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청도군

청도...호거산 운문사(1)

임병기(선과) 2016. 2. 29.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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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가장 최근에 들린 것이 2004년 옛님카페 회원들과의 답사이었다.

그때 카페에 올린 글이 보인다. 오류도 보이고 객기도 부린듯 하지만 그냥 둘련다.

 

 

한 사람이 그립다.
주말마다 만나 탁배기 잔을 기울이던 동아리 아가씨가 어느날 행방이 묘연하다며, 경남 합천에서 농사 짓던 부모님이 우리를 찿아 오셨던 것이 1980년도 초반 이야기지만 끝내 속세를 등진 그녀는 환속을 거부하고 운문사에 학인승으로 정진중이라는 소식이 바람결에 실려오곤 했었는데 그녀는 아니 그 스님은 어느 하늘아래 봄볕 따사로운 절집에서 물소리 바람소리 벗삼아 한소식(득도) 얻고 향을 사르고 정진중일까?

그 스님도 아직 잊지 않고 있겠지?
운문사 넘어 오작갑사의 하나로 알려진 대비사에서 보낸 일주일 간의 체험 기간중에 나랑 한 조가 되어 부엌에서 공양 준비하며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뒤집던 불장난,저수지에서 엉덩방아를 찌으며 박장대소 했던 얼음지치기,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을 손을 잡고 밀고 당기며 산을 넘어서 운문사로 갔던 아련한 추억들을...

그렇다!
운문사는 늘 나에게 슬픔으로 다가오는 가람이기에 동행한 님들에게 아이러니하게도 나도 몰래 "운문사를 감성적 시각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사바세계에서 혼탁한 슬픔을 간직하고 살지만 그녀는 그 스님은 슬픔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이제 즐거움을 가슴에 심고서 고운 심성 만큼이나 정갈하게 마음의 텃밭을 일구며 오늘도 고요한 산사의 새벽공기를 가르며, 낭낭하게 염불을 외며 도량석으로 하루를 열겠지.

유난히도 큰 키에 한 잔 술에 겨워 송학사를 즐겨 부르던,때론 끝까지 외지도 못하면서 만해의 님의 침묵을 낭송하던 그 스님이 그립다! 너무도 그립다!!!

봄맞이...어느 비구니 스님의 오도송

진종일 봄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하고
(盡日尋春不見春)
짚신 끌며 구름 핀 재 넘어 두루 돌아다녔네
(芒鞋踏遍嶺頭雲)
집에 돌아와 우연히 매화향기 맡아보니
(歸來偶把梅花嗅)
봄은 매화가지 끝에 이미 와있는 것을
(春在枝頭已十分)
.
.
.
난 답사를 늘 가족들과 가거나 혼자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최근까지도 그랬다.적어도 사이버 상의 동호회를 알기 전 까지는...,지금도 번잡함이 싫고 혼자 떠남이 더 없이 좋다.머무름과 떠남을 내 꼴린대로 할 수 있고,말없이 즐기며 때론 금당에 좌정하고 계신 석불과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착각에 헤매다 한숨 늘어지게 큰 대자로 뻗어 잘 수 있는 불량끼 있는 건달의 멋을 누리는 과외의 흥겨움에 젖을 수 있기에...

어느날 걸려온 징검다리 동장의 전화에 답사지와 코스를 말하고 나서도 후회가 밀려 온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것을 즐기는,옛님의 숨결을 느끼려는,전통 문화유산의 향을 맛보려는 님들의 바램을 거절하는 것도 선업을 짓는다는 "선과"라는 닉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지 않는가?

우리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옛사람의 정 만큼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정, 사람과의 만남일진데,그래 떠나는 거야!라고 맘 잡으니 맘이 한 없이 편하더구먼(허허 땡쵸가 따로 없구만)핑계 삼아 오입한다는데 28년 전의  그녀,적어도 오늘만은 스님이 아닌 그녀와의 추억도 반추해보며 님들과 초입의 솔내음 즐기며, 비포장 길을 이빨 까며 걸어 가야지!

영남 각지에서 모인 우리님들과 만나 운문사 범종루 앞에서 간단히 수인사 나누고 누하로 들어 가보입시더...

 

언젠고 이른 아침에 순례할 때에 마당빗자루 자국이 선명하여 걸어가기 미안할 정도로 정갈했던 길위엔 쌓인 벚꽃닢 만큼 많은 인파가 총총걸음을 제촉하고 있다.

윤이월에 삼도삼사 순례하면 덕을 짓는다고 했던가?
소란스런 객들의 분주한 발걸음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밀짚모자를 눌러 쓴 비구니 스님들은 밭에서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운력에 여념이 없으시다,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백장(百丈) 스님의 청규(淸規)도 수행의 한 방편이니...

언제나 그러하듯 범종루 밑을 지나면 말 술을 즐기는 처진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부럽다. 말 술을 드시면서도 400여 년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의미를, 찰나의 희로애락에 일비일희 하는 범부들이 노송의 가르침을 알고나 있을까?

방향을 돌려 왕희지체(王喜之 )의 신수(神受)를 얻었다는 고려 왕조 제일의 명필인 대감국사 탄연(坦然)이 비문을 썼다 하는 운문사 중창주인 원응 국사비에 눈길 멈추며 사라진 귀부와 이수를 그려 본다. 아마 그랬을거야.고려말 이후에 보이는 귀부의 양식인 아가미가 있는 익룡의 모습에 비신 끝은 모죽임한 규수 형태였겠지, 이수에는 두마리의 용이 휘감겨 있었을 것이고, 아님 어때 무지도 내 몫이요, 얕고 좁은 안목도 내 것인데...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햐~ 하늘이 좁아 보인다,아니 둥글게 다가온다.
운문사를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세,마치 연꽃 같은 산세가 사람을 한없이 포근하게 만든 까닭이겠지? 여느 사찰과 달리 가람의 전각배치가 산을 등지고 있지 않고 마주보고 좌향하는 의미도풍수의 비보책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 만이 아니다.비구니 강원이 들어선 이유도 운문사 남쪽의 가지산이 문필봉(文筆峰)이고 학산 역시 문봉(文峰)인 까닭이라고 풍수적 해석도 하고 있으니,가람의 개창을 진흥왕 대라고 본다면 도선 이후 도입된 풍수지리 이전에 우리에게도 고유의 자생풍수가 없었다고 누가 감히 말 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에 지방지에 연재되었던 삼국유사의 현장을 찿아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역사적 기록과,기록의 단절,운문사의 지세 등을 고려하여 운문사가 신라의 육군사관학교었으며 생도인 화랑의 교육장 이라고 했으니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봐도 영 터무니 없는 설은 아니지 않는가?

"《삼국유사》 제4권 <원광서학(圓光西學)>에 의하면 원광 국사(圓光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와 진평왕(眞平王) 22년(600)에 경주(慶州) 황룡사(黃龍寺)에 있다가 운문사에 3년간 머무르며 중창을 하고, 그 후가슬갑사(嘉瑟岬寺)에서 화랑(花郞)인 사릉부 사람 귀산과 취항이 원광 국사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았다"

운문사에서도 놓칠 수 없는 전각이 작압전이다.
지금이야 단촐한 사모지붕의 전각이지만 호분을 입힌 석조여래좌상과,예전에는 탑지였음을 유추할 수있는 탑 1층 몸돌 이었을 사천왕주가 작은 전각을 옛님의 향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다시 삼국유사로 드러가 보면 작압전의 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 제4권 <보양이목(寶壤梨木)> 편에 보양 국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서해(西海)의 용왕(龍王)이 이목(離目)이라는 아들을 딸려보내며, 본국(本國)으로 돌아가 작갑(鵲岬)에 절을 지으면 호법(護法)하는 어진 군왕이 삼국을 평정(平定)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서기 936년(경순왕3년) 이곳에 이르르니 절은 보이지 않고 황폐하기가 그지없었다. 까치의 안내로 대작갑사 터를 찾아낸 그는 그곳에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하였다. 얼마 뒤 태조 26년(943)에 삼국통일을 도운 보양의 공(功)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王建)이 500결의 토지와 `운문선사(雲門禪師)"라는 사액(賜額)을 내린다. 이로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라 불리게 되었다.

운문사를 들릴 때마다 늘 가슴으로 다가오는 일연선사와 삼국유사,승리자의 기록이며 사대사상이 농후한 (물론 다른 시각에서의 해석도 많다)편년체의 삼국사기만 현존하고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신라 이두로기록된 향가 14(?)수를 우린 어찌 느낄 수 있었으며(균여전에도 몇 수가 전하는가?)햇볕에 노출된 정사만 알고 달빛에 드리워진 야사를 신라의 향기를 맛 볼 수 있었겠는가?(삼국유사 속의 가람의 향은 다음에 옛님 문화의 곳간방에 올리도록 하겠다)

[일연(一然) 스님이 생존했던 당시의 고려는 최씨(崔氏) 집정기(執政期)였으며 30여 년이라는 몽고와의 끈질긴 항쟁으로 국토는 유린되었고 민심은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러한 민족수난기(民族受難期)인 이때 민족의 자주적 의욕으로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워 주고 민족이라는 자주의식(自主意識)을 심어 주기 위해 일연 선사는 남해 정림사(定林寺)에 계실 때부터 3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해 둔 것을 집필한 곳이 운문사이며 그리고 집필한 것이 《삼국유사》이다.

이렇듯 삼국유사는 한순간의 착안(着眼)이 아닌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하여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찬술 시기는 충렬왕(忠烈王) 43년(1278), 왕명(王名)으로 운문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운문사에서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기까지인 70세에서 76세 사이의 6~7년으로 본다.]

그런저런 사념에 빠져나오며, 동행한 일행에게 부질없는 석탑과 시대적 패러다임을 풀어보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내 가슴속은 추억에 잠겨 너무도 감성적이기에 이성적 접근을 차단당하고 있지 않은가?
맘속에 숨겨진 비밀이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과연 없다고 말할 수 있나?

비로전 전각에 석가모니부처가 계신다기에 눈을 돌려 보았지만 이제 비로자나불이 제자리를 잡고 있어 삼배라도 올리고픈 맘 가눌길 없었지만 법회의 법문을 알리는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청법가가 울려 발길 돌릴 수밖에....

운문사를 나서는 길이 왜 그렇게 가벼울까?
옛추억이 주는 가슴아림에 늘 무거운 발길로 돌아왔었는데....
맞어! 바로 그거야!!! 초교 4학년인 유리공주의 초롱한 눈 빛 속에서 우리의 문화는, 역사의 향은 단절 될것이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낼 수 있었기 때문임에 분명하리라....

일행과 내려오는 솔밭사이로 청법가의 가사가 들린 듯 하다.
옛인연을 이어서 새인연을 매~앳~도록~~~~~~~~

200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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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의 솔밭길은 여전하다.

 

 

진입공간을 뒤돌아 앉은 전각

 

 

범종루

 

 

처진 소나무

 

 

1982년 겨울

 

 

비각

 

 

원응국사비

고려 인종 때인 1145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와 이수가 결신된 상태이며 비석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세 조각으로 파손한 뒤 방치한 것을 수리·복원한 것이다.

비문은 윤언이(1090∼1149)가 지었고 글씨는 대감국사 탄연(1069∼1158) 썼다

 

원응 국사圓應國師(1051∼1144)는 고려 숙종 대에 활동한 고승으로 속성은 이씨이고, 속명은 학일學一이다. 11세에 진장 법사를 따라 출가하여, 희함 선사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106년에 삼중 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122년(예종 17) 7월 22일 왕사로 책봉되었다. 1144년(인종 22) 12월 9일 93세로 입적하였다. 인종은은 대사의 업적을 찬양하여 국사로 책봉하였으며, 원응圓應이란 시호를 내리고 많은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대웅전,만세루 중수비(1935년)

 

 

설송대사비

휴정의 교파와 선파 두 계보를 하나로 통합한 설송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1754년(영조 30) 세웠다. 비문은 이천보李天輔, 해서체의 글씨는 이정보李鼎輔가 썼으며, 이익보李益輔가 전액篆額하였다.

 

첫 부분은 서문에 해당하는데 비문을 지은이의 조상대부터 4대에 걸쳐 휴정의 법맥을 이은 승려들의 비문을 지었음을 밝히고, 자신이 설송의 제자 남붕南鵬 등의 요청으로 비문을 짓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휴정의 문도가 유정, 응상,쌍언, 석제(釋霽)의 교파(敎派)와 언기. 의심. 설제, 지안의 선파(禪派) 등 두 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설송대사가 석제(釋霽)와 지안志安을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하나로 통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설송대사는 백씨白氏이고 호는 설송이며, 자인현에서 태어나  13세에 운뮨사로에 출가를 하였다. 불경을 두루 보면서 근원을 찾고 묘법을 궁구하여, 단에 올라 강설하니 따르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종사로 여겼다. 나이가 들면서 홀로 면벽하였으며, 1750년(영조 26) 게송을 써서 부처를 칭송한 뒤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75세이고, 법랍 63년이었다. 화장을 한 뒤 사리 8과를 얻어 운문사와 통도사에 나누어 간직하였다. 

 

 

석탑재

 

 

비각옆 부도.

주인공 명문이 새겨져 있다.

부도전으로 옮기면 좋을 듯

 

 

석탑재

 

 

칠성각 칠성탱

 

 

독성탱(1942년)

 

 

산신탱(1942년)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좌상(조선후기), 지장탱(1889년)

 

 

관음전 수미단

 

 

관음전 수미단 용(?)

 

 

석조관음보살좌상(조선후기)

 

 

관음보살도(1868년)

 

 

관음전 신중도(1861년)

 

 

작압전

 

 

석불좌상

육각대좌와 광배를 갖추었다. 나발에 육계가높다. 법의는 통견, 항마촉지 수인이다.  눈썹이 가늘고 길며 작은 눈, 작은 입술에 코가 다소 크게 표현되었다.으며, 머리에는 육계와 나발의 표현이 뚜렷하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표현되어 있고,  광배에는 불꽃 무늬를 조각하였다. 다량의 복장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865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납세제 사리 호와 통일 신라 때의 사리 병, 옥구슬 등이 포함되어 있어 석조 여래 좌상의 조성 시기가 9세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15세기 전반기에 통용되었던 영락통보(永樂通寶)와 1642년 제작된 숭덕 7년명 사리 합개(崇德 7年銘 舍利 盒蓋)가 출토되었다.  불상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복장물을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왕 석주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의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900년 전후의 작품으로 전한다.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

 

 

동방지국천왕

 

 

동서 삼층탑.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은 2기단 삼층석탑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하기단에 2개 탱주를 새겼고, 상기단 면석에는 각면에 탱주를 중심으로 2구씩  8부중상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에는 양우주를 조출하였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낙수면 물매는 급하지 읺다. 옥개받침은 5단, 상륜부가 비교적 온전하다. 일제강점기에 보수하였다. 9세기 석탑으로 추정한다.

 

 

근자에 발표된 자료((雲門寺 東.西 三層石塔에 관한 고찰, 오세덕, 新羅文化38집, 東國大學校新羅文化硏究所)에 따르면 운문사 석탑은  동탑이 서탑 보다 빨리 앞선 시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쌍탑이 아니라 단탑이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주장이다.

 

 

1977년 여름

 

 

동탑

 

 

 

 

 

 

 

서탑

 

 

 

 

 

대웅보전 앞 석등

 

 

대웅보전 앞 석등

 

 

대웅보전 앞 사자상

 

 

바라만 보아도 마냥 즐겁다.

 

 

 

금당 앞 석등 촬영을 위해 출입금지 구역을 범했다.

하지만

금당 수리 때문에 석등은 합판으로 꽁꽁 감춘 상태이었다.

아쉬움에 은행나무를 위안삼아 한 장!!!

 

2016.02.14

(청도군청. 문화재청.디지털청도문화대전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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