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이천시

이천...신흥사 석불입상.석불좌상.석탑재

임병기(선과) 2016. 7. 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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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읍리 석불입상

 

선읍리 석불입상

 

신흥사와의 인연

기실 2007년 3월에 기회, 아니 답사 동선을 수립했었다.

헌데

선읍리 석불입상을 뵌 후 발길을 돌렸었다.

왜냐하면 한국문화유적 총람에 장마(?)후 마을앞 개울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동일하여 같은 불상으로 지레짐작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업데이트된 이천 문화유적 자료에 실린 사진을 보고 후회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선읍리 석불입상...2007.3.13일 촬영

 

 

선읍리 석불을 지나 신흥사 못미쳐 복원한 산성이 보인다.

 

설성산성

산성은 설성산 정상부와 그 북쪽에 위치한 봉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계곡을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설성산은 산세가 험준하고 주변 지역이 넓은 평야지대인 관계로 정상부에서 북쪽으로는 이천 시내와 설봉산성, 여주지역 남으로는 음성지역 일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요충지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1,095m이고 남북의 길이가 345m, 동서의 길이가 320m이며 부정형의 방향에 가까운 형태이다. 성벽은 전구간에 걸쳐 양쪽을 모두 쌓아올린 협축법으로 쌓았으며, 자연암반의 윗부분을 다듬은 후 잘 다듬어진 성돌을 쌓아올렸는데 면을 맞추어가며 서로 엇물리게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대략 4~5m 정도이고, 구조적으로 취약한 부분에는 성벽 외면에 성벽 기단부를 보강하기 위한 보축을 하였다. 문지는 동문지와 서문지가 확인되었으며, 성내에는 평탄한 곳이 많아 여러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이르는 여러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안에는 신층사가 있다. 설성산성은 백제가 처음 쌓았다는 견해도 있으나, 축성방법이나 출토 유물을 고려할 때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이후 쌓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발췌,보완

 

 

 

신흥사

설성산(雪城山)의 옛 성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신흥사(新興寺)연대를 알 수 없는 삼국시대 때 설성(雪城)을 쌓을 때 설성사(雪城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이를 확인할 수 없다. 문헌상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영조 36(1760)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서술이 가장 최초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 책에는 설성(雪城)을 언급하면서 '지금 작은 암자를 두었다'라는 기록이 신흥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사실이 <여지도서>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신경준(17121718)<가람고>에도 있다.

 

오랫동안 폐사가 된 채 내려오다가 1700년대말에 중창하였으며, 1918년에 3창하였다. 1944년에 수해로 유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해송(海松)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신라 내물왕때(356401) 설성을 축조한 장군을 위하여 절을 창건하여 설성사라 하였다는 달빛에 물든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이천시청 홈에서 발췌

 

 

극락보전.범종각

 

 

극락보전 옆 석불좌상, 석불입상


 

신흥사 석불좌상

새롭게 조성된 연화대좌에 봉안된 석불로, 불신과 불두의 재질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지만 본래 부재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나발에 육계가 낮고 상호는 살찐 모습이다.반달 눈썹, 지긋이 감은 눈, 코는 민초들에게 돌려주었고, 입술은 두터우며 턱은 이중으로 표현하였다. 법의는 통견, 항마촉지 수인이며, 불신에 비해 높은 무릎을 덮은 상현좌이다.


목에 영락(?)으로 장식한 모습이어서 존상은 보살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전한다.


 

 

 

석불입상

선읍리 석불입상과 더불어 선읍리의 논 주변 둔덕에서 발견하여 신흥사 경내로 옮겨 왔다고 전한다. 

대좌와 불두는 후보하였으며, 목에는 삼도 흔적이 남아 있다. 통견의 법의는 옷주름을 직선으로 표현하였으며, 무릎 부분에서 3개의 U자형을 이루며 무릎 아래 부분에서 끝자락이 단을 이룬다. 

오른손은 가지런히 편 채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 가슴 위에 올려놓았고 왼손은 지나치게 길게 표현하였다.

두 손목에는 팔찌를 끼고 있어 보살상일 수도 있다. 조성시기는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한다. 


 

 

 

 

 

극락보전

신흥사는 크게 요사채,극락보전, 지장전 영역으로 층단을 이루며 구획되어 있다.

 

 

아미타삼존불


 

소조(석조)보살입상

아미타불 향우측에 계시는 보살상으로, 두건(?)을 착용하고 있으며, 보발이 길게 흘러 내렸다.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보살상으로 전한다.

 

  

 

 

지장전 구역.

극락보전 참배 후 요사의 스님을 뵙고 석탑재 위치를 여쭈었더니, 극락보전에서 사진만 촬영하고 가면 되냐고 웃으신다. 물론 내가 삼배 올리는 모습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극락보전 옆 불상만 찍고 돌아간다며 일침을 가하시며, 스님께서 직접 발굴한 석탑이라고 한다. 다른 석탑 부재를 찾을려고 주변을 뒤졌으나 다른 부재는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선읍리 석불입상과 신흥사 석불입상의 동일한 설명에 관해 여쭈었더니 선읍리 불상은 스님께서 1978년 장마후에 직접 발굴하였다며 이제와서야 불상 안내문에 스님 법명이 올려져 있다며 웃으신다.


아~

돌아와서 확인 하니

스님은 신흥사 월선 주지 스님이었다.


 

지장전앞 석탑

하단부의 석재는 석탑재가 아니며 보주는 후보물이다.

석탑재는 맨 윗층 옥개석으로 상부의 노반과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찰주공이 남아 있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며 모서리가 훼손 되었지만 추녀의 반전도 확인된다.


희미하게 절수구(?)도 보이며, 층급은 2단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사찰문화재에는 조선시대 말에 조성된 석탑 부재로 등재 되어 있으나 그 이전으로 올려 보고 싶다.


 

 

 

 

 

 

 

좋은 말씀을 주신 스님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

 

 

2007년 이천 답사.

나홀로 소고리 마애불을 답사 하던 중에 완전 군장차림의  장교가 다가오더니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다소 억압적인 말투와 자세로 묻는다.그도그럴 것이 일단의 군인들이 훈련중인 장소에 낯선 넘이 서성거렸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장교 왈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면서 나에게 마애불 설명을 하란다. 뭐 졸지에 군인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였었다. 물론 병사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달콤한 잠을 청할 수 있어 더 좋았겠지만...

 

헌데

10년 후 오늘 선읍리불상에서 신흥사로 이어지는 산길 양 옆으로 행군중인 병사들을 만났다.

완전군장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괜시리 미안해 잠시 정차해 있는 나를 향해 인솔 장교가 미안하다며 인사를 하더니 바로  "좌우로 밀착"구호를 외친다. 구호에 맞추어 일사분란한 병사들의 빠른 움직함과 복창소리가 조용한 산길을 휘감는다.

 

군인이 민간인 대하는 자세에서 세태가 변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예전에는 軍官民군관민 일체이었으나 요즈음은 민관군民官軍 일체로 표현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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