 현존 높이 102cm, 폭 38cm, 두께 29cm이다. 양질의 화강암에 가로 세로로 정간(井間)을 구획하여 그 안에 글자를 음각하였으며, 1행은 1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앞부분에 해당하는 4행까지로서 모두 56자이다. 비의 우측면 상부에는 음양설에 따라 원 안에 봉황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붉은 칠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내용은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발견된 곳이 백제의 고도(古都)란 점, 백제에 사씨(沙氏)란 성이 있었던 점, 백제에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란 인물이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백제의 비석으로 추정되고 있다.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부여 능산리사지(扶餘陵山里寺址 : 사적 434호)는 백제 사비시대의 사찰유적으로, 부여 나성(羅城)과 능산리고분군 사이에 있는 능뫼골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백제문화권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해 1992년부터 2002년까지 8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중문(中門), 목탑(木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이고 주위에 회랑(回廊)이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임이 밝혀졌다. 또한 동서회랑의 바깥쪽에는 각각 남북방향의 배수로(排水路)가 설치되어 있는데, 서회랑 외곽의 배수로에는 목교(木橋) 및 석교(石橋)가, 동회랑 외곽의 배수로에는 석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중문지 남쪽에서는 동서·남북방향의 도로유구와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다.
사리감이 출토된 목탑지의 기단규모는 동서 11.79m이며, 그 중심부의 108X133cm의 범위에 깊이 114cm 정도로 묻혀 있었다. 출토된 사리감은 가로, 세로 각각 50cm, 높이 74cm의 크기이며, 밑면이 비교적 납작하고 윗면이 둥근 아치형이다. 정면 중앙에 역시 아치형의 사리장엄을 넣을 수 있는 감실이 파여져 있다.
명문(銘文)의 내용은,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2017.01.07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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