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다는 것 익숙하다는 것 그래서 소원疏遠하지는 않았는지 오래전 인연 짓고 무심히 흘러보낸 시간이 가물가물 작심하고 봄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참 서러운 일이 잖아요.
2016.05.05
중생사.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중생사와는 별개의 사찰로 전하나,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의 낭산관음보살 입상의 안태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낭산마애삼존보살좌상과 많은 석탑,석등 등의 석조부재가 산포하고 있어 중생사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삼국유사에서 중생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보자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출처/구글(http://koreangate.tistory.com/425) 신라 고전(古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 천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름답기 짝이 없어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고금(古今)에 있는 그림으로도 이같이 아름다운 것은 적을 것이다"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그 실지 모양을 그리도록 했다(그 화공畵工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張僧繇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吳나라 사람으로, 양梁나라 천감天監 연간에 무릉왕국武陵王國의 시랑직비각지화사侍郎直秘閣知화事가 되었고, 우장군右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 그러니 여기에 말한 천자天子는 중국 梁·陣 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그런데 전傳에 당나라 황제라 한 것은 우리 조선 사람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唐이라 하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제왕帝王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말을 모두 적어 둔다). 그 화공(畵工)은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다 그렸으나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는데, 고쳐 보려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붉은 점은 반드시 날 때부터 있던 것인가 보다 하고 그림이 끝나자 황제에게 바쳤더니 황제는 그 그림을 보고 나서 말한다. "모양은 실물과 독 같으나 배꼽 밑의 점은 속에 감추어진 것인데 어떻게 알고서 이것까지 그렸느냐." 황제는 크게 노해서 화공(畵工)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주려고 하니, 승상(丞相)이 아뢰었다. "저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사오니 원컨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말한다. "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내가 어제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서 바치게 하라. 그 그림이 꿈에 본 얼굴과 틀림없다면 용서해 줄 것이다." 그 사람이 이에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의 상(像)을 그려 바치니 꿈과 맞는지라, 황제(皇帝)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화공은 죄를 면하자, 박사(博士) 분절(芬節)과 약속했다. "내가 들으니 신라국(新羅國)에서는 불법(佛法)을 존경하여 신봉(信奉)한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곳에 가서 함께 불사(佛事)를 닦아 그 나라를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들은 드디어 함께 신라국에 이르러 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의 상을 만들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었으니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 말년 천성(天成) 연간(926∼929)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함)이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어, 이 절 관음보살 앞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더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석 달이 되지 않았는데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서울을 침범해 와서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은함(殷함)은 그 아이를 안고 이 절에 와서 말하였다. "이웃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일이 급합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해서 누(累)가 겹친다면 식구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성(大聖)께서 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면, 원컨대 큰 자비(慈悲)의 힘을 내려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父子)가 다시 만나게 해 주십시오." 슬피 세 번 울면서 세 번 아뢰고 난 후에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觀音像)의 예좌(猊座) 밑에 감추고 못잊어 하면서 떠나갔다. 반 달을 지나 적병이 물러간 뒤에 와서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양도 매우 예쁜데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니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 사람이 곧 승로(丞魯)로서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郎中) 최숙(崔肅)을 낳았고, 숙은 낭중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대성(大姓)이 되었다. 또 통화(統和) 10년(992) 3월에 사주(寺主)인 중 성태(性泰)는 보살(菩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절에 살면서 정성껏 부지런히 향화(香火)를 받들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절의 토지(土地)에서는 나는 것이 없어서 향사(香祀)를 계속할 수가 없으므로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옵기에 하직하는 터입니다." 이날 성태는 조금 졸다가 꿈을 꾸니 관음대성(觀音大聖)이 말한다. "법사(法師)는 아직 여기에 머물러 있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해서 제사에 쓸 비용을 충분히 마련해 주겠다." 중이 기뻐하여 꿈에서 깨어 오직 그 절에 머물러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지 13일 만에 갑자기 두 사람이 말과 소에 물건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절에 있던 중이 나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금주(金州) 지방 사람인데 지난번에 스님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서 나는 동경(東京) 중생사(衆生寺)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공양에 쓸 비용이 어려워서 시주를 얻으려고 여기에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웃 마을에 가서 시주를 모아다가 쌀 엿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온 것입니다." 스님이 말했다. "이 절에는 시주를 구하러 나간 사람이 없는데, 그대들이 필경 잘못 들은 것 같소." 그 사람들이 또 말한다. "그 스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오다가 이 신견정(神見井) 가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절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따라온 것입니다." 절의 스님이 그들을 데리고 법당(法堂) 앞으로 들어가니, 그 사람들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을 쳐다보고 절하면서 저희끼리 서로 말한다. "이 부처님이 바로 시주를 구하러 왔던 스님의 상(像)입니다." 말하면서 놀라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로부터 여기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또 어느날 저녁에 절 문에 화재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껐다. 그런데 법당(法堂)에 올라가 보니 관음상이 없으므로 살펴보니 이미 뜰 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누가 밖으로 내왔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제야 모두들 이것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의 신령스러운 힘인 것을 알았다. 또 대정(大定) 13년 계사(癸巳; 1173) 연간에 중 점숭(占崇)이 이 절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글은 알지 못하지만 성질이 본래부터 순수하여 향화(香火)를 부지런히 받들었다. 어떤 중 하나가 그 절을 빼앗아 살려고 하여 친의천사(친衣天使)에게 호소했다.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곳이오니 마땅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뽑아서 그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그 사람을 시험하려 하여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어 보았다. 그러나 점숭은 이것을 받는 즉시로 줄줄 읽는다. 천사는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방 가운데로 물러앉아 다시 그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점숭은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읽지 못한다. 이것을 보고 천사가 말한다. "스님은 참으로 관음대성이 보호하여 주시는 사람이로다." 이리하여 끝내 이 절을 빼앗지 않았다. 그 당시 점숭(占崇)과 같이 이 절에 살던 처사(處士) 김인부(金仁夫)가 이 이야기를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해 주고 또 전기(傳記)로도 써 두었다. 사진...하늘사랑님 경주박물관 석조관음보살입상.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늘씬한 몸매의 관음보살이 대좌위에 계신다. 이 분의 안태고향이 중생사라고 전한다. 대좌, 불신, 상호가 이산가족이 되어 긴 만행끝에 함께 해후한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즉, 상호는 일제강점기에 경주박물관으로 떠났고, 불신은 중생사 근처 논둑에 묻혀있었으나 1975년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났다고 한다. 불대좌는 1997년 역시 중생사 근처에서 발견되어 관음보살이 극적으로 환생하였다. 그나저나 관음보살은 삼국유사 속의 주인공일까?
석조부재 예전에는 좌측 나무 아래에 모아 두었었는데 옮겨 두었다.
연화대좌 하대석과 중대석이 일설이며, 상대석은 별개 부재이다 하대면석에는 안상을 새겼고, 하대석상부에는 복련과, 3단 의 받침을 조출시켰다. 중대석은 12면느오 12지상(?)이 봉안된 것 같으며, 결실된 불상은 약사여래임을 추측 가능케 한다. 9세기 후반의 작품 아닐까?
석불입상 대좌?
석탑 옥개석
석탑 기단 면석
석탑 옥개석
우측 지장전 마애보살삼존상이 봉안된 전각이다.
본존불.문화재청 설명문을 가져왔다,. 경주 낭산 서쪽 기슭의 바위면에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는데, 표면이 거칠고 균열이 심한 상태이다. 가운데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갖춘 본존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불이 있다.
두건? 양어깨로 흘러 내린 보발이 보인다. 지장보살일까?
우협시 내마음이 흐릿했나 보다. 문화재청 사진
좌협시 역시 엉터리 사진이다. 문화재청 사진 그런데 말입니다. 지장보살의 협시불로 신장상을 모신 작례가 또 있나요? 또하나 지장보살상 중에 보발을 양어깨로 널어뜨린 존상을 보셨나요? 그래서 말입니다. 복식과, 두건(?),감실... 동남산 부처골 감실부처가 오버랩되는 군요. 혹여 감실부처가 선덕여왕의 3~40대 모습이고 낭산 마애보살상 삼존의 본존은 열반에 든 선덕여왕은 아닐런지요? 왕즉불王即佛 ()()() 2016.0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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