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강화군

강화...정족산 전등사

임병기(선과) 2016. 11. 2.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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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그때는 사고지까지 천천히 둘러  보았는데,,

 

아침 일찍 들어선 산문에는 빗자루를 든 스님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사진 없이 짧은 글로 올린 답사기가 있기에

오늘은

사진으로 대신하련다.

 

글은 대부분 전등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다.

  

 

전등사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되었다.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종해루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과 남문만 이용된다. 이 가운데 문루(門樓)가 있는 곳은 남문이 유일하며 남문의 문루를 ‘종해루’라 부른다.

 

 

삼랑성

사적 제130호. 넓이 24만 5997㎡, 둘레 약 1km.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 혹은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성 구조를 보면 잡석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 조선시대에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네 곳에 있으며 문루는 남문에만 있어서 종해루라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가 옮겨와 보존되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유명한 전등사)가 있으며, 병인양요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가 서 있다. 이러한 삼랑성은 특히 마니산 전설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도전,

관해당부도,

 

 

조선후기 부도로,

낮은 연봉형 보주와 탑신이 일석으로 당호가 새겨져 있다.

 

 

고장난 윤장대

15년전에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별난 뇬이 국정을 농단하는 어지로운 세태, 민초들의 염원도 ...

 

 

전등사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전한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대조루

 

 

대조루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종루

전등사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과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 등 두 개의 종이 있다. 이 두 범종을 보관하기 위해 종각과 종루로 이름을 달리하여 두 개의 범종각을 세웠다. 현재 대조루 옆의 종루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었으나 2004년에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지금은 일반 범종이 보관돼 있으며 조석 예불 때 사용된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나부상이 반긴다.


 

대웅전 나부상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만지지 마세요.

저는 스치로폼입니다.

 

웃음 한 번 짓고...

 


목조삼존불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守衍)이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수연이 수화승(首畵0僧)으로 조성한 작품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두 번째 불상이다. 삼불의 구성은 석가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좌우에 협시하는 형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 불상들의 세부를 보면, 본존 석가불상은 단엄한 자세에 자비한 상호를 보이며, 좌우의 아미타불상과 약사 불상은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비례 면에서 본존상 보다는 다소 조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상은 상호(相好)의 표현이 근엄하고 전체적인 신체비례 면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져 시기적으로 앞서는 같은 수연 작의 서천 봉서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에 비해 조각적으로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삼세불상의 얼굴은 각각 독특한 상호를 보이고 옷주름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전등사 삼세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들 가운데 수화승 수연과 함께 서천 봉서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 보물 제1751호) 조성에 참여했던 성옥(性玉)의 조각적 개성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화원으로 참여한 영철(靈哲)은 이후 옥구 보천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1634년, 익산 숭림사 봉안)과 남원 풍국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39년, 예산 수덕사 봉안)의 조성에 수연을 따라 참여했으며 성옥에 비해 연배가 아래인 조각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조각승들과 나타난 발원시주자들의 명단이 잘 전하여 불상(佛像), 면금(面金), 체목금, 체목, 오금(烏金), 좌대(座臺), 보단(甫團), 채안(彩安), 복장(腹藏) 등 세부적인 시주 항목이 기록된 점 등에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문화재청

 


대웅보전 수미단

1621년(광해군 13)에 제작되었다. 수미단이란 절의 법당 정면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던 대좌를 말한다. 수미단이라고 한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단 곳곳에 수미산을 상징하는 무늬를 새겨 넣는데 상중하 3단에 연꽃구름·만(卍)자 등을 새기기도 하고 사자·호랑이·코끼리·거북·가재를 조각하기도 한다. 또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이나 스님·동자·사천왕·비천·도깨비 상을 조각하기도 한다.아름다운 색상이 퇴색되어 오래된 세월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행히 수미단 옆쪽에는 그 당시의 화려한 색상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 후불탱

후불탱화(가로 3.1m×세로 2.6m)는 한 폭에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 세 부처님을 그린 일폭 3세 불화이다. 전체적으로 황토색과 진한 녹색, 밝은 벽돌색의 색 배합을 보이고 있으며 얼굴이나 의습에는 20세기 초 경기도 일대에서 유명했던 서양화식 음영기법이 투영되어 있다.19세기말에 금강산과 경기도 일원에 주석했던 고산 축연 스님의 작품이다.

 


청동수조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시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수조 안에 물고기나 자라가 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청동수조는 불을 끄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며 물을 항상 담아 두었다가 긴급할 때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수조(드무)를 아주 중요시 여겼다.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불귀신이 불을 일으키러 큰 건물을 골라서 다니다가 드무 안의 물에 비친 자기의 흉악한 몰골을 보고는 동료가 불장난하러 와 있는 줄 알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전설도 있다.

 


약사전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석조약사여래좌상.

고려말~조선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전하나 발원문,조성기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

 


약사전 현황탱

1884년(고종 21)년 동호 진철 긍법이 그렸다.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묘사한 탱화로,화면구도는 현왕을 크게 그리고 판관·녹사·동자 등을 둥글게 배치한 원형구도로 현왕을 비롯한 모든 존상들은 얼굴 방향을 제각기 달리한 채 자연스러운 구도로 서있어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준다.

 


약사전 후불탱

중앙에 약사여래좌상과 좌우협시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상하좌우에는 사천왕을, 약사불 뒤에는 가섭과 아난 존자를 그린 병렬식 구도의 그림으로 1884년 혜과 스님이 그렸다. 주존불인 약사여래좌상은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으며 자비스러운 표정이다. 육계에는 정상계주와 반달계주를 갖추었으며 녹색의 이중광배를 띄고 있다. 붉은 해와 흰 달을 보관에 이고 있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변형된 윤왕좌(輪王坐)로 손을 무릎에 대고 있으며 몸에서는 파상문신광이 퍼져나가고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상,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목조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상,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 총 31구의 상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조성되었다. 전등사 본말사지에 보면 조선 영조 43년(1767)에 한영대사에 의해 시왕을 채색했으며 헌종 5년(1839)에 시왕전을 중수한 사실과, 고종 21년(1884)에 지장상에 개금하였다고 한다.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은 모습이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보존이 잘 되어있다.


업경대(사진을 찍었는데...)

1627년(인조 5)에 제작된 전등사 업경대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죄업을 보이게 하는 거울로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고 하며 업경륜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등사 업경대는 목각사자의 몸체와 등위에 커다란 불꽃이 활활 일어나고 있는 무늬의 거울이 꽂혀있는데, 불꽃 무늬를 사실적으로 드러내 저승의 무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채색한 색상이 화려하고 이빨에서 머리, 꼬리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동경·단청·명문 등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

 


극락암

노스님께서 계단을 청소하고 계시어 들어가기가 망설여져 머뭇머뭇 하다가 젊은 스님에게 물었더니 극락암은 조실스님이 계신는 곳이라고 일러 주었다.

 


고사목에서 달마대사가 환생하시어  막 나투시는 듯

 

 

옛부재도 새롭게...

 


종각



전등사 범종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되었으며 음통이 없고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일제강점기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심도기행.1906년.고재형


전등사傳燈寺

전등사하각심청 傳燈寺下覺心淸 전등사에 이르니 마음이 맑아지고.

노거기관재차행 老去奇觀在此行 나이 들어 좋은 구경 전등사에서 하였다.

수두앵환황금척 樹頭鶯喚黃金擲 나무위에 꾀고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추구용분백옥생 甃口龍噴白玉生 우물 입구서 용이 내뿜으니 백옥이 생기는 듯하다.

 

 

예전에 인연지었던

돈대,고려궁지,왕릉, 고인돌, 보문사는 건너 뛰어버렸고


교동도는

끝내 지나쳐야 했다.

 

다시 올 기약 없는

그런저런 수심에 젖은 객의 심사는 산란하기 그지없다.

 

201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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