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신안군

신안...흑산도 정약전 유배지

임병기(선과) 2016. 3. 2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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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답사의 주 목적은

무심사지 석등,석탑

그리고

사리마을 정약전 적소 였다.


적소

척박한 자연환경, 위리안치, 절해고도 등이 먼저 연상되었는데

사리마을은

절해고도 분위기는 찾을 수 없는 평온하고 한적한 육지의 농촌마을 풍광이었다.


물론

현재로서 과거를 유추하는 것이 답사객의 사치로운 발상이겠지만.


 

사리沙里

1200년 경 고려 신종 3년 밀양박씨가 입촌하였다고 전하며,마을 주변에 모래가 많아 모래미 또는 사촌이라 부르다가 이후 사리라고 개칭하였다. 흑산면사무소 홈 자료에 의하면 현재 76세대 139명이 거주 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흑산 초등학교 서분교장이 휴교 상태인 것을 보아 주민들 대부분이 노인층으로 생각된다.


마을을 관통하는 일주도로를 기준으로 적소가 있는 구역과, 분교장이 있는 구역으로 양분되어 있다.

사진상으로는 적소는 보이지 않으나, 초가지붕 3채가 보이는 좌측 천주성당 뒤편에 복성재가 위치한다.


 

복성재에서 바라본 건너편 흑산초교 서분교장


 

본향안치本鄕安置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도록 하는 가벼운 죄인의 형벌.


3채의 초가집(지붕이 볏집처럼 보이는 화확제품이어서 실소를 머금었었다)은

민박집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본향안치, 위리안치, 절도안치로 명기 되어 있었다.

 


 

 

절도안치絶島安置

혼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유형생활을 치르도록 하는 중죄인의 안치 형벌 


위리안치圍籬安置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 치거나 가시덤불로 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중죄인의 안치 형벌


 

사촌서당(복성재) (沙村書堂(復性齋))

손암 정약전(巽庵 丁若銓, 1758~1816)이 머물던 적소로 복원된 건물이다.


신안문화원에 등재되어 있는 정약전과 자산어보 글을 가져왔다.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년)은 경기도 광주출신으로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1789년(정조 14) 증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797년에 병조좌랑이 되었다.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로 서학(西學)에 뜻을 두어 천주교에 입교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전교에만 힘썼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동생 정약종(丁若鍾)은 옥사(獄死)하고,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 정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沙里)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저술을 하였다. 저서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비롯하여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동이(東易)논어난(論語難)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산어보만 현전한다. 유배에서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직접 조사․채집한 내용을 수록한 책으로, 1814년에 3권 1책으로 쓰여졌다. 제1권에는 비늘이 있는 인류(鱗類) 70종, 제2권에는 비늘이 없는 무인류(無鱗類) 42종 및 조개류 69종, 제3권에는 잡류(雜類) 46종으로 대별되어 있다. 항목별 설명은 한자명(漢字名)․방언․형태․습성․맛․이용법․어구․어법 등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산 어류에 대한 연구는 1403년(태종 3)에 출판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토산부(土産部)」에 23종의 어류를 기록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후 하연(河演)이 1424년~1425년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 「토산부」와 1469년에 속찬한 경상도지리지 「토산부」에 21종의 어류에 대하여 그 이름과 산지가 소개된 바 있다. 그 후 자산어보에 101종의 어류와 수산 동식물을 합쳐 227종에 대한 형태 및 약성(藥性)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이는 어류에 대한 단행본으로는 최초의 일이다. 특히 중국의 각종 수산고박물지(水産古博物誌)를 두루 인용하여 수산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필독서라 할 수 있다. 1998년에 신안군에서 자산어보 국역본이 간행되었다."


표해록漂海錄

얼마전 티비에 방영된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를 기록한 흥미로운 저술이다

 "1805년에서 1816년 사이에 우이도에서 살던 어상(魚商) 문순득(文淳得)이 1801년 12월에 표류되었다가 1805년 정월에 돌아온 표해 과정과 유구(琉球; 오끼나와), 여송(呂宋; 필리핀) 지역의 풍속, 가옥, 의복, 선박, 토산, 언어 등에 관한 그의 진술을 토대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복성재 현판


 

사촌서당沙邨書堂 다산 정용서茶山 丁鏞書.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이 보낸 글씨 아닐까? 

 

복성재復性齋

사촌서당 현판이 걸려 있다.


오래전 나의 다산초당 답사기에 올렸던 소설속의 약전과 약용의 이별 장면 글이 떠오른다.

1801년 황사영 사건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도중 나주에서 이별하는 장면으로 이후 형제는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동작 나루를 건너고 과천을 지나, 금강을 건너서 약용과 약전은 나주 율정점에 이르렀다. 이곳은 목포와 해남으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였다.약용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고 약전은 이별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사람처럼 초연하기만 하였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보게 될는지 기약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할 만도 하건만 두 형제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 말이 없었다."

 


사리마을 앞 칠형제 바위

사리의 어민들이 조업을 나가고 약전이 어민들을 만나는 포구였을 것이다.

 

 

자산 어보원

 자산어보에 기록된 물고기의 분류, 서식장소, 분포지역, 특성 등을 하나하나 새겨놓았다


 

유배문화공원

백제 3왕자와 고려의종 2년 정수개가 최초로 유배온 이후 조선조까지 130여명이 흑산도로 유배왔다고 한다.

흑산도는 제주,거제,진도에 이어 4번째로 빈도수가 높은 섬이 었으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인물도 있었으나 마치 토호처럼 권세를 부리는 유배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유배공원에는 이곳에 유배 온 인물들의 약력과 죄명을 새긴 비석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나인 정숙의 해괴한 짓이 궁금하여 조선왕조 숙종실록을 검색해보았다.


하교(下敎)하기를,

"나인(內人) 정숙(正淑)이덕흘(李德屹)의 누이로서 사람 됨됨이가 간사하고 아첨하며 마음가짐도 올바르지 못하여 해괴한 짓을 자주 저지르니,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시키도록 하라."


하였다.죄인 정숙(正淑) 【궁녀(宮女)이다.】 은 사람됨이 간독(奸毒)하고 온갖 악을 다 갖추어, 임금을 업신여기고 제 뜻을 방자하게 행하고 허무한 것을 날조하고 조금만 원망이 있으면 반드시 갚으므로, 작년에 절도(絶島)로 귀양보냈으나, 그가 범한 것을 논하면 여기에 그칠 수 없으니, 해조(該曹)를 시켜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


위의 기록으로는 무엇이 해괴한 짓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래의 실록을 보면 그의 오라비가 이덕흘이어서 오빠와 조카와 관련된 일에 연루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록에는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 숙종조의 유명관 환관 최상앙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포도 대장 장희재(張希載)최상앙(崔尙仰) 등 여러 사람을 잡아다 공초(供招)를 받아서 아뢰니, 임금이 판하(判下)하기를, "각자가 발명(發明)한 말을 비록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덕흘(李德屹)이 그 자식의 죄를 면하게 하려고, 대장(大將)의 말이라고 사칭(詐稱)하여 몰래 최상앙에게 부탁한 형상은 분명하여 엄폐할 수가 없다. 이덕흘의 경우에는 이것을 들춰내어 문목(問目)을 만들되, 보통의 일은 제외하고 엄중하게 형신(刑訊)을 정지하고 그대로 가두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덕흘은 바로 포도청(捕盜廳)의 군관(軍官) 이지훈(李枝勳)의 아비였다."


 

담장

사리마을 담장은 민가 담장과 밭 경계에 조성된  담장으로 구분된다.

원형을 많이 잃은듯 보이지만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들은 아련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선주목船柱木

마을 중앙 도로변에 자리하는 줄을 멜 수 있도록 다듬어진 돌이다.

예전에는  현재 선주목이 서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고, 바다에서 돌아오면 여기에 배를 정박해 놓았다고 하여 ‘船柱木’이라 부른다고 한다. 현재는 사리마을 포구 주변이 매립되면서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선주석船柱石이 아닐까?


 

 

 


沙浦少集次杜韻사포소집차두운 : 두보의 시를 차운한 사포소집

                 정약전


三兩客將秋色來삼양객장추색래 : 서너 나그네가 가을빛 따라와

詩因遣興未論才시인견흥미논재 : 시 지으며 흥을 돋우나 재주는 따지지 않네

凉飇在樹蟬猶響양표재수선유향 : 서늘한 바람 나무에 있건만 매미는 아직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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樵兒釣叟懽成友초아조수환성우 : 나무꾼 아이와 늙은 어부까지 기쁘게 친구가 되니

恣意家家笑語開자의가가소의개 :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


한시 제목의 사포는 사리마을이 분명하지 않을까?


201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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