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청도군

청도...신둔사 마애부도

임병기(선과) 2016. 2. 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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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마애부도로 매니아들에게 널리 알려진 절집

 

오늘은

한국사찰문화재 총람에 등재된 석불입상을 찾아 왔다.

 

 

 

출처...사찰문화재 총람

 

댓돌위에 가지런한 털신

인기척에도

닫혀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동안거 시절인지라...

 

공양간

노보살님은 금시초문이었고...

 

석불은

만행길에 나선걸까?

 

 

일제강점기 석탑

 

 

 

무명 부도

舍利塔사리탑 명문이 있다.

석종형부도로 기단과 상륜도 표현되어 있다.


 

선각의 석종형 부도로 방형 사리공이 있다.

명문

普賢修李氏舍利塔 咸豊二年壬子四月二十日보현수이씨사리탑 함풍이년임자사월이십일

 철종 3년(1852년)에 조성된 우바이(재가 여자신도)이씨의 부도이다.



우리나라 마애부도는 몇 기일가?

몇년전 알려진 창녕 관룡사를 포함하여 26기로 추정하고 있다.

주로 수도권에 산포하며 한강 이남에는 7기가 있다.

상세 내용은 문화유산자료 게시판에 공지된 달넘새(민학기)님의 글을 참고 바란다.


수도권의 마애부도는 지금까지 10기 정도 밖에 답사하지 못했으며 지방에 있는 마애부도 사진을 가져 왔다.



상주 북장사

경암당부도 임인팔월립景巖堂浮屠壬寅八月立"


달넘새님 사진

해인사 원당암

인파당사리탑人波堂舍利塔


달넘새님 사진

순천 선암사 서부도전

성윤수좌사리탑性允首座舍利搭



달넘새님 사진


영월 선달산 마애부도

아직 미답처이다.



 

창녕 용선대 마애부도


2016.02.14


 

"신둔사는 영남의 명산이자 청도의 진산(鎭山)인 화악산 즉 남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화악산(華岳山)은 경상남도 밀양군과 경상북도 청도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높이 930m의 산으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오는 곳이다. 화악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신둔사는 주위 산림이 울창하고 물이 맑은 곳으로 경치가 빼어나다.

 

 전하는 이야기로 중에 옛 삼한시대 때 변한의 소국 중의 하나인 이서국(伊西國)이 청도지역에 웅거하고 있었다. 점차 신라가 강성해져서 이서국을 공격하였는데, 결국 왕성까지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 이서국 왕실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하여 한 동안 살았다고 한다. 신라군을 피해 은신한 곳이 바로 은왕봉(隱王峰)으로 신둔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사람들은 신둔사가 이서국 왕실의 은신처와 관련있다고 추정하고 있다"..한국전통사찰

 

 

신둔사의 창건은 고려시대인 1173년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봉림사(鳳林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1667년(현종 8) 상견(尙堅)대사가 중창하였고, 이어서 1878년(고종 15) 중건 당시에 이름을 신둔사(薪芚寺)로 다시 고쳤다. 근대에 들어서는 1926년에 송호(松湖)스님이 중수하면서 오늘날 신둔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한국전통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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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루를 우회하여 중정에서 예를 갖추고, 법당에서 겨우살이 흔적을 걷어내시던 스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탑은  일제강점기에  송호 영산 주지스님에 의해 세워졌으며, 탑 안에는 진신사리를 비롯하여 문수․보현보살,『법화경』 등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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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이 터지지 않은 산골 접집. 순하고 어진 얼굴의 스님은 빗자루를 들고 낯선 객에게 안내를 자청하신다. 너무 고마운 분들이다. 깨달은 후에는 이미 멀리 떠나가버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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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화상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무슨 사진이 이래???  부처님. 다시 뚜벅이 아나로그로 돌아 가고 싶습니다. 뭘 하겠다고 사진은 찍고 구라를 때려 혹세무민하여 순진한 님들을 현혹시켜  눈 멀고 귀멀게 했는지 후회 막급입니다. 그 죄악을 어찌 다 짊어 지리오. 닉을 선과에서 악과로 바꿀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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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低下壽千秋'라는 문구가 새겨진 원패. 스님 어느 세자인가요?  조선후기 세자로 추정만 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는 없다고 스님이 말씀하신다. 햇볕 때문에 사진이 안될거라며 문을 닫아 주셨는데 문까지 사진에 박혔다. ㅎㅎ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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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송광사의 원패가 문득 떠올랐지만 그마져 어느 임금인지 생각나지 않아 스님에게 설명도 못해드렸다. 누굴 탓하리요. 내 탓인 것을!!!

 

 

대웅전 뒷편 선각 마애부도. 마애탑, 마애종은 있지만 마애부도가 다른 곳에도 있던가?

 

 

'普賢修李氏舍利塔 咸豊二年壬子四月二十日'이란 명문과 사리공이 보인다. 명문으로 미루어 조성시기가 1852년(철종 3)임을 알 수 있지만 스님의 사리가 아니라 보살(?) 또는 여자 신도의 부도이다.

 

 

지난 가을에 장만한 월동용 장작이 가득 쌓인 대웅전을 돌아가면 또 한 기의 마애 부도가 보인다. 풍화가 심해 원형 구분이 어렵지만 석종형 부도로'舍利塔'이란 명문과 작은 사리공이 보인다.

 

 

-.성의가 너무 없어요.

-.스님 가난한 절집 살림 탓이겠지요?

-.ㅎㅎ 바위질이 좋은데 부처님을 새겼으면 더 좋았을텐데...

 

 

청풍루 누하를 올라서면 두꺼비(?) 두 마리가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다.

-.스님, 왜 두꺼비가 있나요?

-.글쎄요?

-.스님 혹 뱀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까요. 뱀과 두꺼비도 별로 친하지 않거든요.

 

신둔사가 위치한 곳은 이른바 청도 남신 13곡으로 알려진 곳이다. 우리님들 답사시에 참고하길 빈다.

 

동천리의 유래와 남산 13곡

동천리의 자연은 본군에서는 보기 드문 (절성지)絶勝地와 유서(由緖)가 어린 곳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후 고을의 선비들이 남산계곡에 모여 시회(詩會)를 자주 열었다. 시제(時題)는 三聲(水聲, 風聲, 鳥聲)을 韻은 聲, 情子로 진왈(盡曰)토록 自然의 품속에서 自然을 사랑하고 아끼기를 수백년 바위에 많은 글을 새겨서 남겨 놓았다.

 

취암(醉岩)에 새겨진 많은 詩句를 대하면  자연과 우정을 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三聲과 情을 곰곰이 새겨보면 삼성이 자연의 소리가 아닌 다른 깊은 뜻이 있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史官이 所信껏 사실을 사실대로, 옳은 일은 옳게, 붓은 거짓을 쓸 수 없다는 선비의 松竹같은 기질을 黑心과 權慾에 찬 政商輩들의 궤변(聲) 奸臣들의 소리(聲), 阿諂(아첨)배들의 소리(聲)를 합치면은 삼성이요 김종식(金宗植)선생의 문하(門下)의 선비들은 아무 세상사 소리(聲)도 듣기 싫었을 것이고 무고(無辜)하게 희생(犧牲)당한 동문들을 그리는 우정이 감추어져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비 기질이 시구마다 넘쳐 흐르고 같은 門下生으로서 하소연할 곳 없는 심사(心思)의 찢어짐을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표현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이 선비들의 恨이 새겨진 남산계곡을 찾으면 찾을수록 선현(先賢)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물 좋고 바위 좋은 데다 수림(樹林)의 녹음(綠陰) 또한 좋은 곳에서 선현들의 청담고론(淸淡高論)하시던 광경이 떠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시구를 대할 때 마다 물질만능 앞에 기질도, 예절도 사라져 가는 현대인의 종착점이 어떤 곳일까 아찔해 진다.

그렇다고 시대조류를 인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을  이 곳에 각남면 일곡리 출신의 최공 익주(翼周)선생이 산수정(山水亭)을 사재(私財)로 1893년 천중절(天中節)에 축조하여 향내(鄕內)의 사림(士林)들이 修契하여 선현들의 기질을 계승하여 봉화(奉和)선현(先賢)들의 韻대로 작시(作詩)하는 것을 바위에다 수(首)의 詩를 새겨 놓고 있다. 崔公의 기개(氣槪)를 본받을만 하다.

유지(遺志)를 이어 받은 최공이 가시자 풍상(風霜)에 견디다 못하여 도퇴 되고 유허지(遺墟址)만 남아 있다. 무심하게도 유허지에는 잡목과 잡초만 무성하여 행인들도 무심코 지나가기가 일쑤다.

 

남산계곡에는 13曲이 있다. 청도와 관계있는 곳을 몇 군데 소개하면은 다음과 같다.

 

1曲은 여기추(女妓湫) 또는 청수대(靑水台)라 한다. 원명은 청수대이나 임란 후에 부녀자들이 여름이면 피서차 입욕하려 많이 다니므로 사대부 부녀자가 낮에 입욕한다는 것은 예절상 있을 수 없다 하여 어떻게든지 막고자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아 선비들이 중지아 여기추(女妓湫)라. 하면 양반집 부인들이 기생과 동등하게는 되지 않으려고 입욕은 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었다. 과연 적중되었다. 이는 선비들의 글장난이라고나 할까.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2曲인 녹수문(鹿脩門)은 녹피(鹿皮)를 상납할 시 수렵 군들이 이 곳에서 수령재를 지내고 사냥을 한 곳이다.

3曲음용지(飮龍池)는 한발(旱魃)때 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일명 기우단이라고도 했다.

5曲 운금천(雲錦川)은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흡사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 산수정이 있었다.

 

6曲취암(醉岩)에 많은 詩句가 새겨져 있어 무오사화 후 많은 선비들이 한을 달래던 곳이다.

12曲금사계(金沙界)는 속세(俗世)의 먼지를 털고 세심(洗心)하여 마음과 몸을 청정(淸淨)하게 하여 鳳林寺(신둔사)나 영은사(永恩寺)로 갔다는 곳이다.

 

13曲인 학소사(鶴巢祠)는 이 곳의 송림(松林)에 서식(捿息)하는 학을 보호하고 학을 벗으로 하며 학의 번식을 비는 사당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당은 없어지고 바위에 글만 새겨져 있다.

 

유서(由緖) 깊은 남산자락에 자리잡은 마을 이름도 몇번이나 바뀌었다.이 高沙洞 → 玉井洞 → 陽川洞 → 東川洞으로 時代에 따라 바뀌었다. 고사동은 고려조시대로 추측되며 은왕(隱王)터의 높은 곳에서도 모래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옥정동은 조선시대의 동명이다 남산계곡의 계수(溪水)가 청담옥류(淸潭玉流) 한다고 동명으로 했다고 한다. 또한 낙석대(洛石台)부근의 옥연소(玉漣沼) 仙女ㅇ등에 맑은 물 밑에 깔린 조약돌이 구슬 같다고 붙여졌다는 設도 있다.

 

양천동은 남산조양(南山朝陽)과 계천이 흐른다고 동명으로 했다는 것이다. 또한 양천동을 조산(朝山), 조산(造山)으로도 불리는 것은 아침해가 먼저 비치는 산 (南山)이라고 朝山, 그리고 이 곳에 造山이 있어 동제(洞祭)를 모셨다고 造山이라고 현재도 불리고 있다 音은 같으나마 뜻은 전연(全然) 다르다.

 

이 곳에 향교가 있었다가 고평리(古坪里)로 이건(移建)된 것은 계천변(溪川邊)에 있어서 둑이 침식되는 바람에 옮겨졌고 향교 자리에 造山을 만들고 동제(洞祭)를 모신 것은 훨씬 後代가 아닌가 싶다.

이 마을의 全盛時는 陽川洞時代다. 현재의 "금장배기"가 洞基로 附近에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이 있어 고배 단경호, 장경호, 항아리 등의 파편이 산재해 있다. 양천동 당시는 큰 부자(副者)는 없어도 비교적으로 중산층이 많아 나름대로는 생활이 안정되었고 선비들도 있어서 향내(鄕內)에서는 꽤 이름이 나 있었다고 한다.

동천동은 동헌(東軒)의 동쪽 계천가에 있다고 동천동이라 했고 현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기계유씨(杞溪兪氏)의 한익공(漢益公)이 밀양군 상동면 평능리에서 이거택리(移居擇里) 하였다. 동천동에는 영은사(永恩寺), 신둔사, 사림사(沙林寺) 등이 있었으나 現在는 신둔사뿐이고 두 절은 유불정책(儒佛政策)의 일환으로 폐사(廢寺)되고 林木은 鄕校, 東軒, 客舍등에 活用 되었다는 것이다.

- <문헌발취: 청도문화지 1999년 4호 李弘益 글,> -

   

자료발취 :  청도향토사학회보(2001년8월11일자)

 

200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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