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의성군

의성...연경묘 봉표

임병기(선과) 2017. 12. 3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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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묘 봉표延慶墓 封標

점곡면 명고리 산36  미래축산 맞은 편 도로변 암벽에 새겨져 있지만 사다리가 없어 접근할 엄두조차 못내고 돌아 섰다.

 

한편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우리카페 심충성님 사진

 

답사전에 심충성님이 올린 사진과 글을 보았었다.

분명 사다리를 놓고 가지를 잘라내고 주변 정리 후 촬영하였을 것이다.

거듭 감사 드리며 명문을 가져왔다.

 

이미 여러 봉표석에서 설명한 내용과 동일하다.

즉,연경묘 관리, 운영을 위해 숯(향탄)을 생산하는 숲이기 때문에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바위 중앙 명문

 

연경묘延慶墓

향탄香炭

산인山因

계하성산옥곡啓下城山玉谷계하성산옥곡

암 봉표巖 封標

 

다른 연경봉표, 수령 봉표와 달리 산이름(城山), 암巖자를 새겼다.

 

향좌측.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갑오 칠월 일 봉심甲午 七月 日 奉審

묘감 신 김창우墓監 臣 金昌祐

감동 신 이정재監董 臣 李政在

감수 안대복監守 安大福

 

갑오(甲午.1834년)년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수렴,불령,시령의 연경묘  봉표는 1831년, 대구의 2곳 수릉 봉표는 1835년에 새웠다.

다른 봉표와 달리 봉심奉審(받들어 세움)명문이 있다.

묘감 신 김창우墓監 臣 金昌祐. 경주 3곳의 연경묘(1831년)와 더불어 이때(1834년)까지도 묘감은 김창우다.

 

향우측,역시 육안으로는 정확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

 

본묘 수위군 김○○本墓 守衛軍 金○○

축보○득 김일본 조전築洑○棏 金一本 曺典

향사 집리 김종휴享司 執吏 金宗休

근서 풍헌 박상윤勤書 風憲 朴尙允

 

다른 연경묘 봉표에서는 풍헌風憲을 제외하고는 없는 명문이다.

연경묘를 관리하는 분들을 칭하는 것일까?

 

 

나뭇가지 사이로 명문이 보인다.

 

동일 묘역을 연경묘延慶墓(경주 시령,경주 불령, 경주 수렴,의성 점곡)와 수릉綏陵(팔공산 수태골,동화사 집단시설지구)으로 칭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연경묘 延慶墓

조선 제23대 순조대왕의 세자 효명孝明세자의 묘호이다.

효명세자는 순조 9(1809)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나 순조 12(1812)에 왕세자가 되었다. 순조 27년부터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고, 3년 뒤인 순조 30(1830) 22세의 나이로 창덕궁 희정당에서 돌아가셨으며,성북구 석관동에 묘를 쓰고 연경묘라 하였다.

 

수릉綏陵

그 후 아들 헌종이 즉위(1835)하자 효명을 익종으로 이름을 올리고 연경묘를 수릉綏陵으로 승격하였다.헌종 13(1846)  자리가 좋지 않다고 양주 용마산으로 이장하였다가 철종 6(1855) 826일 현재 위치로 옮겼다.익종의 왕비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 27(1890)

돌아가자 합장하였다. 1899년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경주의 연경묘 봉표 3곳에는 신묘 10월(辛卯十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1831년에 세운 봉표석임을 알 수 있다.

팔공산의 봉표에는 조성 년대 명문이 없지만 수릉綏陵으로 승격 된 해인  1835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왜 연경묘, 수릉 봉표를 한양에서 천리먼길 경상도에 세웠을까?

 

 

길가에 안내 표지석을 설치하고 주변 나무를 잘라냈으면 좋을 것이다.

 

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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