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박물관에 산포한 석탑(석타 부재 포함)을 제외하면 경북 안동의 33기 석탑이 그뒤를 이을 것이다. 다음 지역은 어딜까? 모르긴 해도 경북 의성도 선두대열에 자리하지 않을까?
우리카페 일천님이 지장암 스님에게 정보를 입수하여 다녀온 후 사진을 올려주었다. 다음 날 의성의 석탑, 석탑재, 석불은 모두 섭렵한 줄 알고 있었기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뵈었다.
지장사의 산내 암자터로 알려진 도장암은, 안사면 월소리 지장사에서 예천 방향 월소1리 무랭이마을을 지나 좌측 평산신씨 재사 안내석을 따라 좁은 길을 올라가면 된다(차량 교행이 불가하여 운전시 주의가 필요하다). 길이 끝나는 지점, 도장산을 배경으로 아늑한 터에 저수지, 영모루, 도장암, 문간채.관리동이 배치되어 있으며 현재도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는 듯 보였다.
도장암道藏菴은 평산 신씨 신사국과 신사억이 어버이를 그리워하여, 묘소 가까이에 지은 재사이다. 정면에는 영모루永慕樓가 있는데, 신사국이 생전에 계획한 것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손자 신광흡과 신광집이 세운 건물이라고 영모루기에 실려 있다. 1758년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그 후 퇴락한 것을 1986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영모루기에 의하면 재사를 추원당追遠堂으로 하였다는 글이 보이지만, 현재는 도장암道藏菴 현판이 걸려있다. 혹 도장암은 평산신씨 집안의 원당사찰은 아니었을까?
영모루永慕樓 사당의 루대로 문을 열면 저수지 앞으로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영모루 현판
도장암 영모루기(道藏庵永慕樓記) 의성군 안사면 월소 1리 평산 신씨 사간공 파...출처/장달수의 한국학카페
영남지역의 용주(龍州)는 본디 명승지로 일컬어졌다. 용의 허리 어느 한 기슭은 꿈틀꿈틀 이어져 물한리(物閒里)까지 이르러 한 지역을 결성하였다. 가운데에 여러 봉분이 있는데 여러 산등성이를 죽 차지하고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울창하여 몇 리를 빙 두르고 있으니, 길을 가다가 가리키며 “이곳은 구담신씨(九潭申氏)의 선산이다.”라고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근래 상사(上舍) 내길(來吉) 신광흡(申光翕: 1735∼?)과 사협(士恊) 신광집(申光集: 1738∼?) 형제가 서로 의논하여 재실을 수리하고 다시 당(堂) 하나를 만들었다. 인하여 작은 누대를 세웠으니, 진실로 그의 조부인 처사공(處士公) 신사국(申思國: 1696∼?)이 남긴 뜻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 당을 ‘추원(追遠)’이라고 이름 짓고 누대를 ‘영모(永慕)’라고 하였으니, 그 의미는 대체로 처사공의 실적에 의거한 것이다.
아! 처사공의 독실한 효성은 진실로 견줄 자가 드물었다. 어려서 부친 신호(申鎬: 1676∼1705)의 상을 당하자 숨이 끊어질 듯 울부짖고 애통하게 그리워하였는데, 삼년을 하루 같이 하였다. 50년 동안 모친을 봉양하면서 정성과 효성을 더욱 지극히 하였다.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는 막내아우 졸암공(拙菴公) 신사억(申思億: 1705∼?)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면서 예를 지켰는데,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몸이 상하도록 슬퍼하여 시종일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공의 나이가 60이 넘었다. 상을 마치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외로운 처지인데 다시 무엇을 의지할까?
나는 무덤 곁에서 목숨을 마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덤 아래에 10여 칸의 재사(齋舍)를 지어 오가며 우러러 살폈는데, 열흘간격도 뜸하다고 여겼으며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 들었다고 하여 그만둔 적이 없었다. 유복자의 아픔을 겪었던 졸암공에 이르러서는 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의 환갑이 되던 해에 소복의 베로 만든 띠를 항상 재실에 두고 새벽과 저녁마다 부여잡고 울부짖었으니, 거의 초상 때와 같아서 미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 공의 형제는 ‘영원토록 효성을 바친다[永言孝思]’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추성[孟子]께서 순임금은 50이 되어도 어버이를 사모하였다고 칭송하였는데, 종신토록 어버이를 사모한 것은 진실로 효성 가운데서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으니, 전후에서 그들 사람 가운데 효자라고 칭송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러한 점을 들어서 의심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부자[孔子]께서 민자건(閔子騫)의 효성을 칭찬하시면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는 부모 형제들의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다. 지금 공의 여러 자손들은 공의 효성을 말하면서, 급기야 종신토록 어버이를 사모했다는 말로 칭송하고 있고 고을의 친족들 가운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공이 일찍이 이 당과 누대를 두어 여기에서 생활하면서 어버이의 무덤을 바라보며 추모하는 정을 붙이고 싶어서 대강의 계획을 세웠지만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맏아들인 진사공 신엽(申曗: 1713 ∼?)이 부친의 뜻을 이어 경영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후인들이 지극히 애석하게 여겼다. 이제 내길(來吉)과 사협(士協)이 그 뒤를 이어서 끝내 이 일을 이룩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일이며, 그 편액의 의미가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무릇 누각에 편액을 걸 때는 대부분 이름을 돌아보고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데, 선조를 봉양하는 일을 이을 때에는 반드시 ‘추원’과 ‘영모’라고 일컬어서 뒷사람들에게 힘쓰게 하였다. 지금 취한 의미는 남다른 점이 있고 실로 공이 종신토록 어버이를 사모한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 만약 공의 후손들이 이 누각에 올라서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공의 효성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 누각의 이름은 더욱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어 사람들이 평범하게 권면하고 훈계하는 것에 견주어 보면 또한 두세 배일뿐만이 아니다. 「시경(詩經)」에서, ‘효자는 끊어지지 않으리라. 길이 너와 같은 효자를 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고 하였으니 이런 경우와 거의 가깝다.
예전에 내가 한창 나이일 때 멀리 청량산을 유람하고 공의 형제들과 두루 인사하였는데, 가만히 편안히 지낼 때를 엿보니 진실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 공의 손녀가 나의 손부(孫婦)인데 돌아보면 집안끼리 통하는 의가 있어서 더더욱 공의 지극한 행실에 대해 매우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제 공의 재실에 대해 기문을 쓰는데, 여러 사람의 청을 저버릴 수 없는 점이 있고, 공을 바라며 축원하는 사사로운 정도 있었다. 아! 끊어지지 않는 효성에는 그와 같은 아름다움을 내린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자손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공의 손자와 증손들이 이미 대부분 남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으니, 그 후손들도 계속해서 공의 아름다운 자취를 이을 것이라는 것은 길이 점칠 수 있다. 외손에 이르러서는 비록 친 손자들 속에 들어가기에는 부족하지만 또한 석류(錫類)의 밖에 두는 것은 마땅치 않다. 가령 내 손부에게도 자식이 있어서 역시 능히 효도하고 우애하며, 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우리 집안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나중에 내ㆍ외후손들이 공의 무덤에 성묘할 때 ‘영모’라는 편액에 대해 척연하게 감정을 일으켜 더욱더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석탑 옥개석 도장암 계단 아래에 뒤집혀진 상태이다.
4단의 층급받침, 절수구는 생략되었다. 낙수면 물매는 깊다
풍탁공의 흔적 등은 훼손이 심하여 확인할 수 없다.
상하 반전
현재 모습
좌측으로 돌려서
좌우반전
뒤집혀서
노주석? 중대석에 화문이 조식된 예는 보지 못했으며 상대에도 복련을 새겼다.
석탑과 동시대 유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관리하시는 분이 출타중이어서 돌아보기가 조심스러웠으며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 볼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2016.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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