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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곡성군

곡성...관음사 부도전

by 임병기(선과) 2018.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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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관음사

2013년에 들렸으나, 부도전은 없다는 보살님 말씀만 듣고 인연 짓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사찰문화재에는 분명 등재되어 있으며, 출처가 동일한 자료로 추정되는 " 부도는 입구 숲속에 있다" 라는 글이 몇몇 블로그에 올려져 있었다.  관음사에 도착하여 스님께 여쭈었더니 대부분 도난당하고 2기가 있다며 위치를 가르켜주셨다.

 

부도전

관음사 100여미터 전 좌측 임시 주차장으로 활용하는 넓은 공터에서 앞쪽 산의 사진 속 전나무 아래에 위치한다.

녹음이 짙은 계절에는 시누대에 둘러 싸여 쉽게 관찰되지 않을 듯하다.

 

넓은 부지 한 켠에는 석조 수조가 놓여 있다.

 

 

수조

한국의 사찰 문화재에는 1914년 제작이라고 설명하였으나 명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관음사 사적에는 1912년 영담화상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보여, 그즈음에 마련한 것 같다.

 

 

조선후기 부도 2기. 근세 부도 1기

객의 발걸음에 화들짝 놀란 댓닢이 요란하게 환영한다.

 

 

서산당 西山堂

 

 

방형지대석. 원형 대좌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탑신에는 당호를 새겼고 보주를 올렸다.

 

 

근세부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도

방형대좌, 원구형 탑신, 팔각 옥개석. 보주

 

 

방형 대좌

안상을 새겼다.

 

 

팔각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깊다.

 

 

상륜부

괴임과 화염보주가 일석이다.

 

탑신에 비해 보주가 상대적으로 크다.

 

 

 

겨울이 깊은 만큼

아지랑이 춤 추는 봄볕도 멀지 않을 것이다.

 

 

답사에 많은 도움을 주신 여비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8.02.10

 

 

 

금랑각

 

도로변 관음사 이정표를 보고 길을 접어 들었지만 화마를 입은 관음의 미소를 숨기려는 듯 좀처럼 관음사는  보이지 않는다. 이글거리는 뙤얕볕에서 고추 수확중인 분들에게 길을 확인하는 것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다. 설상가상 교행이 불가한 길에서 차량을 만나 힘겹게 비켜야만 했다. 관음사는 지자체의 관광활성화의 일환으로 기획한 심청전 스토리텔링의 원찰이건만 그건 속세의 일인듯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관음사는 1729년(영조5) 백매선사가 쓴 관음사 사적에 의하면 백제 분서왕3년(300) 성덕보살이 낙안포(지금의 보성 벌교)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 절을 짓고 이름을 관음사라 하였다고 한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창건 뒤 성공性空스님이 성덕의 상을 만들려다가 생각을 바꿔 관음상을 모시고 성덕산 관음사라 했다고 전한다.

 

관음사는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성덕산 관음사를 기록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관음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에는 “전라남도 옥과 성덕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가람고』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고사사법』에는 “곡성군 화면 성덕산에 있고 대본산 송광사의 말사”라고 적혀 있다.

 

관음사의 연혁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1374년 (공민왕 23)에 원통전을 중수하는 등의 5중창을 하였으며, 선원을 중심으로 큰스님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임란 때 피해를 입고 거의 폐허화되었으나 신희. 담원. 담정 세 스님만은 끝까지 절을 지켰다. 1604년(선조 37) 5년에 걸쳐 모든 건물을 복원하였다.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던 원통전은 임진왜란의 화를 입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1611년(광해군 3), 1612년에도 중창하였고, 1636(인조 14)과 1718년(숙종 44)에는 원통전을 중수하였으며, 수각루인 금랑각을 지었다.

 

근대에 들어 1832년(순조 32)에 큰 홍수로 전각의 거의 반이 쓸려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 있는 건물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금랑각은 그렇게 오래 방치하다가 1936년 청운스님이 중건하였는데 그 내용이 금랑각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수기는 근대의 고승인 한영 정호(漢英 鼎鎬: 1870~1948)스님이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당시 주지인 수용(袖龍)스님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1912년 영담화상이 전체 가람을 중수하였으나 6.25동란으로 모두 불탔다. 이곳은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된다 하여 토벌군의 방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다. 이 때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원통전(273호)과 금동관음보살상(274호)이 소실되었다. 1954년 대은암의 건물을 옮겨와 원통전을 재건하였다. 1982년에는 지장전, 서원당, 금강문을 복원하였으며, 지금도 의욕적인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금강문

 

밀적금강

나라연금강

 

 

금랑각, 금강문을 통과하면 좌우에 극락전과 원통전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 앞에는 요사와 종무소, 원통전 앞에는 종각과 선방이 위치한다.

 

관음사는 소설 심청전의 원형설화로 알려진 홍장의 설화속의 무대이다. "옛날 충청도 대흥에 원량(元良)이라는 장님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홍장이라는 용모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원량이 동네를 지나는데 성공(性空)스님이 그를 보자 큰 절을 올렸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신인이 나타나 “ 오늘 동네에서 장님을 만날 텐데 그가 장차 대화주(大化主)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원량은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였으나 스님은 한사코 그에게 화주가 되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스님과 헤어진 후 원량부녀는 근심이 태산 같았는데 마침 중국 진나라 사신이 그 날 저녁에 찾아와 진나라의 혜제惠帝가 “새 황후가 될 분이 동국에 있을 것이니 그 곳으로 가보라“하여 배를 타고 왔는데,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려 이 집으로 왔다는 말을 하였다. 부녀는 사신이 가지고 온 예물을 받아 그것으로 성공스님에게 시주하여 절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홍장은 중국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착한 마음씨로 인해 황재의 총애를 받으며 계속해서 정업을 쌓았다. 그러나 고국을 그리워하던 홍장은 53불(佛)과 500성중(聖衆) 그리고 16나한상을 만들어 배에 실어서 백제로 보냈다. 그 배는 감로사(甘露寺)앞 나루에 닿았으며, 감로사에 봉안되었다.

 

그 뒤로 홍장은 관음상을 주조하여 돌배에 실어 백제로 보냈는데 낙안포에 도달한 배는 이를 수상히 여겨 잡으려는 수졸을 피해 그 곳을 떠났다. 이것을 옥과 땅의 성덕처자가 해변을 거닐다가 멀리서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바로 홍장이 보낸 그 배였다. 배가 저절로 성덕에게 다가와 성덕이 안을 살펴보니 관음금상이 빛나고 있었다. 성덕은 놀라 예배하고 관음상을 모셔 인연의 땅에 모시기 위해 11곳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관음금상을 봉안하고 절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성덕이 불상을 옮기는 도중 쉬었던 곳마다 정자를 세웠는데 대추정, 연봉정, 삽정, 현정, 홍복정 등이 이때 세워졌다고 한다."

 

홍장의 설화는 「심청전」의 원형설화로 설명되기도 한다.

 

극락전

 

원통보전

 

화재를 입은 원통보전 불사 준비중이다. 곡성군청의 축제기간중 괘불대에 탱을 걸고 야단법석을 재연하면 어떨까? 심청고을이라는 명칭에 명실상부한 법요식이 진행될 날을 기대해본다.

 

 

 

2000년 이전 복원한 원통전

 

 

 

어람관음상. 국내유일의 석조어람관음상이다.

 

 

원통전 앞 전체 높이 95cm의 석조 조각상이다. 왼 손에는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있는데 앞에는 물고기의 머리 부분만이 보이고 꼬리는 관음상의 등에 표현되어 있다. 오른 손에는 지물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결구공만이 남아 있다.

 

조각의 기법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투박하고 단순하며, 민예적 요소가 강한 수법들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어람관음은 33관음의 하나로 법화경法華經에서 손에 물고기가 가득 찬 바구니를 들거나 혹은 큰 물고기를 타고 있다 하며, 나찰羅刹, 독룡毒龍)의 해를 제거하는 공덕이 있다고 여긴다. 어람관음신앙은 중국의 송대 이후에 널리 유행하였다.

 

 

 

등뒤에 물고기 꼬리가 보인다.

 

 

원통전 관음보살

 

 

불두는 절을 창건한 성덕보살의 상이라고 전하고 있다. 상의 크기는 높이 12cm, 폭 10cm이다. 머리는 대부분이 파손되고 얼굴만 남아있다.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공이 뚜렷하다. 두 눈은 반개하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중앙을 보발이 가로지르고 있고 귓불은 도톰하게 처리하였다.

 

 

▲소실된 국보 214호 금동관음상의 옛 모습.

 

 

 

 

빨치산 토벌대장의 방화지시에 의해 금동관음상도 화를 입었는데 모두 녹아버리고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부터 관음사에 금부처님이 계신다는 소문이 퍼져 어느 날 도둑들이 법당의 벽을 뚫고 두상을 훔쳐갔다. 그런데 이 때 관세음상의 영험이 기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부산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사는 최유선 보살은 3년여 전부터 몸져누웠는데 백약이 무효하고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최보살은 신기한 꿈을 꾸었다. 흰 옷을 입은 부인이 “너는 전세의 과보로 이 같은 병고를 받고 있으니 지성으로 참회하고 가르쳐주는 대로 행하면 병고가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최보살은 엎드려 애원하였다. 그랬더니“ 너는 전라도 곡성 관음사로 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최보살은 아픈 몸을 이끌고 관음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관음사는 잿더미 밖에 없고 부처님도 도난을 당하고 없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돌아 갈 길이 멀어 하루 밤을 묵었는데, 다시 흰 옷을 입은 부인이 나타나“나는 이 곳 성덕산 관음보살이다. 나의 몸이 전화로 해서 얼굴만 남게 되었고, 지금은 광주의 고물상 마루 밑에 있으니 날이 밝으면 나의 얼굴을 찾아 다시 관음사에 모셔라”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최보살은 아들과 함께 고물상을 모두 뒤져 어느 고물상 마루 밑에서 정말 얼굴만 남은 관음보살상을 찾아내어 모셔오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찾은 관음상을 법당에 모시고 지극한 기도를 드린 후 잠이 들었다. 다시 꿈에 흰 옷 입은 관음보살이 나타나 “ 고맙다. 관음사에는 흰 불두화와 흰 만리향화, 흰 진달래 등 세 가지 꽃이 있으니 그것을 다려 먹어라. 그러면 병이 낫게 되리라.”하고 법당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최보살은 씻은 듯 낫게 되었다고 한다.

 

 

 

 

201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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