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거창군

거창...연수사 환적당지경 부도

임병기(선과) 2017. 7. 11.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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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악산 연수사

일주문 앞까지 차량 진입가능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감악산 정상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일주문 옆 은행나무

수령 600여년의 연수사 텃주대감이다.

 

 

600년 전 고려왕족에 혼인한 여인이 고려가 멸망하여 아들과 함께 속세를 떠나 연수사로 들어와 심은 나무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틋한 그리움과 모정이 묻어 있다. 지금도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친 어머니의 혼을 담고 있는 은행나무가 가끔 슬피 우는데, 곡을 하듯 슬피 우는 은행나무의 울음은 인근의 마을사람들도 듣고 함께 울게 할 만큼 그 슬픔의 흐느낌이 애절하다고 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다른 전설이 등재되어 있지만 모자간의 애틋한 사랑이 어린 이야기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심은 나무라고 전해지며, 또한 젊은 여승이 아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10살된 아들은 전나무를, 어머니는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전나무는 부러져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무심히 자라고 있다.

 

 

사찰 안내문에 의하면 연수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년) 감악조사가 청건하였으며,연수사 약수는 신라 헌강왕(憲康王)과 얽힌 전설로 천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발길을 이어지게 하고 있다. 헌강왕이 중풍을 크게 앓았는데, 현몽을 꾸고 거창 연수사가 있는 곳을 찾아 이곳의 물로 보름 만에 병이 깨끗이 낫게 되었다. 헌강왕이 부처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이곳에 절을 크게 짓고 불심을 키웠다고 한다. 이후 조선 숙종(옥에 티 : 현장 안내문에는 이조 숙종시라고 표기 ) 벽암선사가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예불을 올리고 있어 대웅전 참배도 미루고 부도를 찾아 나섰다.

 

 

부도 가는 길

(어렵게 뵈었지만 쉬운 길을 알려드린다)

 

일주문 향좌측 길로 방향을 잡으면 이정표가 보인다.

펜스친 건물 좌측 아랫길 이정표의 감악로,심신도량 하는길로 내려간다.

 

여기에 부도 표식이 있으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을텐데...

 

 

200여미터 하산

정자와 부도 표시(150미터)가 보인다.

 

 

정자 향우측으로 내려서서 작은 개울을 건너 아랫길로 내려간다.

 

 

두번째 개울이 길을 막는다

여기서 좌측 아래로 향한다.

(내가 우측 방향에 나뭇가지를 걸쳐 두고, 땅에도 둥걸로 진입 금지를 표시해두었다)

 

좌측으로 내려가 개울을 건너가면 잡초 사이로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연수사 부도

지대석 위에 중대석 없이 선각으로 복련과 앙련이 새겨진 상.하대좌를 대칭으로 올렸다.

탑신과 보주가 일석이며, 탑신 상부에 돋을대를 두고 앙련이 조식된 보주를 올렸다.

조선후기의 부도이다.

 

 

 

대좌

 

 

 

보주

 

 

 

 

환적당 지경스님의 부도이다.


환적당 지경(1603(선조 36)∼1690(숙종 16).

선승(禪僧). 성은 문씨. 자는 지경(智鏡), 호는 환적(幻寂). 경상북도 구미 출신. 5세 때 아버지가 죽자 11세에 어머니를 따라서 충청북도 보은의 외가에 가서 살았다. 그 해에 출가하여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진정(塵靜)의 제자가 되었다. 14세에 스승을 따라서 금강산정양사(正陽寺)로 갔다. 이때 편양(鞭羊)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열심히 정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1년 동안 정양사에 머물다가 속리산으로 돌아와서 16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로 가서 유현(惟賢)에게 경론을 배우고, 21세에 청량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였다. 이때 솔잎과 솔방울을 먹으면서 일체의 곡식을 먹지 않았으며, 그 뒤 31년 동안 생식을 계속하였다. 29세 때 다시 금강산으로 가서 편양으로부터 화두(話頭)을 받고 용맹정진하다가 여러 사찰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다.1644년(인조 22) 편양의 죽음을 전하여 듣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1년 뒤에 정양사로 가서 편양의 탑과 비를 건립하였다.


1646년 보은의 어머니를 모셔와서 보천사(寶泉寺) 가까이에 작은 집을 지어 머무르게 하고 3년 동안 봉양하다가 다시 여러 곳으로 유람하였다. 51세 때 금사사(金沙寺) 미타전에서 어머니가 생식을 금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하였으므로 다시 불에 익힌 음식을 먹게 되었다.1656년(효종 7) 어머니가 죽자 정성껏 장례를 치른 뒤 여러 사찰을 다니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689년(숙종 15) 가야산 해인사의 백련암(白蓮庵)에 머물러 더욱 정진하다가 이듬해에 입적하였다. 다비(茶毘)하자 사리와 정골(頂骨)이 나왔는데, 사리는 생전에 인연이 깊었던 문경 봉암사, 춘천 문수사, 충주 월악산 덕주사, 대구 용연사, 태백산 각화사, 거창 연수사, 가야산 해인사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며, 정골은 대곡사(大谷寺)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그의 법맥은 휴정(休靜)-편양-의천으로 이어지며, 법을 이은 제자로는 조영(照影)·신경(伸敬)·상희(尙熙)·청심(淸心)·쾌민(快敏) 등이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척 어렵게 인연 지은 님

그래서

더욱 기억에 오래 남을 듯.

 

201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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