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봉 마애불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삼도봉으로 목적지를 잡아야 한다. 나는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를 통하여 산행을 시작했다. 예전과 달리 대형 버스도 이곳 해인리 마을회관 앞에 2~3대 주차 가능하며, 승용차는 이곳을 통과하여 해인산장, 산불 감시초소 앞까지 진입 가능하다. 산불 감시초소 우측 등반코스를 통하는 길도 있지만 산불예방으로 출입이 통제되지 않을 때는 좌측 시멘트 포장길을 통하여 중턱 주차장까지 진입 가능하다.
삼도봉
삼도봉(1176M)은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무주군 설천면 대불리,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의 도계이다. 3개 지자체는 매년 10월 3개 도민의 화홥을 다지는 '삼도봉 만남의 날' 행사를 1988년부터 개최하고 있다. 무주군의 제의로 지역 간 불신의 벽을 허물고 화합과 공동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삼도봉에서 바라본 김천시 부항면
무주군 설천면
석기봉 코스에서 뒤돌아 본 삼도봉
석기봉
삼도봉에서 민주지산 방향 능선을 따라가는 1.4KM 거리의 평이한 코스이다.
위 표지판을 지나 석기봉 직전에 보이는 그림이다. 바위와 산행객이 쌓응 돌무더기, 석기봉으로 오르는 밧줄, 이사진 좌측으로 무주군으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길을 따라 약 100M 내려가면 마애불이 자리한다.
높이는 1,200m이다. 바위산이며, 쌀겨처럼 생겼다고 하여 쌀개봉이라 부른데서 석기봉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삼도봉(1,176m)을 시작으로 민주지산(1,242m), 각호산(1,176m)과 함께 웅장한 서북 능선을 이루는 산군에 속한다. 각호산 미주지산 삼도봉을 잇는 능선은 수림이 우거지고 바위들이 섞여 있으며 봄이면 능선을 따라 8㎞에 걸쳐 진달래가 만발한다. 그 산들 사이에는 유명한 피서지인 물한계곡이 자리잡고 있다. 조망이 좋아서 정상에서는 북동쪽으로 황악산, 동남쪽으로 가야산, 서남쪽으로 마이산이 보인다.
마애불이 바라보는 무주군 설천면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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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날 밤 꿈속에서 아련거리던 님이시다. 그님이 연무를 헤치며 가는 비 속으로 나투신다. 말문이 막히고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삼두마애불이다. 앞선 사람들은 왜 민속신앙과 결합된 존상으로 보는 것일까?
마애불 앞에 세워진 설명문을 보자.
"석기봉에서 서남방향 바위에 양각된 삼신상三神像, 一身三頭像이 있다. 이 삼신상은 고려 또는 백제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근화좌대槿花坐臺 위에 오른쪽에 납의를 두르고 결가부좌를 한 형상이다.왼쪽발가락이 오른쪽 정강이 아래로 튀어 나와 있는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몸에 비해 얼굴은 비대하고 방형에 가깝다. 귀는 목까지 내려와 있으며 양손은 약간 벌어진 형태로 가슴에 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얼굴은 풍화되어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나 가늘게 뜬 눈,다문 입술, 얕게 조형된 콧등이 희미하게 보인다. 삼신상 앞에는 공터가 있는데 예로부터 하늘과 산신에게 비는 기도처로 이름 나있다.
삼신三神은 천지인을 말하는데 천天은 칠성七星, 지地는 용왕龍王 인人은 산신山神을 뜻하기도 한다. 삼신은 우리 민간신앙의 터전이 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삼신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위의 설명을 아니라고 할만한 근거가 내게는 없다. 여러 자료를 검색하여도 마애불에 대한 글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대 이 안내문을 세운 주체인 '삼신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운 안내문 때문에 모든 매체와 인터넷상에 삼신상으로 회자되고 있다.즉 불교의 불보살이 아니라 민속신앙인 삼신상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불보살이 아니기에 대좌도 연화대좌가 아니라 근화좌대槿花坐臺로 설명하였다.
지자체 또는 문화재청에서 고증을 통하여 공식적인 발표가 없는 상황에서 삼신으로 정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불보살이라면 그냥 미륵불로 부르면 최고의 선일텐데 그래도 한 번 살펴보자. 삼도 아래에 영락이 보이고(사진 테크닉이 엉망이다), 맨위에는 희미하지만 보관이 있으며 그 위에는 석탑 상륜처럼 노반 복발 보개 보주도 보인다고 한다(기실 내눈에도 긴가민가이다). 그럼 생각나는 존상이 없는가? 그렇다. 보살상의 특징이다.(근거도 빈약하면서 진도 너무 나가는 것 아닌가 몰러?). 여기까지만 살펴보아도 존상은 마애삼신좌상이 아니라 마애보살좌상이 옳지 않을까?
상호가 셋이라니?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이 없는가? 석굴암 11면 관음보살 입상 기억하는가?
근화대좌? 연화대좌?
왼쪽발가락이 오른쪽 정강이 아래로 튀어 나왔다.
우리카페 재야의 고수 민학기님은 맨위 보관 뿐만 아니라 두 기 상호도 보관으로 해석한다. 즉 보관 안의 화불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33관음의 변화관음인 삼면관음보살좌상으로 정의한다. 또한 변화관음은 밀교의 발달에 따라 11면,6면,7면 33면관음보살로 전개되면 3면 관음은 중국 비래봉 3면 팔비보살상이 전한다고 한다.
중국 비래봉 삼면팔비보살상...사진 출처/민학기님
이해를 돕기 위해 석굴암 11면 관음에 대한 설명을 허균의 사찰 100미 100선에서 가져왔다.
마애삼면관음보살좌상?
조성시기는 언제일까? 설명문에는 백제, 또는 고려로 표기했지만 객관적인 자료는 어디에서 구했을까? 문화재청 사지총람에는 조선시대로 등재되어 있다.
이 보살상의 큰 특징은 삼두와 불신과 전혀 비례가 맞지 않은 작은 손이다. 다른 도상은 뒤로 두고 작은 손을 가진 마애불을 살펴보면 고려초기의 불상들이다. 그렇다고 석기봉마애보살의 조성시기를 고려초로 단정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고령 개포리 마애관음보살좌상(985년 조성)
이천 소고리 마애삼존불
대불리"마을의 명칭은 옛날부터 불교와 관계되는 불대, 불당골, 중현 등과 같은 지명이 전해오고 있으며, 계곡 어디인가 알 수 없는 땅속에서 묻혀있는 부처 님이 땅위로 나올 때는 극락정토가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내북마을 불대와 불당골은 옛날 큰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오는데 마을 서쪽 계곡의 불당골에는 지금도 절터로 보이는 건물지의 기단석과 주초석이 남아있고 탑신, 옥개석,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안골짜기 중고개(중현) 정상에는 어느 시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두 형상을 하고 있는 마애불상이 석기봉 석벽에 새겨져 있다."
위의 설명으로 미루어 석기봉 마애보살은 불당골에 있었던 큰 사찰의 암자였음을 알 수 있다.
제글은 어떤 근거가 있는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전문가, 불교미술사가, 교수님들이 공동으로 조사, 고증하여 시급히 존명을 찾아 주었으면 더없이 좋겠다. 그날이 오면 언제라도 당장 달려갈텐데.
마애불 아래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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