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청남도/부여군

부여...어사 정기세 철비

by 임병기(선과) 2019. 8. 13.
728x90
728x90

 

 

 

어사 정기세 철비.

부여읍 석목리 산 18-1번지

잠시 주차할 공간은 있습니다.


 

어사 정 공 기세 영년불망비 御史 鄭 公 基世 永年不忘碑

영세永年 라는 명문은 처음 접한 것 같습니다.

영세永世로 새기면 세世가 중복이기 때문 일까요?


 

선정의 내용이 궁금하지만...

유박초련 攸泊草奱(?)

 

 

민선0은 民先0恩

백000    白000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구, 호는  周溪(周啓?).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정계순이고, 할아버지는 돈녕부도정을 역임한정동민, 아버지는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이다. 아들로 정범조, 손자로 정인승을 두었다. 1837년(헌종 3) 정시(庭試)에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정자에 임명된 후 사간원정언과 삼영종사관을 거쳤다. 1839년(헌종 5)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성균관대사성·병조참의·성천부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853년 강화부유수,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62년(철종 13)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와 형조판서로서 재직하였고 1864년(고종 1) 고종 즉위 후 더욱 중용되어 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83년(고종 20)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하사받았다.

문장과 서예에 조예가 깊어 몇 차례나 제술관(製述官)과 문서사관(文書寫官)에 임명되었다. 또한 강화부유수와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 세제(稅制)를 공정하게 다루고 문교(文敎)를 진흥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865년(고종 2)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이라 할 수 있는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편찬할 때 교정당상(校正堂上)을 맡기도 하였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전례문(典禮文)을 지어 바치던 제술관과 문서 사관, 『대전회통』을 편찬할 때 교정도감을 맡은 직함으로 추정할 때 학문과 문장에 능숙한 문예(文藝)에 밝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정기세는 겸손하여 다른 사람과 잘 거스르지 않고 기쁜 일을 잘 알려 주어 ‘까치판서’라는 별명이 전한다.이유원(1814~1888)의 문집인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6권에는 정기세에 대한 인물평으로 “크건 작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 없게 되었으며, 오늘날 의절과 전고에 관한 일은 그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그야말로 재상 집안에서 재상이 나온 셈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저서로 주계집(周溪集) 5권이 전한다. 부친인 정원용의 經山集을 편집하였으며, 『임하필기』의 서문에 글이 있다.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산68번지 객산에 있다.(디지털 광명전자문화대전)


 

뒷면


 

도광 이십이년 오월 일 립道光 二十二年 五月 日 立

1842년 5월에 세웠습니다.

정기세의 충청우도 암행어사직은 1839년 이었으니, 그가 암행어사직을 마친 후에 세운 듯 합니다.


 

 

녹슨 철펜스는 철거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2019.07.31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