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곡성군

곡성...동악산 도림사

임병기(선과) 2016. 11. 22.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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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사 입구

청류동 계곡은 명경지수처럼 맑다.

속세의 풍진을 떨쳐 버릴 생각은 뒷전이고

속인은  명부전 업경대가 떠올라 지레 겁에 질려 옷깃을 여미게한다.

 

 

주자 무이정사십영 12수 중 10수 조기

삭성창석릉削成蒼石稜 깎아 세운  푸른돌 모서리가
도영한담벽倒影寒潭碧 차가운 연못에 비추어 더욱 푸르구나
영일정수간永日靜垂竿 웬 종일 조용히 낚시 드리우니
자삼경수식茲心境誰識 이 마음 끝내 누가 알아주리오.

 

 

빙청옥결氷淸玉潔

얼음 같이 맑고 옥같이 깨끗하다는 뜻으로,  청렴결백한 절조,덕행을 의미

 

 

청류동  계곡

"청류동계곡이라 부르는 이 계곡의 암반에는 새긴 글자도 무수히 널려 있다. 누군가 이 암반계류의 절경마다 一曲(일곡) 二曲(이곡)하며 구곡까지 새겨 놓았는데, 더러는 깨지고 더러는 도로확장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도림사 입구 상가 주차장 부근에서 2곡, 4곡, 5곡 등의 곡이름과 淸流洞(청류동), 丹心臺(단심대), 樂樂臺(낙락대) 등의 지명, 樂山玩草 吟風弄月(요산완초 음풍농월)이니 淸流水石 動樂風景(청류수석 동악풍경)이니 하는 싯구, 그리고 아무개 장구처(杖 處)라 하며 자기 이름이나 호를 새긴 크고 작은 각자들을 마치 설악산 비선대나 두타산 무릉계에서처럼 발견할 수 있다.


계곡 이름을 붙인 사람은 구한말 선비 하정(荷亭) 조병순(曺秉順·1876∼1921)과 춘기(春沂) 정순태(丁舜泰)다. 두 사람은 청류계곡 굽이마다 구곡(九曲)이라 이름을 붙이고 글을 새겨놓았다. 그 가운데 사곡(四曲)은 단심대(丹心臺)다.

일편단심을 다짐하는 반석이다. 그 옆에는 서산강론(西山講論)이라는 큰 글자 아래 모두 9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병순을 비롯해 당시 단심대에서 회합을 했던 사람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박병선은 의병이었고 정봉태는 훗날 연희전문학교에 7대를 모아온 가문(家門) 장서 묵용재 1만 권을 기증한 사람이다.

새긴 날짜는 정사년 오월 병신일이다. 1917년 음력 5월이다. 장성 출신 위정척사파 의병장 노사 기정진과 손자 송사 기우만이 즐겨 찾던 곳이다. 조병순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서산강론 4년 뒤 조병순은 곡성경찰서에 끌려가 고문 끝에 죽었다. 1921년 그가 죽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장지연이 곡성까지 찾아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장지연은 그 한 달 뒤 죽었다. 2011년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혀 서훈을 박탈당하기도 한 장지연은, 죽을 때까지 지사(志士)의 죽음을 슬퍼한 우국지사였다. 진짜 변절자라면 조병순 유족들이 왜 도끼로 그를 처단하지 않고 술잔을 들어 맞았겠는가.

 

수석의 절경이 삼남 제일이라는 청류동()은 도림구곡(), 청류구곡으로 불린다. 제1은 쇄연문(), 제2는 낙악대(), 길상사와 청계동 갈림길에 9곡 별유비인간()이 있다. 임진왜란의 양대박(:1544∼1592)과 병자호란의 김감(:1566∼1641) 의병장이 활약한 별천지 무릉도원, 천혜의 요새로 알려졌다. 계곡은 약 4km에 걸쳐 있는데 폭포·소·담이 굽이치는 골짜기가 험하고 너른 반석들은 지방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백련()이 현판을 쓴 도림사 오도문()에서 계곡을 향하면 갈랫길이다. 오른쪽은 시인 묵객들이 노닐던 단심대, 배넘어재와 동악산 쪽이고 왼쪽은 형제봉과 길상암 쪽이다. 배넘어재 넘어 가파른 암봉 서봉을 지나 왼쪽 형제봉(730m:옛이름 )까지는 산나물·산꽃이 깔린 전망 좋고 평탄한 능선길이다. "...출처/다음

 

 

 

오곡五曲.낙락대樂樂臺

 

 

부도전

조선후기 부도 5기가 가을볕을 즐기고 있었다.

 

 

회계당탑 繪溪堂塔

 

 

 ?운당탑 ?雲堂塔

 

 

선적당탑 善寂堂塔

 

 

부도 옥개석

 

 

부도 탑신석

 

 

 

대루.

 

 

660년(태종무열왕 7)원효(元曉)가 창건하였는데, 그 당시 풍악의 음률이 온 산을 진동하였다 하여 동악산이라 하고, 도인(道人)이 숲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도림사라 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582년경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절을 창건하고 신덕사(神德寺)라 하였는데, 660년 원효가 사불산화엄사(四佛山華嚴寺)로부터 옮겨와서 도림사로 개칭하였다고도 한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국사 도선(道詵)이 중건하고 지환(知還)이 중창하였으며, 조선 말기 처익(處翼, 1813∼1888)이 산내암자인 길상암(吉祥庵)을 창건하였다고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보이는데, 당대의 유명한 목수장(木手匠)이자 승려인 영해(影海)도 도림사에서 주석하였다. 길상암은 현재 옛터 위에 토굴만 남아 있다.

 

화엄사 말사이다.

 

 

괘불지주

 

글.사진출처/문화재청

 

도림사괘불탱

도림사 괘불탱은 중앙에 석가불과 좌우에 보살상을 배치한 석가삼존도 형식이다. 크기는 길이 776cm, 폭 719cm로, 중앙의 본존불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본존불 좌우에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는 두 보살은 거의 비슷한 형태인데, 왼쪽의 문수보살은 보관에 조그만 부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 오른쪽 보살과 다르다.

조선 숙종 9년(1683)에 계오·삼안·신균 등의 세 화원 비구가 그린 이 그림은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화기가 있어서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자료가 귀한 석가삼존불형식으로 그 색채구성과 문양표현, 인물의 형태 등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는 17세기 후반기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보광전 목조아미타 삼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삼존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방형의 수미단위에 3단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앉아 계신다. 아미타불은 복장 발원물에 강희 3년 기사년에 조성되었다 하나 강희 3년은 갑진년이어서 강희 4년 기사년 즉, 1665년으로 보는것이 바르다. 아미타구품인중 중품하생의 수인을 취한다. 관음대시지보살은 복장발원문에 의해 강희 19년 즉 1680년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보광전이면 비로자나불이 주존이어야하는데...

 

 

석가여래

 

 

대세지

 

 

관음

 

 

 

 

후벽의 아미타탱.1730년

 

 

동종.

곡성 통명산 운흥사에서 1706년 주조

 

 

 

 

명부전

 

 

목조지장.시왕.1690년

 

 

응진당

당堂은 처음 접하는 듯.

 

 

목조석가여래.석조나한. 1700년

 

 

나한

 

 

나한

 

 

칠성각

 

 

도림사.

그렇게 자주 찾은 곡성 땅이건만 이제 인연지었다.

이번에는 절집 순례에 그치지만 훗날 두타산 무릉계곡,하동 화개와 더불어 바위 각자 탐방을 다짐해본다.

 

201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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