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그때는 사고지까지 천천히 둘러 보았는데,,
아침 일찍 들어선 산문에는 빗자루를 든 스님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사진 없이 짧은 글로 올린 답사기가 있기에 오늘은 사진으로 대신하련다.
글은 대부분 전등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다.
전등사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종해루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과 남문만 이용된다. 이 가운데 문루(門樓)가 있는 곳은 남문이 유일하며 남문의 문루를 ‘종해루’라 부른다.
삼랑성 사적 제130호. 넓이 24만 5997㎡, 둘레 약 1km.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성 구조를 보면 잡석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 조선시대에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네 곳에 있으며 문루는 남문에만 있어서 종해루宗海樓라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史庫)가 옮겨와 보존되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서 있다. 이러한 삼랑성은 특히 마니산 전설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도전, 관해당부도,
조선후기 부도로, 낮은 연봉형 보주와 탑신이 일석으로 당호가 새겨져 있다.
고장난 윤장대 15년전에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별난 뇬이 국정을 농단하는 어지로운 세태, 민초들의 염원도 ...
전등사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전한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대조루
대조루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종루 전등사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과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 등 두 개의 종이 있다. 이 두 범종을 보관하기 위해 종각과 종루로 이름을 달리하여 두 개의 범종각을 세웠다. 현재 대조루 옆의 종루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었으나 2004년에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지금은 일반 범종이 보관돼 있으며 조석 예불 때 사용된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나부상이 반긴다.
대웅전 나부상
만지지 마세요. 저는 스치로폼입니다.
웃음 한 번 짓고...
목조삼존불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守衍)이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수연이 수화승(首畵0僧)으로 조성한 작품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두 번째 불상이다. 삼불의 구성은 석가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좌우에 협시하는 형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 불상들의 세부를 보면, 본존 석가불상은 단엄한 자세에 자비한 상호를 보이며, 좌우의 아미타불상과 약사 불상은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비례 면에서 본존상 보다는 다소 조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상은 상호(相好)의 표현이 근엄하고 전체적인 신체비례 면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져 시기적으로 앞서는 같은 수연 작의 서천 봉서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에 비해 조각적으로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대웅보전 수미단 1621년(광해군 13)에 제작되었다. 수미단이란 절의 법당 정면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던 대좌를 말한다. 수미단이라고 한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단 곳곳에 수미산을 상징하는 무늬를 새겨 넣는데 상중하 3단에 연꽃구름·만(卍)자 등을 새기기도 하고 사자·호랑이·코끼리·거북·가재를 조각하기도 한다. 또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이나 스님·동자·사천왕·비천·도깨비 상을 조각하기도 한다.아름다운 색상이 퇴색되어 오래된 세월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행히 수미단 옆쪽에는 그 당시의 화려한 색상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 후불탱 후불탱화(가로 3.1m×세로 2.6m)는 한 폭에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 세 부처님을 그린 일폭 3세 불화이다. 전체적으로 황토색과 진한 녹색, 밝은 벽돌색의 색 배합을 보이고 있으며 얼굴이나 의습에는 20세기 초 경기도 일대에서 유명했던 서양화식 음영기법이 투영되어 있다.19세기말에 금강산과 경기도 일원에 주석했던 고산 축연 스님의 작품이다.
청동수조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시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수조 안에 물고기나 자라가 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청동수조는 불을 끄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며 물을 항상 담아 두었다가 긴급할 때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수조(드무)를 아주 중요시 여겼다.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불귀신이 불을 일으키러 큰 건물을 골라서 다니다가 드무 안의 물에 비친 자기의 흉악한 몰골을 보고는 동료가 불장난하러 와 있는 줄 알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전설도 있다.
약사전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석조약사여래좌상. 고려말~조선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전하나 발원문,조성기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
약사전 현황탱 1884년(고종 21)년 동호 진철 긍법이 그렸다.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묘사한 탱화로,화면구도는 현왕을 크게 그리고 판관·녹사·동자 등을 둥글게 배치한 원형구도로 현왕을 비롯한 모든 존상들은 얼굴 방향을 제각기 달리한 채 자연스러운 구도로 서있어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준다.
약사전 후불탱 중앙에 약사여래좌상과 좌우협시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상하좌우에는 사천왕을, 약사불 뒤에는 가섭과 아난 존자를 그린 병렬식 구도의 그림으로 1884년 혜과 스님이 그렸다. 주존불인 약사여래좌상은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으며 자비스러운 표정이다. 육계에는 정상계주와 반달계주를 갖추었으며 녹색의 이중광배를 띄고 있다. 붉은 해와 흰 달을 보관에 이고 있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변형된 윤왕좌(輪王坐)로 손을 무릎에 대고 있으며 몸에서는 파상문신광이 퍼져나가고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상,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목조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상,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 총 31구의 상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조성되었다. 전등사 본말사지에 보면 조선 영조 43년(1767)에 한영대사에 의해 시왕을 채색했으며 헌종 5년(1839)에 시왕전을 중수한 사실과, 고종 21년(1884)에 지장상에 개금하였다고 한다.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은 모습이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보존이 잘 되어있다. 업경대(사진을 찍었는데...) 1627년(인조 5)에 제작된 전등사 업경대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죄업을 보이게 하는 거울로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고 하며 업경륜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등사 업경대는 목각사자의 몸체와 등위에 커다란 불꽃이 활활 일어나고 있는 무늬의 거울이 꽂혀있는데, 불꽃 무늬를 사실적으로 드러내 저승의 무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채색한 색상이 화려하고 이빨에서 머리, 꼬리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동경·단청·명문 등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
극락암 노스님께서 계단을 청소하고 계시어 들어가기가 망설여져 머뭇머뭇 하다가 젊은 스님에게 물었더니 극락암은 조실스님이 계신는 곳이라고 일러 주었다.
고사목에서 달마대사가 환생하시어 막 나투시는 듯
옛부재도 새롭게...
종각 전등사 범종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되었으며 음통이 없고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일제강점기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심도기행.1906년.고재형 전등사傳燈寺 전등사하각심청 傳燈寺下覺心淸 전등사에 이르니 마음이 맑아지고. 노거기관재차행 老去奇觀在此行 나이 들어 좋은 구경 전등사에서 하였다. 수두앵환황금척 樹頭鶯喚黃金擲 나무위에 꾀고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추구용분백옥생 甃口龍噴白玉生 우물 입구서 용이 내뿜으니 백옥이 생기는 듯하다.
예전에 인연지었던 돈대,고려궁지,왕릉, 고인돌, 보문사는 건너 뛰어버렸고 교동도는 끝내 지나쳐야 했다.
다시 올 기약 없는 그런저런 수심에 젖은 객의 심사는 산란하기 그지없다.
2016.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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