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신안군

신안...흑산도 최익현 유허지

임병기(선과) 2016. 3. 2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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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유허지. 지장암指掌巖 

흑산도 일주도로 상의 마지막 답사지로 여객선이 들어오는 항구인 예리 천촌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면암이 새긴 글씨와 비석이 있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년(순조 33년) 경기도 포천에서 동중추(同中樞) 대(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익현(益鉉)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이다. 성리학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애군여부 애국여가(愛君如父 愛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로 출사한 이후 사간원 정언, 신창현감,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관직에 재직할 때에는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고, 특히 경복궁(景福宮)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1826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하는 상소(1873년 계유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누적된 시폐를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권신들은 반발하여, 도리어 대원군 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로 민씨 일족의 옹폐(壅蔽)를 비난하였는데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1873년부터 3년 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뒤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을 결사반대하기 위하여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疏)를 올리고 지부석고대죄(持斧席藁待罪)하여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879년 3년여의 유배에서 풀린 뒤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서 후학양성에 전념 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시행, 음력의 폐지 등으로 항일 척사운동에 앞장서서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 할 것을 주장하고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신안문화원

 


면암최선생적려유허비勉庵崔先生謫廬遺墟碑

유허비는 선생의 애국정신과 후학양성의 뜻을 기리고자 면암의 문하생 오준선, 임동선 등이 1924년 9월 지장암 아래에 세웠으나, 현전하지 않고, 현재의 비는 1951년에 세웠다. 전면에 면암최선생적려유허비勉庵崔先生謫廬遺墟碑라 새겨져 있고, 후면에 26행 40자의 비문이 있다.

 

 


1876년 흑산면 진리마을에 온 면암은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을 열었으며 후에 천촌리淺村里로 거처를 옮겨 마을아래 바닷가에 오두막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살았다고 한다. 현재 일신당의 자취는 찾을 수 없으나 서당샘이라고 불리는 작은 샘이 남아 있어 일신당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천촌리 마을 입구에는 면암이 이름 지은 지장암指掌巖(손바닥 바위)에는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면암의 글씨가 남아 있고, 아래쪽에는 지장암指掌 명문이 새겨져 있다.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

"우리나라는 고조선 때 기자가 봉해진 땅이고 명나라 홍무년간에 태조가 개국 이후 현재도 독립된 대한제국이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지장암기에 의하면 스승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유지遺志를 따라 새겼다고 전한다.

 


지장암指掌巖

지장의 의미는  주자朱子의 위아중지장爲我重指掌이란 시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한다.

 

 

지장암기 指掌巖記


흑산도(黑山島)에 귀양간 이듬해 3월에 나는 두세 친구와 남으로 선유령(仙遊嶺) 고개에 올라 봉해(蓬海)의 물결을 굽어보고, 돌아오다가 딱 벌어진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천촌(淺村)이라는 마을이었다. 마을 서쪽 기슭에 해신사(海神詞)가 있고 그 아래에 몇 길 되는 입석(立石)이 보이는데 위는 수목이 우거지고 아래는 길 왼쪽에 임해 있었다. 그곳이 깊숙하고 평탄하여 비바람을 피할 만하였다. 나는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다음과 같이 크게 탄식하였다.


“아, 이 고장은 서울에서 수천 리나 떨어져 날씨가 무더운 해양(海洋) 가운데 있기 때문에 직방(職方 토지(土地)․지도(地圖)를 관장하는 관청)의 판도(版圖)에는 그 존재가 그리 중시되지 않는 듯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두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흘러 들어온 구족(舊族)들이었고, 그 풍속도 상고하건대 소박하고 검약하여 사치스러운 태도가 없을 뿐 아니라 서당을 세워 교육에 힘써서 준수(俊秀)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밖에도 산수(山水)․어가(漁稼)의 즐거움과 분전(墳典)․도사(圖史)의 비축으로 이미 스스로 자족(自足)하고 탄식하거나 원망하는 소리가 없으니, 아름다운 고장이 아닌가?


돌아보건대, 수백 년 동안 나라에서 먼 지역을 회유한 뜻이 넓었고 이곳 백성들이 교화를 입은 날도 깊었으며 한 시대의 문인(文人)과 명사(名士)들이 이 고장에 노닌 것 또한 적지 않았는데 그 지행(至行)․의문(懿文)이나 고운(故韻)․신적(新蹟)이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 고사(古事)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어찌하여 그다지도 적료한가?


그러나 나는 일찌기 듣건대,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 이래로 부터 오랑캐의 풍속이 변하였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이 명태조 고황제(高皇帝)와 동시에 즉위하여 무궁한 발상(發祥)의 터전을 닦자 명신(名臣)과 석보(碩輔)들이 그 지극한 교화를 도와서 치모(治謨)와 문물(文物)이 당우(唐虞)와 낙건(洛建)의 성대에 비교할 만큼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 도비향수(都鄙鄕遂)에서부터 밖으로 주군진보(州郡鎭堡)에 이르기까지 관청을 두고 직책을 부여하여 가르치고 다스리지 않음이 없었는데, 그 가르치는 기본은 오륜(五倫)을 펴고 오성(五性)을 가지게 하는 데 불과했던 것이다.


대체로 사람이 그 몸이 있게 되면 반드시 이 다섯 가지 윤기(倫紀)가 있으므로 하루라도 떨어질 수 없으며,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다섯 가지 성품을 갖추게 되므로 일각이라도 휴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왕(先王)의 가르침은 그 고유한 것(오륜과 오성)을 따라 인도하여 그 처음을 잊지 않게 하였고, 또 백성들이 행하고 있으면서도 알지를 못하여 오래가면 오륜이 무너질까 염려가 되어 곧 윤음(윤음)을 반포하여 그 가르침을 널리 알려서 해우(海隅)의 창생(蒼生)들에게 이 이치에 밝아서 지키고 잃지 않게 하며 또 이 가르침이 무궁토록 전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가 그 고유한 것을 따라 발명한 것이지, 애당초 밖에 있는 것에 힘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선비는 대도(大道)를 듣고 백성들은 지극한 은택을 입어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않음이 없고 아무리 적어도 화하지 않음이 없다’고 할 만하였는데, 근세에 와서는 풍속이 달라지고 퇴폐 해져서 무릇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다만 어느 일의 계교와 이해의 쟁탈이나 알게 하고 윤상(倫常) 본연의 선(善)에 대하여는 돌이켜 찾으려는 생각조차 않게 하므로 하늘과 땅이 폐색되어 어진이가 숨고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구법(九法)이 폐하가 되었다.


여기에다 노불(老佛 도교(道敎)와 불교(佛敎))과 서교(西敎(천주교))가 들어와서 나라 전역에 가득 차니, 연원(淵源)이 있는 문벌(門閥)과 의관을 갖춘 양반들이 그 풍속을 사모하여 그 말을 외고 그 의복을 입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수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천하의 풍조인데, 지금 이곳 사람들은 몸에는 우리나라의 베를 입고 머리에는 명 나라 관(冠)을 쓰며, 글은 공자․맹자가 아니면 읽지 않고 말은 충신(忠信)하지 않으면 물리쳐서 사람으로 쳐주지 않으니, 선왕(先王)이 사람을 길러낸 효험을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 있다. 이들과 저들을 비교할 적에 우열과 득실을 논하면 그 누가 낫겠는가? 이는 진실로 존숭할 만한 것으로 민멸(泯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낭주(朗州)에 사는 친우 김형배(金衡培), 서당 선생 김성용(金成鏞)과 그 생도 정석중(鄭錫中) 등과 함께 그 석면(石面)의 편의를 살펴서 주선생(朱先生 (朱子))의 ‘위아중지장’(爲我重指掌)이란 시구에서 지장(指掌)을 따다가 이름을 지어 게시한 다음, 또 선사(先師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말한다.)의 유지(遺志)를 따라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洪武日月)이라는 8자를 그 위에 쓰고 아울러 크고 깊게 새겼다.


아, 이 지방 사람들이여 힘쓸지어다.


시경에,
하늘이 모든 백성을 내니시 天生烝民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도다 有物有則
백성들이 타고난 상성이 있어 民之秉彝
미덕을 좋아하네 好是懿德


하였으니, 당초에 고금(古今)과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 오성․오륜을 따라 찾아 살펴서 자기를 반성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고, 거주지의 선악과 세속의 저앙(低昻)으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흑산도(黑山島)가 비록 누추한 지역이지만 어찌 후일에 양복(陽復)의 기본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이 일을 맡아 한 자는 같이 귀양온 동청동(董靑同)이다.


무인년(고종15. 1878) 4월 일에 최익현은 삼가 쓴다.

 

 

유허지 앞 소나무

수령 250여년으로 추정

 

 

 

유허지를 돌아 나오면서

가이드는 볼륨을 높여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가요를 연이어 들려준다.

 

섬마을. 흑산도

 

이제

나에게 흑산도는

마음을 검게 태워버린 애닲은 섬, 척박한 환경의 절해고도의 낙도가

아니라

동백나무.후박나무, 해송, 너도밤나무가 사시사철 울울창창蒼한 낙원이며

희망과 꿈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섬으로 간직 될 것 같다..

 

201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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