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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무주군

무주...덕유산 백련사

by 임병기(선과) 2016.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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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인파가 인산인해 아니지 인산차해를 이루는 삼공리 입구

편도 1시간 30분 예상되는 거리, 길은 나무가 우거지고,구천동 계곡이 옆으로 흘러 내리는 평이한 코스지만 혼자이기에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1시간 10분여 만에 눈앞에 일주문이 보인다. 순례시간 포함 왕복 3시간 20분 소요 되었다.

 

 

백련사 일주문

 

구천동 계곡의 백련사.

구천동 지명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구천동九千洞 명칭은 조선 명종 7년(1552년)에 갈천 임훈의 기행문 중 ‘향적봉기’이다. 그러나 임훈의 항적봉기에는 구천동(洞)을 둔(屯)로 표현하였으며 다른 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다.

 

갈천 임훈.덕유산향적봉기.구천둔九千

명재 윤증.여광노산기행기.구천동九千洞

미수 허목.덕유산기. 구천뢰九千磊

 

구천동 유래에 대한 설은 문헌 외에도 다양하다.
첫째, 백련암을 중심으로 현재의 삼공리 협곡에 9천명의 스님이 살았다는 설
둘째, 구(具)씨와 천(千)씨가 많이 많이 살았다는 설
셋째, 구천동은 산과 산으로 중첩되어 깊고 깊은 곳에 위치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부도전

일주문 우측 매월당 부도를 비롯 조선후기 석종형부도 5기가 모셔져 있다.

 

 

부도 1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포탄형이다.

방형대석 상부에는 복련이 조식되어 있으며 긴 탑신 상부에는 복련, 연주문을 두르고, 두터운 받침위에 보주를 올렸다.

 

 

대석

 

 

보주

 

 

 

부도 2

이름이 전하지 않는 부도.

상부에 복련이 조식된 지대석, 뒤집혀진 하대석,원구형 탑신,사모지붕의 옥개석으로 구성된 부도

 

 

지대석, 하대석

 

 

옥개석. 보주는 결실되었다.

 

 

 

부도 3

매월당梅月堂 설흔법사雪欣法師 부도

탑신에는 매월당 설흔지탑梅月堂雪欣之塔,  옆에 건융갑진삼월 일乾隆甲辰三月 日 생질甥姪 임선행林善行建 명문이 있다. 즉,  설흔 스님의 부도로 정조 8년(1784) 3월,  조카 임선행에 의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매월당 설흔은 영조 48년(1772) 안국사 후불탱화 조성에 참여한 스님으로, 12년 뒤인 정조 8년(1784) 구천동 백련사에서 입적入寂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둥근 2대석에 복련을 새기고, 한 개의 부재인 상부에 1단 괴임 두었다. 석종형 탑신과 상륜을 하나의 돌에 새겼다.탑신 상부에 복련을 새기고 연주문 괴임위에 앙련이 새겨진 보주로 장식했다.

 

 

대좌

 

 

상륜

 

 

명문

 

 

매월당 설잠 김시습 부도로 오인되어 웃지못 할 에피소드가 전한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과 구천동은 언제부터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전하지 안는다. 그런데 후손이 근방에 살고 있었으며, 위토답位土畓이 있어 매년 음력 9월 9일이면 제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광무 4년(1900)에는 무주부사 이하섭이 백련사를 중수할 때 매월당의 초상 앞에 제사를 올렸다고도 전해진다.

 

조성 명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매월당梅月堂 설흔雪欣을. 매월당梅月堂 설잠雪岑으로 지레짐작한 연유인 까닭이다.

 

 

부도 4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도로 상륜이 결실되었다.

 

 

 

 

 

 

부도 5

이름이 전하지 않은 부도로 부도2와 비슷한 형이다.

 

 

 

 

 

 

천왕문과 부도

 

 

탑신에 정관당 일선탑(靜觀堂 一禪塔),대좌에 만력 37년건(萬曆三十七年建)’ 명문이 새겨져 있다. 조선 광해군 원년(1609)에 세운 부도이다.  정관당 곽일선은 조선 중엽 전북 불교보급에 큰 영향을 미친 대선사이다. 그는 중종 28년(1533) 충남 연산에서 태어나 일찍이 소년 시절에 입산 수도하여 승려가 되었고, 말년에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고승 임성당 충언, 시승 운곡당 충휘 등 많은 제자들을 남겼다.

 

연꽃을 두른 원형의 받침돌 위로 길쭉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간략한 형태이다. 탑신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보주는 탑신에 비해 지나치게 작게  마무리하였다.

 

 

 

정관당. 일선

 

 

보주

 

 

 

 

 

 

 

보제루

 

 

범종각

 

 

백련사는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830년(흥덕왕 5) 무염국사가 창건하였는데 그 뒤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다. 1820년(순조 2)에 혜언이 백련사에서 화엄회를 개설하였고, 1900년(광무 4) 무주부사 이하섭이 가람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가 1961년에 인법당을 지었다.

 

그 뒤 무주구천동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백련사도 복원되기 시작하여, 1967년무주읍내에 있던 조선시대 무주부  동헌軒을 이건하여 요사 문향헌으로 사용하였다.(관아 건물 부재를 사찰건물에 사용한 예는 부여 대조사에도 전하고 있지만 흔치 않은 경우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명부전·보제루·천왕문·일주문·범종각 등이 있다

 

 

대웅전

 

 

한석봉 글씨

 

 

원통전

 

 

구시.

영화를 암시하고 있다.

 

 

백련사 계단 오르는 길의 삼성각

 

 

문향헌軒. 얼핏보아도 사찰건물에 흔치 않은 배치이다.

1967년무주읍내에 있던 조선시대 무주부  동헌軒을 이건한 건물로 전한다.

 

 

약수터. 맷돌 2개

 

 

백련사 계단

향적봉 산행길 10여분.

40년 만에 해후, 난 아무 것도 기억 할 수 없었다.

 

계단

백련사 스님들의 수계의식受을 행하던 단?

 

 

대좌

 

 

상륜부

 

 

대좌?

동·서·남·북의 방위를 장식한 듯한 삼각점의 홈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안에  원이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 구천동사를 창건한 대원대도대사의 부도라고 전한다.

조선시대 부도라는 이야기 보다 달빛에 젖은 이야기도 좋다. 더불어 누구든지 계단 앞에서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주변을 일곱 번 이상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누구인가?

 

 

1977년 여름

너는 어디로 가고......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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