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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무주군

무주...관음사 목조관음보살좌상

by 임병기(선과) 2016.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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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마을길을 한참 헤맨 후 산자락에 자리한 관음사에 도착했다.

주차 후 절집 경내로 들어서는 순간 요사에서 노비구니스님이 문을 열고 객을 맞이한다.

스님 법당에 계시는 관음보살님 뵙고 싶습니다라는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사 안으로 들어가더니 열쇠꾸러미를 들고 나와 앞장 서서 법보전 문을 열어 주신다.

 

절집에서는

익숙한, 다반사의 아니 일상적인 일이어야하는데

가슴 뭉클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왜일까?

 

관음사 위키백과에 소개된 글이다

"설천면 소천마을 백운산 기슭에 위치한 조계종 소속의 비구니 사찰이다. 1938년 포교당으로 시작했고, 2년 뒤인 1940년 석쌍동 스님에 의해 사찰로 발전했다. 1974년 관정 성효례 스님에 의해 중건된 법보전을 중심으로 그 옆에는 선방인 목우실과 요사가 배치돼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

법보전으로 들어오신 노스님께서 전원을 올려주어 보살상을 더욱 유심히 뵐 수 있었다.

 

불신에 비하여 모리가 다소 큰 편으로, 머리를 약간 숙이고 결가부좌하였으며 무릎이 높아 안정적인 모습니다.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높고 길쭉한 보계를 표현하였다. 보발은 어깨 위에서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흘러내렸다. 방형 상호,백호를 표현하였으며, 눈썹은 가늘고, 눈은 반개한 듯 보인다. 코는 오똑하며 입술은 꾹 다물었다.

 

법의는 통견, 왼쪽의 법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에서부터 무릎 부분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을 손목 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오른쪽에는 안쪽에 통견으로 법의를 걸친 뒤 다시 법의 한자락이 어깨를 덮고 있는데, 안쪽의 법의 자락은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승각기는 수평으로 매듭없이 표현 하였다. 수인은미타인이며, 왼손에는 정병이 끈으로 매달려 있다. 두 손은 별도로 조각하여 끼웠다.

 

 

"보살상의 밑부분에는 복장공()이 마련되어 불상 조성 발원문과 경전류 등이 들어 있었다. 불상 발원기는 앞부분에 시주질을 적고 뒷부분에 화원 등 연화질()과 조성 연대를 기록하였으며, 제일 마지막 부분에 중수연대를 적었다. 발원기에 의하면 이 보살상은 1650년(효종 1)에 화주 덕인()이 조성하였고, 1676년(숙종 2)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또한 화원은 무염(), 성수(), 경성()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화원’이라는 명칭 아래 크게 적혀있는 성수, 경성과는 달리 무염은 작고 가는 글씨로 성수 이름 윗부분에 적어놓았다. 이로써 본다면, 무염은 불상을 제작할 때에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았다가 1676년(숙종 2) 중수할 때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염

"17세기 전반의 가장 큰 조각승 유파인 무염파를 세우고 이끈 무염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624년 순천() 송광사() 광원암()의 목조아미타불좌상 조성발원문에 화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1633년 고창() 선운사() 목조삼방불좌상 조성 불사에서부터 1656년 완주() 송광사() 나한전 목조삼세불좌상 조성에 이르기까지 수조각승으로 활동하였다. 무염파는 도우(), 성수(), 해심(), 해기(), 도균(), 명조(), 경성() 등 80여 명의 조각승들로 구성된 조선후기 최대의 조각승 유파였으며,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염파는 이미 1633년 고창 선운사 대웅전의 목조삼방불좌상 조성 불사에 유파의 구성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아, 늦어도 1620년대 말에는 유파가 구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630∼40년대의 초기 무염파의 활동은 1635년에 조성된 영광() 불갑사() 대웅전의 목조삼방불좌상을 제외하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1650년대가 그의 전성기였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1650년에 제작된 대전() 비래사() 대적광전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1652년 작품인 완주() 정수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그의 대표작이다. 무염파의 1650년대 작품들은 팽팽한 양감이 강조된 얼굴과 신체, 그리고 양각과 음각이 함께 사용되어 도드라진 입체감이 잘 표현된 옷주름 등이 특징이다.

 

1650년대는 무염의 전성기이자 마지막 활동기인 것으로 판단된다. 1650년대에 들어 그의 제자인 해심이 수조각승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1651년에 조성된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과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좌상, 그리고 1654년 작품인 영광 불갑사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좌상 등에서처럼 수조각승 무염의 특징과 함께 해심의 작풍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1650년대였기 때문이다. 무염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이며 무염파를 실질적으로 계승한 해심은 스승인 무염의 작풍을 계승하면서도 좌우대칭의 도식적인 옷주름과 두껍고 안정적인 하반신을 특징으로 한 불상들을 조성하였다. 1660년대 이후의 불상 가운데 무염파 작풍이 구현된 작품들은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어,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조각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일한 사전에 등재된 내용이 상충된다.

무주관음사 발원기 설명문 내용에는 "1676년 중수할 때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라고 했다.

그러나 아래 무염에 관한 설명에는 "1660년대 이후 무염파 작품은 발견된 사례가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수한 예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가?

 

 

보살상 보관에 화불이 없어 존명이 관음보살상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며 보살상으로 설명한 자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왼손에 정병을 지물로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표현하였다.

관음보살상의 크기로 미루어 단독으로 조성된 상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협시불로 판단되지만 근거는 없다.

발원기에는 존명과 조성한 사찰명이 있으나 불분명하다고 한다.

 

 

 

 

칠성도.

화기에 의하면 조성년대는 북방불기로 표현되어 있었으며 서기로 환산하면 해방직전 1942년이었다.

조성한 사찰은 관음사 전신인 1938년 창건한 무주포교당이었다.

 

 

신중도

칠성도와 조성년대, 조성사찰이 동일

 

 

산신도

칠성도,신장도와 함께 봉안

 

 

 

나한상일까?

 

 

절집 인심

무주의 작은 절집은 예나지나 한결 같았다.

 

요사채로 향하는  굽은 허리의 노스님

오래오래

순례객들에게 절집의 참모습을 보여주십시오

()()()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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