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신안군

신안...흑산도 신들의 정원

임병기(선과) 2016. 3. 1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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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마을과 진리당

 

진리鎭里

고려시대에 나주목에 편입되어 흑산도라 칭한 후 1888년(고정 25) 흑산진이 이 마을에 설치되어  마을의 유래가 되었다.

중앙에 보이는 마을이 진리이며 앞쪽으로 돌출된 숲이 당숲이다.

 

 

진리당숲

도로우측이 진리당숲으로 우리 취락구조배치에서 흔하게 보이는 성황숲이다.

 

그런데

신들의 정원이라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신들의 정원?

개인적으로는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4번기에서 둔 78번 돌 처럼 신안군청의 신의 한 수로 갈채를 보내고 싶다.

기실 우리 민속신앙은  미신으로 취부되어 새마을운동 시절에 교과서, 관공서, 마을 집단 등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되어 5천년 민족 정신마져 사라질 백척간두의 위기에 봉착했었다.

 

다행히

지자체 실시와 더불어 관광 산업 육성과 전시행정 효과 극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마을 신앙, 민속이 복원되기 시작했으니 무슨 이런 아이러니가 있는가? 한 술에 배 부를리 없겠지만 동제, 별신굿, 용왕제 등 민족의 원형질인 마을 제의가  복원되기를 학수고대 해본다.

 

어라?

이야기가 오끼나와로 빠져 버렸구먼!

 

신안군청의 묘수?

 

만약에

신들의 정원이라 명명하지 않고 성황숲, 진리당숲, 용왕당, 각시당 등 본래 용어를 그대로 활용했다면 젊은 청년층 아니 중장년 관광객이 과연 당숲에 들렸을까? 흥미유발은 커녕 글자 그대로 전설의 고향속의 전설로만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지 않았을가?

 

다시말해

고객 유치 측면에서 대성공이었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진리당은 시나브로 잊혀 가는 우리 민속 제의처에 불과했을 것이다.

 

 

신의 정원의 구성은.

성황숲.진리당.용신당의 중심 요소에 피리부는 총각이 등장하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전개는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 고을, 특히 어촌에 전승. 구전되는 마을신앙이지만 진리당숲에는 신을 초대하는 초령목招靈木이 분포하고 있어 극적인 효과와 더불어 현실감을 배가 시키기에 충분하다.

 

 

진리당.

새롭게 조성한지 오래되지 않은듯 안쪽 담장 뒷편의 위패를 봉안한 당과 앞쪽 제의를 준비하는 부속건물이 있으며 바깥담장을 둘렀다. 용왕당은 담장 옆길에서 바닷가 방향에 위치한다. 용왕당은 풍어와 항해 무사고와 귀항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제의 공간이다.

 

진리당은 흑산도에 소재했었던 22개당의 본당으로 상당과 하당인 용신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당 당신으로는 당각시(소저아기씨),제석님,상궁부인,산중처사님,총각화상(도령)이 모셔져 있다.(실제로 문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마을 주민이 입회하지 않을 때 개방하는 것은 신성모독 아닐까?)  

 

 

부속건물

 

 

진리당(처녀당)

당각시(소저아기씨),제석님,상궁부인,산중처사님,총각화상(도령)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아쉽게도

오래전부터 정월에 모시던 동제를 모시지 않는다고 한다.

젊은이가 떠난 우리 농어촌의 현실이지만 많은 지자체에서는 다양한 민속행사와 더불어 마을제의를 복원하고 있으니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아래에 예를 들은 진리당제 절차도 우리전통 마을제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상당제.하당제.갯제의 순서이다. 또한 대부분의 상당은 마을 뒤편 마을이 보이지 않은 장소에 위치한다.

러한  제례의식을 통해서 흑산도 해안 일주도로가 개설되기전 진리마을에서 읍리로 향하는 주통로는 해안을 따라 난 길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진리 당제(출처/신안문화원)

진리의 당제는 제의 기간이나 절차로 보아 상당히 성대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과거에 비해 약화되어 있다. 특히 제의 기간이 음력 정초부터 3일간이었던 것, 제관들이 들돌을 들어 보아 가벼우면 신들이 제물을 잘 흠양했다고 여겼던 의례, 그리고 갯제에서 무당을 불러 용왕굿을 성대하게 진행했던 내용 등은 현재의 당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당제를 지내기 2일전에 마을 이장이 예리에 가서 쌀과 소지 종이 등의 물품을 구입해 온다. 제물 구입 경비는 마을공동기금에서 충당된다. 신격들이 육류와 어류의 냄새를 싫어하므로 준비되는 제물은 메와 술, 과일, 식물성 음식물이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새벽, 선정된 3명의 제관(1명은 제를 주관하고 2명은 보좌한다.)들이 몇 벌의 깨끗한 옷가지와 그 동안 먹을 식량, 제수용 물품 등을 챙겨서 당으로 간다. 우선 상당의 당집과 용신당, 당샘을 청소하고 문간방의 한쪽방에 보관해 놓은 시루, 절구, 그 밖의 제기들을 씻은 후, 제장 주위에 황토를 뿌리고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친다.


진설할 제물의 준비를 위해 제관들은 쌀에서 겨, 반점이 있는 쌀알들을 하나하나 골라 낸다. 메를 정히 지으려는 의도이며, 제를 지낼 때까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 돌갓, 더덕, 고사리를 솥에 넣고 간을 맞추어 익힌다. 이 나물류는 반드시 주민들로부터 희사받는데, 이는 진리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마을의 산에서 손수 채취한 것을 제물로 써야 정성이 담긴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준비를 마친 제관들은 제물을 진설하고 자시(子時) 무렵 재배, 헌작, 구축, 소지 등의 절차에 맞춰 상당제를 거행한다. 구축의 내용은 당제의 일반적인 기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을의 안녕, 무병, 탈없는 농사와 어업, 객지에 나간 이들의 안녕 등이다. 소지는 제관, 마을 전체, 각 가정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된다.

 
상당제를 마친 제관들은 용신당(龍神堂)으로 가서 용신에게 제를 지낸다. 용신에게 드리는 제물은 창호지에 진설되며, 제를 마친 후 제물들을 바로 아래에 있는 바다에 헌식하면서 뱃길의 무사와 풍어를 기원한다. 과거 큰 배들이 많았을 때에는 평상시에도 오랫동안 먼 바다에 나갔던 배들이 들어와 개안에 배를 대고서 절을 하고 구축을 하는 등의 간단한 의례적 행위를 했다고 한다.


상당제와 용신에 대한 제가 끝나면 제관은 당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주민들에게 알린다. 주민들은 그것을 보고 농악을 앞세워 당에 오른다. 주민들은 평상시에는 접근하지 못했던 당집의 열려진 문으로 당집 내부를 구경하고, 당각시 등의 신격들에 소망을 발원하기도 한다. 제관들은 진설되었던 제물 중 일부씩을 떼어 동서남북 사방에 뿌리는 사신(辭神)을 한다. 주변에 떠도는 잡신들도 흠향시키는 것이다. 다음 남은 제물들을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음복을 한다.


과거에는 새벽에 당에서 내려와 바닷가에서 성대한 갯제와 용왕굿을 지냈다. 해변에서의 갯제는 마을 부녀자들이 진행했으며 용왕굿은 선주들이 불러온 무당이 진행했다. 갯제는 당제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제의였고, 용왕굿은 원할 때에 무당을 불러다 하는 특별한 의례였다. 갯제를 지낼 때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바다로 띄워 보내며, 칼잡이를 하여 칼날이 바다 쪽으로 꽂혀야만 액을 쫓고 풍어와 안전한 뱃길을 보장받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지금은 이와 같은 용왕굿이 행해지지 않고 갯제도 요식적으로 행해질 뿐이다. 용왕굿의 경우 주관할 무당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옛날처럼 풍요로운 어업이 아니라서 심리적으로도 굿을 벌일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제 후의 걸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농악대는 마을 이장, 마을 어른, 제관들의 집과 원하는 이들의 집을 돌며 농악을 쳐준다. 그리고 여느 곳의 걸궁과 마찬가지로 대문, 우물, 부엌, 대청 등지에 있는 가신(家神)들에게 그 집의 명과 복을 빌고, 잡귀, 잡신을 쳐내는 의례 행위를 한다.

 

 

처녀당과 총각당의 전설

먼 옛날 이 마을에 처녀 총각이 결혼하여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부인의 만류를 무릅쓰고 고기를 잡으러 먼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바다로 나간 남편은 갑자기 풍랑을 만나 죽게 되고 파도에 밀려 부서진 배의 파편만 떠밀려 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슬픔의 세월을 보내던 부인은 먼바다가 보이는 산위 소나무에 목을 메어 죽고 말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발견하여 제사를 지내고 죽은 자리에 당을 지어 그 원혼을 모셨다. 그리고는 해마다 여자가 죽은 날에 제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육지에서 옹기를 팔러온 배가 진리에 정박했는데 이 배에는 취사와 잔심부름을 하는 총각 선원이 있었다. 선원들이 옹기그릇을 팔기 위해 마을에 들어가면 총각은 당마을의 노송에 올라가 나뭇잎 피리를 불며 무료함을 달래곤 하였다. 그런데 옹기를 다 판 후에 배가 출항하려고 하자 역풍이 몰아쳐 항해할 수 없게되었다. 그런데 총각이 나무에 올라 피리를 불면 바다가 잔잔해지고, 마을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가라앉자 다시 배의 돛을 올렸는데 또 다시 역풍이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이러기를 여러차례 되풀이하자 사공이 점쟁이에게 점을 쳐보게 하였는데 당각시가 총각의 피리소리에 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도사공은 총각에게 거짓 심부름을 시켜 그곳에 떼어놓고는 서둘러 배를 출항하여 떠나버렸다. 총각은 몇 날을 늙은 소나무에 올라 피리를 불다 지쳐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노송 밑에 총각의 시신을 묻어 주고 화상을 그려 당각시 옆에 걸어 놓고 당제를 지내주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피리 불던 총각이 목 맨 소나무일까?

소나무 앞쪽의 무덤도 총각의 묘라고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한다.

혹 달빛 이야기를 햇볕에 들추어 내려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겠지.


 

진리당숲에 식생하는 초령목을 찾은 후 용왕당을 건너 뛰었다.

그 또한 인연이리라.

 

 

초령목招靈木

초령목(학명 Michelia compressa)은 목련과 초령목속이며,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와 흑산도에서만 서식하는 수목으로 거의 멸종된 희귀수목이다. 초령목이란  이 나뭇가지를 불전佛前에 꽂아 귀신을 부른다는 설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 하여 일명 ‘귀신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빗죽이나무 혹은 신목이라 부른다. 초령목이라 불리게 된 까닭은 일본 사람들이 신단(神壇) 앞에 초령목 가지를 늘어 놓고 신령을 불러낸다는 뜻에서 붙혀졌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대만함소(臺灣含笑)’ 혹은 ‘편함소(扁含笑)’라 칭한다.

초령목은 봄철에 가지 끝에 흰색 꽃이 피고, 밑부분은 붉은 빛이 감돈다. 주머니처럼 생긴 열매 속에는 붉은 종자가 2개씩 매달려 있다.
이곳 군락지는 1992년 10월 22일 천연기념물 제369호로 지정되었으나, 1994년 초령목이 고사(수고 20m, 직경 2.4m)함에 따라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되고, 2004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주변에 어린 초령목 43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진리당숲에는 초령목 외에도 흑산도 유래가 된 해송.동백.후박나무, 너도밤나무와 대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초령목 잎

 

 

강성 문화대국?

나는 민족 문화 원형질을 계승 발전 시키고,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일이라 감히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 문화를 잊지 말자!!

잊혀진다는 것은 참 서글프지 않은가?


201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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