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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무주군

무주...칠연의총

by 임병기(선과) 2011.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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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기 무섭게 탐방지원센터 안내부스에 계시던 분이 달려 나와 칠연의총을 안내 한다. 내가 차에 내리기 전에 지나가는 분에게 위치를 탐문한 것을 들은 모양이다. 요즈음 덕유산 뿐만 아니라 국립공원 직원들의 친절도가 기대 이상이다. 립서비스가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은 금융기관 창구를 방불케한다. 행자부 소속 공직자들이 벤치마킹하였으면 좋겠다.

 

 

덕유산 칠연계곡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계곡으로 덕유산 중봉과 무룡산 사이 동엽령에서 발원하여 칠연폭포, 용추폭포, 명제소, 문덕소, 도술담 등의 아름답고 신비한 비경을 연출하며 금강 상류인 구리향천으로 흘러간다. 또한 계곡에는 전북 자연학습원이 자리하고 있어 피서와 더불어 체험 학습이 가능하며 한말 피눈물나는 비통한 역사의 현장인 칠연의총을 둘러 볼 수 있다.

 

 

칠연의총은 안성면 공정리 통안마을의 속칭 송정골에 위치한 구한말 의병들의 무덤이다. 이 곳에 묻힌 의병들의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150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의병장은 신명선(申明善. 또는 明先)이다. 그의 군대는 무주의 칠연계곡에서 휴식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 150여명이 모두 이곳에서 옥쇄하였는데,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였다.

 

그 뒤 생존 의병인 문봉호(文奉鎬)가 인근 주민의 도움을 받아 유해(遺骸)를 수습하여 송정골에 안치하였고, 1969년 지역의 향토예비군에 의해 흩어진 유해를 다시 수습, 성분(成墳)하고 묘역을 정비한 후 백의총(百義愼)이라 불렀는데,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칠연의총’이라 하였다. 2003년 12월 11일 ‘칠연의총 성역화’ 사업을 통해 다시 정비되었다.

 

 

신명선(~1908).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 당하자, 시위대 출신 군인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무주 출신으로 시위대에 소속했던 신명선 역시 덕유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는데, 창의 준비를 위해 황이만·황덕화·문봉호·홍병철·정석마 등과 함께 1907년 11월 30일경 금산군에 사는 음대보와 김내삼의 집에 들어가 금 23냥을 모금하였다.


이 해 겨울에는 김동신 의병대, 이석용 의병대와 연합하여 진안과 임실·순창 등지에서 격전을 치뤘다. 이듬해인 1908년 덕유산으로 돌아온 그는 정월 초 무주 적상면 배골 접전 모퉁이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하였다. 이어 정월 대보름날에는 문태서의 호남의병대와 합세하여 부남면 고창곡 옥녀봉 골짜기에서 일본군 수비대 43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자루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진안·거창·함양 등지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장수를 거쳐 칠연계곡으로 진군하다가 통안리 함지 방앗간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908년 4월 10일 문태서와 함께 장수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마침 주재소의 일경들은 모두 의병 토벌작전에 동원되어 나가고 한국인 순사 1명만 있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별다른 저항 없이 주재소의 기물을 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학교·군청 등의 부속물의 건물, 그리고 일인(日人)가옥 13동을 불태우고 유유히 무주 쪽으로 퇴거하였고, 동월 13일에는 안성에서 진안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무주의 칠연계곡에서 유진(留陣)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 100여명이 모두 이곳에서 옥쇄했는데,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였다. 신명선의 이 때 나이는 30세 전후였으며, 연설에 능하고 체구는 거구였다고 한다 신명선이 순국한 후 그의 아우가 계속 의진을 이끌고 활약하였다. 즉 1908년 4월 말에 장수읍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남긴 것 등이 아우의 활약상이었다. 그러나 아우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실정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다.

 

 

2011.07.25

 

***무주군청 홈페이지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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