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답사. 인사동에서 금천구청역 까지는 지하철을 이용하여도 제법 시간이 걸리었다. 역광장에서 1번 마을버스를 승차하여 호압사 입구에 하차 10여분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른 시간이지만 도심에 위치한 호압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침 운동으로 분주히 오가고 있는 끼닭에 절집도 다른 사찰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난 얼굴이다.
호압사 못미쳐 문인석이 먼저 반긴다.
호압사虎壓寺 사찰명에서 비보사찰의 상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절이다.
<봉은사말사지奉恩寺末寺誌>에 따르면, 호압사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창건되었는데 태종이 '虎壓호압'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394년(태조 3)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관청을 두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 궁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호압사는『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의 기록보다는 태조 2년이나 3년 무렵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호압사 홈페이지에는 등재되어 있다."
호압사의 역사는 이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세기의 범우고(梵宇攷)나 가람고(伽藍攷)에도 호암사(虎巖寺) 또는 호갑사(虎岬寺)라 하여 간략하게 나올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에 이르러 중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의민(義旻) 스님 쓴 「경기좌도시흥삼성산호압사법당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 의하면 이 해에 퇴락한 당우를 당시 상궁 남씨와 유씨의 지원으로 받아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호압사 창건설화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는 지금의 시흥군의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 하고 있다.
약사전.약사여래삼존
석조약사여래좌상 나발, 넓은 육계,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표현되었다. 방형의 상호, 이마의 백호. 눈.코.입이 단정하며 귀는 길다. 삼도는 생략되었고,법의는 통견이며. 승각기는 수평으로 걸쳐 입었고,결가부좌한 다리 사이에는 옷주름이 타원형으로 흘러내려와 있다.무릎위에 가지런히 포갠 두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다.
조선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아침 일찍 대웅전 중정을 쓸고 계시는 스님에게 여쭈었다. 스님. 부도는 어디에 있나요? ....... 처사님 작은 절집에 부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 스님의 빗질은 마음 다짐인 것을...
2016.0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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