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산청군

산청...왕산사지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6. 6. 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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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사지 부도전 초입의 구형 왕릉

우리들 답사 매니아에게는 익히 알려진 (전) 구형 왕릉이다.

왕산사지는 여기서 임도를 따라 첫번째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된다.

 

 

임도변 정자, 류의태 약수터 이정표가 보인다.

부도전은 정자 맞은편에 있다.

 

 

왕산사지..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상남도 기념물 제164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 31, 산음현(山陰縣) 불우조(佛宇條)에 보이는 ‘왕대암(王臺菴)’이 바로 이 절터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는 전(傳) 구형왕릉(仇衡王陵)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임도를 따라 2㎞쯤 올라가면 남아 있다. 4곳의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초석과 돌담, 석축, 우물 등이 남아 있고 비석의 대석(臺石)과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등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양의 기와조각과 그릇조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와 존폐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산사지와 관련 있는 가락국양왕신도비(駕洛國讓王神道碑)에 따르면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손자 대각간(大角干) 김서현(金舒玄)이, 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하는 태왕궁(太王宮) 오른쪽에 시조 수로왕과 구형왕의 묘당(廟堂)을 세워 그곳에 승려를 두어 수호하게 하였다고 한다.왕산사지에서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이 7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대(臺)를 쌓아 활쏘기 등 무술을 익혔으며, 676년(문무왕 16)에 왕이 납전(納田) 30경(頃)을 내려 향사(享祀)를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한편, 1200년(신종 3)에는 왕이 교지를 내려 능원(陵園)과 승사(僧舍)를 수리하게 하였는데 이후로는 왕산(王山) 일대가 완전히 승려의 도량으로 크게 변모하면서 가락국의 자취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1798년(정조 22) 영남에 큰 가뭄이 들어 마을사람 민경원(閔景元) 등이 왕산에 기우제를 지내고 왕산사에 유숙하였는데, 승려의 말에 따라 이 절에서 비장(秘藏)한 상자를 열어 보니 영정 2본(本)과 소지했던 물건 및 고승 탄영(坦瑛)이 지은 사기(寺記)가 들어 있었으며 모두 구형왕과 관련된 유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사찰을 둘러싸고 가야계 후손들과 승려들이 대립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 조인영(趙寅永)과 판부사 이병정(李秉鼎)이 승려들을 엄히 징계하는 훈칙을 내렸다는 것이다.

 

왕산사는 가야왕족의 원찰로서 기능을 갖고 있었으나 아마 조선 후기에 이르러 왕산사의 사세(寺勢)가 약화되면서 가야계 후손들에게 사찰 소유의 토지를 빼앗겨 버린 것을 알려 주는 기록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절이 폐사된 시기는 정조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도전

자료에는 2기가 있다고 했지만 모두 4기가 봉안되어 있다.

제위치가 아니며 폭우로 떠내려 온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라고 하며 1기를 제외한 부도의 전각형옥개석은 후보물이다.

 

 

 

희미하지만 당호를 새긴 듯 하다.

얼핏 편구형 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암당雪巖堂 명안대사明眼大師

원위치를 알 수 없었으나 폭풍으로 인하여 세상에 나투신 부도로 탑신을 제외하고는 후보하였다.

 

 

명안대사明眼大師(1646~1719)

부도전에 세워진 부도탑 연기문에 새겨진 내용이다.

 

스님은 호는 석실(石室) 또는 설암이고, 자는 백우(百愚)이다. 효종 8년(1657) 12세의 나이로 지리산 덕산사 성각 스님에게 출가했고, 현종 원년(1660)년 엄비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무영 탄헌 스님 회상에서 10여 년간 선·교를 닦았으며, 백암 성총 스님을 4년 동안 모시면서 ‘화엄원융(華嚴圓融)’의 뜻을 전해 받았다. 스님은 성총 스님의 당부로 숙종 4년(1678) 지리산 불장암에 개당해 호남의 종장(宗匠) 중 한 분이 되었다. 전국을 돌며 선수행과 설법을 하던 스님은 만년에 이르러 정토에 태어나고자 염불왕생문(念佛往生門)에 몰두 했다고 한다.

 

숙종 35년(1709) 지리산 칠불암에 주석하며 도반 70여 명과 서방도량을 결성한 스님은 이해 겨울 이곳 왕산사로 거처를 옮겼다가 이듬해 4월 13일 입적했다. 스님에게선 정골사리 2과가 나왔는데, 1과는 절 북쪽에 석종형 부도를 세워 모셨으며 다른 1과는 대원사 남쪽 시냇물 위에 무덤을 만들어 봉안했다고 한다. 문집으로 《백우집(百愚集)》과 문인들이 유고를 모아 편찬한 《백우수필(百愚隨筆)》이 있다.

 

 

○암당(○岩堂)

의○대사(義○ 大師)

 

 

 

 

 

당호가 있지만 육안으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지대석을 제외하고는 본래 부재로 옥개석이 투박하며 상륜 받침이 보인다.

 

 

 

 

 

구형왕릉 답사길에 꼭 들려보기를 바란다.

 

201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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