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거창군

거창...포충사와 비석군

임병기(선과) 2016. 8. 11.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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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양면 포충사褒忠祠
30년도 더 지난 답사초기에는 편식하지 않고 향교,서원, 사당, 고택을 동선에 포함하였으나 어느 순간 부터 석조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답사 패턴이 굳어버렸다. 물론 주변에 있는 문화재는 가능한 뵐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포충사는 어떻게 동선에 잡았을까?
답사전 자료 검색 과정에서 하마비.묘정비, 충노비,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한글명문이 새겨진 철비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충사褒忠祠
1737년(영조 13) 이술원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우
1768년 영조임금으로 부터 포충사 현판을 사액 받았으며,1752년 거창읍 대동리에서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포충사는 사당, 내삼문, 경의당, 자전루가 일직선 상에 있고 양사당이 자전루의 좌측면에 놓인 배치이며, 자전루 향좌측 비림 뒤편 도로변에 정려각과 묘정비가 있다.


이술원(1679~1728)의 본관은 연안, 자는 선숙, 호는 화촌 이며 거창 출신이다. 1728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서울로 북상하고, 안의현에서 정희량이 이에 합세하였을 때 이술원은 좌수로서 거창현감 신정모로부터 현내의 군사권을 위임받아 끝까지 대적하였으나 결국 정희량에게 체포되어 죽었다. 그뒤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충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지금은  많은 지자체에서 향교,서원, 사당, 조선시대 관아건물 등을 개방하고 있는 추세인데 포충사는 외삼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자전루紫電樓 밖 비림.
거창지역에 흩어진 비를 모은 비석군이다.
하마비. 충노비 2. 정려비.이수부분이 훼손된 관찰사비. 현감 철비




그런저런 상념에 들게하는 면면의 비석을 모아 놓았다.




하마비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충노상발지비忠奴尙發之碑
충강공 화촌선생의 비로써 공과 함께 순절한 노비를 기리는 비석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바로 옆에 또 한 기의 동일한 상발尙發의 비가 서 있다.
모르긴해도  2 곳에 있던 비를 모은 것 같다.




충노상발지비忠奴尙發之碑






이우방(이술원의 아들)정려비




관찰사조공시영영세불망비 觀察使 曺公始永 永世不忘碑
이수부분의 훼손이 많은 것을 시사하는 듯 하다.




부사 김후계진 영세불망비府使 金侯啓鎭 永世不忘碑
下車三載 著績廉公
○○○○ 應○○○
古祠改觀 後學啓蒙
一○○○ 永○○○





비석은 1877년(고종 14년)에 거창군수로 부임, 청렴한 공적을 세운 김계진(1823~1881) 군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철비로 네 개의 돌기둥 위에 지붕을 올린 비각의 형태를 하고 있다


후면

긔(묘+ㅣ)동짓달일립

철비에 한글 명문을 새긴 유일한 작례이며, 기묘년(1879년) 동지달에 건립했다는 의미이다.
근데 거꾸로 새겼다.

<p<









포충사 답사 목적?
심충성님의 철비사진에서 앞쪽 2개 돌기둥이 당간지주를 활용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사진 앞쪽 좌측 돌기둥 안쪽 상하의 장방형 홈이 당간지주 간구 모습 아닌가? 






이 사진에도 희미하지만 좌측 기둥에 장방형 홈이 보인다.
참!!
지지리도 사진 못 찍는다.




심충성님 사진
그렇다면 심충성님의 사진을 보자.
분명하지 않은가?
괘불대로 보려니 뒤쪽 돌기둥에는 홈이 없고, 당간지주에 무게 중시을 두고 들렸다.
결론은
괘불대도 당간지주도 아니었으며 아주 얕게 장방형을 홈을 파낸 나무 돌란대 홈으로 보였다.




정려각과 묘정비


정려각旌閭閣


이술원과 이우방의 旌閭文이 봉안되어 있다.




포충사 묘정비廟庭碑


이술원의 가계와 무신난 때의 활약상, 그리고 아들 이우방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일화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성균관좨주 송환기(宋煥箕)가 짓고, 통훈대부 사헌부집의 겸 경연관송치규(宋穉圭)가 글씨를 쓰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이계원(李棨源)이 전액(篆額)하였다. 순조 7년(1807년) 10월에 세움






지금은  많은 지자체에서 향교, 서원, 사당, 조선시대 관아건물 등을 개방하고 있는 추세인데 포충사는 외삼문이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살필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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