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장성군

장성...유탕리(나옹암지) 마애여래입상

임병기(선과) 2016. 9. 1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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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태산 나옹암지 마애불

산행기, 답사기에서 익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동선을 명확하게 설명한 글은 찾지 못했다.

우리카페 오분향님의 답사기를 보고도 자신이 없었지만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새벽 같이 길을 잡았다.

 

우리님들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진입동선을 안내하겠다.

 

 

장성읍 유탕길 44-2 .

민가 앞 버스 회차장에서 바라본 두 갈래 길.

다리 반대 방향 우측으로 진입하여 길이 끝나는 사방댐까지 직진

 

 

사방댐.

진입도로는 교행이 쉽지 않지만 이곳에는 3~4대 주차공간이 있다.

 

나는 운 좋게도

추석 벌초객을 만나 개략적인 길을 인지하였다.

 

좌측으로 사방댐을 건너 임도를 따라 가면 마애불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약 1시간 이면 충분하다. 

 

 

임도를 따라 우측 용초폭포(갈수기에는 폭포를 인지 못할 수도 있다)를 지나, 첫삼거리에서 나무에 페인트로 칠한 화살표 방향 우측 임도로 방향을 잡아야한다.

 

 

나는 여기서 부터 제법 헤매이었다.

 

위사진 첫삼거리에서 약 50(?)미터 전방 임도를 가로질러 개울이 희미하게 나있다.

좌측에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은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서

임도 옆의 좌측 개울쪽 바위 앞 나무를 주목하면 내가 묶어 놓은 푸른 노끈 2개가 보일 것이다.

 

바위쪽으로 소로를 따라 5미터 직진하여 개울을 건너 올라가면 산죽이 산포하여 있다.

계속해서 약간은 가파른 능선길이 이어지며 여러 기의 민묘를 지난 후 거의 산정상 부근의 길 우측에 사지가 자리한다.

 

 

이른아침

제법 땀을 흘린 후 드뎌 나옹암지에 도착

 

 

나옹암지?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 자료를 보자

"창건과 폐사와 관련된 문헌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으나 사지 내에 소재한 마애여래상은 스승을 추모하고자 나옹懶翁의 제자들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내용이 구전되고, 사명寺名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1927년에 간행된  장성읍지『長城邑誌』에 삼청동‘三淸洞 입구에서 이전했다.’는 기록이 있어 일제강점기에도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역에서 발간되는 2016년 3월 7일자 우리군민신문에는 여순반란까지 향화를 밝혔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실려있다.

"1948년 1월12일경 여순사건이후 숨어지내던 지리산 부대원들이 나옹암에 비밀리에 기거하면서 장성경찰서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인들이 새벽녘에 출동해 교전을 별여 나옹암에 거주하던 보살 1명과 빨치산 11명, 군인 1명이 사망했다."

또한

나옹암지는 위에서 인용한 책의 불태산에 있었다고 전하는 유탕리 사지의 절집의 한 곳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어 보인다.

"불태산 내 위치한 유탕리사지는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927년에 간행된 장성읍지『長城邑誌』에 기록된 취봉사鷲峯寺, 상청사上淸寺, 연화사蓮花寺, 인월사印月寺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여래 입상

나옹화상의 제자들이 조성한 불상으로 구전되고 있다.

달빛에 젖은 이야기를 햇볕에 드러내는 우는 범하지 않겠다.

 

마애불은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으며 약간의 볼륨감 있는 상호를 제외하고는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특히 어깨 아래로는 무릎부분의 둥근 법의 자락만 희미할 뿐 육안으로 구분이 쉽지 않다.

 

 

 

2줄로 표현된 두광

아쉽게도  두광 안쪽과 바깥쪽을 그라인더로 파낸 흔적이 남아 있다.

 

마애불은 소발에 살찐 상호이다.

두 눈은 길어 초생달 모습이며, 코는 뭉툭하게 새겼고, 입은 두텁게 표현하였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고 어깨는 움츠린 듯 보인다.

 

 

 

가는 손가락?

U字형 법의 끝자락이 무릎 아래까지 흘러 내렸다.

법의자락을 기준으로 입상으로 추정하였다.(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임)

 

 

불신 우측에도 하얗게 그라인드 흔적이 보인다.

 

 

 

 

불태산에 대한 글을 검색하여 찾은 자료이다.

 

한국매일 뉴스.2015.02.28

 

南道 정자기행(2045)-장성 정이암(鄭李菴)
저녁 달이 술잔에 거꾸러지며/봄바람이 내 얼굴에 뜨도다
하늘과 땅 사이 한 외로운 칼을 차고/길게 휘바람 불며 다시 누에 오르도다.

대월독작(對月獨酌)을 하며 진곡진 삶을 살다간 송강 정철, 전라도와의 인연이 생각보다 깊다. 그 흔적을 선비고을 장성에 찾는다.

전남 장성군 유탕리(流湯里), 서동과 상동이 합해진 마을이다. 서동(西洞)은 서굴에서 김해김씨가 500년전에 살았다는 말이 전해오며 현재의 김해김씨는 1700년경 입향하였다.1770년경 전주이씨, 1890년경 탐진최씨 등이 입향해 일제때는 70여호가 살았으며 여순 반란사건때 뒷산에서 군인 빨찌산이 교전하여 13명이 죽고 6.25때 주민 3명이 죽는 증 애환이 깊은 마을이다,

서동­유탕 계곡의 위쪽에 있어 상동이라 하고 상동의 서쪽골이기 때문에 서굴 또는 서동이라 하였다.  취봉사(鷲峯寺)ㆍ상청사(上淸寺)ㆍ하청사(下淸寺)ㆍ연화사(蓮花寺)․인월사․연화사․정이암․나옹암 등 많은 절터가 남아있다,

장성군의 진원면, 진원현이었던 고을에는 불대산(佛臺山) 또는 불태산이라는 명산이 자리하고 있다. 정상 불대봉(佛臺峯)은 북동쪽으로 병장산(685m)과 동쪽으로 병풍산(822m)이 위치하고 있다.

산줄기는 호남정맥이 추월산에서 내장산으로 내닫다가 도장봉 부근에서 남쪽으로 가지 친 지맥이 도마산, 투구봉, 병풍산을 일구고, 병풍산에 이르면 두 갈래를 친다. 북쪽은 송대봉과 장군봉으로 가고, 남쪽은 마운데미, 천봉, 불태산을 이루고 어등산까지 뻗어가다가 황룡강과 영산강에 가로막혀 여맥을 다한다.

이 깃을에
정이암(鄭李菴)은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처사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이 강학과 공부했던 곳으로 6.25때 소실. 최근 마을 가까이 옮겨 신축했다.

이기남(李箕南)은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김인후(金麟厚)·박 순(朴 淳)·정 철(鄭 澈)·기효간(奇孝諫) 등과 도의로 사귀었고, 선조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사헌부 감찰 등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기호(岐湖) 이문룡(李文龍)은 변이중(邊以中)·박광옥(朴光玉)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박광옥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며 백의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장성의 대표적인 철인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 ~ 1560)가 불대산의 낙조를 보고 읊었다.

세 성인의 무리는 그 뉘라더뇨/신선 부처 제들끼리 서로 뽑내네.
저 태양이 상기도 하늘에 있어 /높은 벽에 반조(半照)가 돌아오누나.

주변에는 용소가 있어  주변경치가 매우 좋다., 운동폭포 장성부사의 시가 남아있고  하청용추에는 삼청동구라 각자 되어있다.

길 위에 두 돌부처 벗고 굶고 마주 서서
바람비 눈서리를 맞도록 맞을망정
인간의 이별을 모르니 그를 부뤄 하노라.

길 위에 마주 서있는 돌부처는 밤낮으로 벗은 몸에 굶고 있으니 바람비 눈서리도 가리지 못한체 맞을대로 맞고는 있을망정 그래도 인간세상에서 겪는 생이별 사별의 슬픔을 아예모르니 그런 신세가 내게는부럽게만 여겨지는구나. 돌부처를 부러워했을 만큼 역사속의 소용용돌이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송강 정철, 장성에서도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고봉 기대승도 불대산에 있으면서 시를 남겼다.

가파른 봉우리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 미인은 아마 구름 가에 있으리라
편지로 평안한 소식 전해 오니 / 잔글자 성긴 글줄 어여쁘기도 하네
孤倚巉峯望海天 美人庶在暮雲邊 書來爲報平安信 細字踈行記可憐

진원(珍原)은 현으로  본래는 백제의 구사진(邱斯珍)이다. 당 나라가 백제를 멸하고 귀차(貴且)라 고치고 분차주(分嵯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귀원(貴原)으로 고치고 압성군(押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9년에 나주에 속하게 하고 명종 2년에는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현감으로 고치고 선조 경자년에 내속시켰다

진원고읍성(珍原古邑城) 구진성(丘珍城)이라고도 한다. 남쪽으로 15리 불대산(佛台山) 동쪽 기슭에 있다. 둘레가 1천 4백 척. 우물 셋, 여울 둘이 있다.

방랑시인의 원격인 청한자(淸寒子) 김시습(金時習 1435~1493), 그의 나이 29세(1463년)에 호남지방 지리산 남원 광한루 무등산과 규암 나주 영광 을 유란하며 유호남록(遊湖南錄)을 남겼다. 이때 장성 단남역과 장성 진원에 들리면서 불태봉에 있는 인월사(印月寺)에 들려 읊은 시로 다른 정자를 찾아나선다.

산중에 한 노승이 있으니, 옛스러운 모습 참으로 기이하네.
나를 맞아 하는 이야기 점점 신기한데, 대나무 가지에는 찬 눈이 뿌리네.

행장이 정말 시원하니, 시축(詩軸)과 의발(衣鉢)뿐이라네.
스스로 말하기를 늙음이 찾아드니, 석장(錫杖)을 걸어두고,

시냇가에 한가히 머물면서, 평생의 낙을 마음껏 하고 싶다 하네.
저 산 남쪽 기슭에 올라가니, 산이 깊어 고요하기에 맑은 시내에 집을 지었네.

그대는 쉬어가시어, 나의 오막살이 빛나게 하시오. 내가 마침 틈이 있어, 인월(印月)이라 편액을 써 주었네.
저 만 길 못을 바라보니, 바람이 고요하고 물빛 맑은데, 가을 달이 그 밑에 박은 것같이 밝고 맑아라.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흔들어도 없어지지 않으니, 늙은 스님 마음에 견줄 만하여,
도의(道義)가 더욱 높네. 활짝 트이어 근원에 통달하여, 나지도 않고 또한 없어지지도 않네.

만상의 맑음을 고요히 바라보니, 내 마음 자리에 박혀있구나. 결국 이름지을 것 없는 것인데,
암자에 이름지어 뜻을 붙이네. 뒷날에 마음을 깨닫고 보면, 이 또한 그저 평범한 일이리라.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전번역서

문화.김은희

 

 

 

 

 

사지에는 우물지를 비롯하여 자연 암반을 이용한 돌확도 남아 있다.

 

 

 

불태산

유산기遊山記 한 편 있었으면...

 

201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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