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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단양군

단양...수몰이주기념관 석탑재

by 임병기(선과) 201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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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비지정 답사 동선을 수립하면서도 내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문화재가 충주댐수몰전시관 탑재였다. 문화재청 한국사지총람에는 "원사찰은 알 수 없으나 충주댐수몰전시관 앞에 위치한다. 탑신석에 문비를 표현하였으며 상층기단면석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신라시대 양식을 다른 고려시대석탑으로 추정된다"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8년이 지났다) 내기억으로는 수몰이주기념관이며 더군다나 탑재는 떠오르지 않아 동선에 포함시켰더니 역시나 예상대로 충혼탑 아래 수몰이주기념관이었다. 탑재를 살펴보는 것도 잊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 조팝에 이끌려 옛추억속의 선친의 모습을 또렷히 새기며 40년전 빛바랜 앨범속으로 빠져들었다. 봄은...

 

아래에 지난 글을 가져왔다.

 

 

 

 

사지총람 내용과 달리 면석은 보이지 않고 기단갑석과 초층 탑신석 하나가 있다. 갑석 상부에는 각호각의 3단 탑신괴임이 조출되었다. 중앙 호형괴임이 상대적으로 높다. 탑신석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문비와 자물쇠가 뚜렷하다. 이곳으로 옮겨 올 때는 분명 안태고향을 알았을텐데 작은 안내문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2014.04.11

 

 

단양...나의 추억도 수장된 수몰 이주 기념관에서

 

단양역

 

문득 단양역이 떠올랐다. 삼복 더위에 만추의 정취가 전신을 휘감아 홀린듯 역광장으로 진입하였다. 두리번 두리번 추억의 편린을 엮어보아도 짧은 풍경으로 스쳐갈 뿐 낯선 풍경이다. 기억속에 구단양역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유년의 고향을 잃은 듯한 묘한 감정이다.

 

작은 시골역 기차 도착 시간에 맞추어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행렬로 다가가 연세 지긋하신 분에게 말을 건내었다. 아저씨 구단양역이 어디쯤인가요? "저기 저위 이미 수몰 되고 없습니다." 구단양역에서 단양읍

 

단양 비지정 답사 동선을 수립하면서도 내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문화재가 충주댐수몰전시관 탑재였다. 문화재청 한국사지총람에는 "원사찰은 알 수 없으나 충주댐수몰전시관 앞에 위치한다. 탑신석에 문비를 표현하였으며 상층기단면석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신라시대 양식을 다른 고려시대석탑으로 추정된다"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8년이 지났다) 내기억으로는 수몰이주기념관이며 더군다나 탑재는 떠오르지 않아 동선에 포함시켰더니 역시나 예상대로 충혼탑 아래 수몰이주기념관이었다. 탑재를 살펴보는 것도 잊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 조팝에 이끌려 옛추억속의 선친의 모습을 또렷히 새기며 40년전 빛바랜 앨범속으로 빠져들었다. 봄은...

 

아래에 지난 글을 가져왔다.

 

 

 

 

사지총람 내용과 달리 면석은 보이지 않고 기단갑석과 초층 탑신석 하나가 있다. 갑석 상부에는 각호각의 3단 탑신괴임이 조출되었다. 중앙 호형괴임이 상대적으로 높다. 탑신석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문비와 자물쇠가 뚜렷하다. 이곳으로 옮겨 올 때는 분명 안태고향을 알았을텐데 작은 안내문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2014.04.11

 

 

단양...나의 추억도 수장된 수몰 이주 기념관에서

 

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작은 고개를 넘었는데 어디인가요? (멀리 산을 가르키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신다. 대구에서 왔으며 30년도 더 지난 시절이 생각난다고 했더니 "양반아! 강산이 세번 바뀌고 더구나 수몰된지가 언제인데 기억이 나겠냐고" 반문한다.

 

수몰 이주 기념관

 

기사 아저씨 말씀을 듣고 가슴속 추억의 한장면이라도 잡을려고 단성면으로 향하는 고갯길에서 선친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계신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의 고교시절 선친은 진급후 단양 농협에 근무 하시어 방학이면 어머니는 우리 3남매와 함께 단양으로 향했고 단양역에서 비포장 황톳길을 걸어 고갯마루에 다다르기전 선친은 자전거를 타고 마중을 나오시곤 했다.

 

그시절에도 수몰 직전이어서 단양읍은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분위기의 활기 없는 읍내로 기억하지만, 마늘과 고추 거래가 활발했던 재래시장이 눈앞을 스쳐간다. 아버지 하숙집에서 우리 가족이 보름여 머무는 동안 그렇게 정겹게 대해주시던 넉넉한 주인집 아주머니는 어디에 계실까?

 

언덕에 올라 아무리 바라보아도 낯선 전경이다.. 저 댐속에 수장된 줄 알지만 현실로 수용하기 싫고 기억에 기억을 반추해보지만 고인이 되신 아버지 처럼 나의 옛 추억도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운 옛날로 자리할 뿐이다.

 

수몰 이주 기념관. 고향을 떠난 수몰민들이 고향 내음, 고향 풍경, 고향 사람, 고향 문화를 간직하고 먼 후손에게 할아버지의 탯자리를 보여주기 위해 세운 기념관 이다. 문이 개방되었으면 기억 저편 내추억의 한 올 실타래도 잡아보련만 첫사랑 그녀 같이 아름다운 추억거리로 남겨두어야 겠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복도별업 암각자

 
단양은 퇴계와 관련된 유물이 산재하고 있다. 단양 답사기를 시작할 때는 퇴계와 단양 관기 두향이의 재미진 이야기도 전개하고 싶었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고교 시절 선친이 읽던 정비석의 "기생열전(?) 을 몰래 탐독한 까닭에 선친에 대한 죄의식 때문일가? 기회는 또 오리라 믿으며 야외에 전시된 문화재를 소개 하겠다. 글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다.
 
"화강암석(花崗岩石)에 해서체(楷書體)로 복도별업(復道別業)이라 각자(刻字)한 것으로 조선(朝鮮) 명종초(明宗初)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내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친필(親筆)이라 전한다. 이곳의 복도소(復道沼)는 퇴계(退溪)가 단양군수 재임시 관개(灌漑)를 목적으로 만든 보(洑)로서 물이 맑고 깨끗하며 경승지일 뿐만 아니라 목욕을 하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깨끗해질 만큼 훌륭하여 퇴계가 이곳에 별업(別業)을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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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교 신사비

 

"이 비(碑)는 조선(朝鮮) 영조(英祖) 29년(1753) 단양(丹陽) 군수(郡守)였던 이기중(李箕重)이 단양천(丹陽川)에 우화교라는 돌 다리를 놓고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리 옆에 세운 비이다. 그후 큰 홍수로 다리는 파괴되고 현재는 비만 남아 있게 되었다. 비신(碑身)은 화강암(花崗岩)으로 높이 115cm이며, 비문(碑文)의 내용으로 보아 돌다리가 가설된 다음해인 영조(英祖) 30년(1754)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우화교? 참 운치있는 다리 이름 아닌가요? 우화교는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하던 길목의 예전 단양읍내 단양천위에 가설된 다리였다고 합니다. 다리위에서 바라보면 주위 산세가 어우러져, 맑은 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착각이 든다고 하여 날개깃 다리라는 불리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제 기억속에도 남아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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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오대

 

"조선(朝鮮) 명종초(明宗初) 단양군수(丹陽郡守)로 재임하고 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정사(政事)에 시달린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매일 이곳에 와서 손발을 씻고, 이곳이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탁오대(濯吾臺)라 명명(命名)하고 친필(親筆)로 각자(刻字)하였다 전한다. 자연암석(自然岩石) 중앙 우측 부분에 전서체(篆書體)로 각자한 것으로 3자의 크기는 가로 13cm 세로 46cm이다."

 

단양역 열차

 

달려가고 싶다

 

그 시절로 잠시라도 돌아가고 싶다.

 

이제

 

더 잊혀지기 전에 과거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시간 여행길에 올라야겠다.

 

추억 저편 젊은 날의 아픔 사랑 아름다움의 작은 편린들을 찾아서...

 

 

200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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