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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단양군

단양...보국사지 석불입상

by 임병기(선과) 201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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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풍기읍과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  고갯마루 죽령. 지금은 한적하고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지만 예전에는 고개가 험준하고 산림이 우거져  산적떼가 은거하여 자주 출몰했던 곳이었다. 또한 영남지방에서 청운의 뜻을 품은 유생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길이었고, 관원들의 업무 출장 길이었으며, 보부상들의 장사길이었다.  죽령은 그런 과객들의 주통로로  이들을 위한 주막, 마방들이 들어서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것이다. 죽령은  옛날 어느 도승이 이곳을 지나다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길가에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竹嶺’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며, ‘대재’라고도 한다. 예전 읽었던 우리말 지명사전(?)에는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에서 유래되었다는 글도 기억난다.

 

명승 30호로 지정된 '죽령옛길'에 대한 문화재청 설명이다. "죽령 옛길은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지역이었는데,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저런 사연을 품은 죽령. 이제는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고개였으나 최근의 힐링 붐을 타고 두 지자체의 지원과 협조로  '소백산 자락길 죽령 옛길'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소백산국립공원에 소개된 소백산자락길이다.

 

소백산자락길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생태탐방로’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고, 2011년 ‘한국관광의 별’로 등극되었다.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소백산자락길은 전체 길이가 143km(360리)에 이른다. 모두 열 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자락은 평균 거리가 12km(30리) 내외여서 약 3~4시간이 소요되므로 하루에 한 자락씩 쉬엄쉬엄 걸을 수 있어 리듬이 느껴진다. 더구나 열 두 자락 모두 미세한 문화적인 경계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자세히 살펴보면 자락마다의 특징이 발견되어 색다름 느낌의 체험장이 될 수 있다.


2009년 1,2,3자락이, 2010년 4,5,6,7자락이, 그리고 2011년, 2012년에 8,9,10,11,12자락이 완성되어 전국의 자락꾼들을 불러 모우고 있다. 특정 구간은 이미 포화상태에 들어섰다는 지적과 함께 <예약제>로 탐방객을 통제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소백산 자락길은 경북 영주시, 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의 3도 4개시·군에 걸쳐져 있다. 올망졸망한 마을 앞을 지나기도 하고, 빨갛게 달린 과수원 안길로 안내되는 가하면, 잘 보존된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하기도 하여 아기자기하므로 대부분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는 다른 곳의 걷는 길과는 차별된다. 특히, 국립공원 구역이 많아 원시상태가 잘 보존되어 숲의 터널에서 삶의 허기를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돌돌 구르는 시냇물과 동행할 수 있어 신선하다.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 등의 봉우리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소백산자락은 명산에 걸맞게 대찰을 품고 있는 불교문화 유적의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에 속해 있어 부석사를 위시한 성혈사, 초암사, 비로사, 희방사, 구인사 등등의 불교유적지 탐방의 재미도 쏠쏠하다. 3도 접경 행정구역을 달리한 생활문화의 특징까지 감상할 수 있음은 보너스이다.

 

풍기 방향 주막

 

개인적으로는 희방사, 백룡사 석불좌상 등 영주지방 옛길은 파악하고 있지만 단양 대강면 용부원리 옛길은 미답처이다. 단양 방향 옛길을 들어서기전 사전에 파악한 보국사지 죽절문 지주로 추정되는 석조물을 보기위해 풍기방향 주막을 들렸다.

 

 

우물터로 보이는 곳 앞쪽 두 기 지주가 보인다. 장식물? 아니었을 것이다. 우물 천정을 받치는 기둥 누하주 용도가 분명해보인다.  이 석조물로 인해 보국사지 석불입상도 충주 미륵사지 석불처럼 석굴 속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하는 단초가 된다. 또하나 석조물과 무관하지만 우물위에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예전 우리 선조들은 마을 공동우물가에 해충의 접근을 차단하기위해 향나무를 식재했었다. 유년의 고향 우물가 기억을 되살려 보라.

 

 

 

 

죽령고개에서 단양 방향 휴게소 맞은편 에 '용부원2리 샛골' 마을 이정표가 서있다. 그길로 내려가면 죽령산신당을 거쳐 '소백산자락길 죽령 옛길 3-5' 주소지에 보국사지가 자리한다. 보국사는 한국사지총람자료에 의하면 삼국유사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임지로 가는 도중에 한 거사를 만나 도움을 받고 그 은혜를 갚기위해 죽지령 북쪽 봉우리에 돌로 미륵불을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사탑고적고에는 용부원리 소백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지에 목 없는 장육불상이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3년 보국사지 지표조사 시 복원하여 놓았다. 보국사지에는 장육불, 연화문대좌, 죽절문간석竹節文干石 토막, 연화문 석판, 주초석, 여러가지 문양을 한 기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9세기 경에 창건된 사찰로 전하며 폐사 시기는 조선시대로 본다.

 

 

판석

 

 

용도 불명의 석조부재

 

 

뒤집혀진 석등 간주석?

 

 

죽절문 지주 토막

 

 

석등 하대석

 

석불입상

 

머리와 발은 먼 만행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무릎 분에서 상하 신체가  2분되어 보수하였다. 불상은 약 5.5m(16.5척) 정도이며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린 여원인이고 왼손은 법의에 붙혔다. 통견의 법의으로 U자형 습의가 무릎 아래까지 흘러 내렸다. 불상은 8세기 신라 단독석불로는 최대인 장육불상으로 추정하며  석굴암 대불을 전후한 신라 조각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충주 미륵리 사지 미륵불에 앞서 죽령에 세워진 불상이라고 한다.  불상은 삼국유사 효소왕(692~702)대 죽지랑조에 기술된 죽령을 개척한 죽지랑竹旨郞의 전생인 한 거사를 위해서 조성한 장육미륵불로 추정된다고 한다. 석불은 주변의 산재한 부재들의 양식으로 미루어 내부에 봉안하였을 것으로 본다.

 

 

연화대좌와 지복석

 

 

 

 

 

죽령을 개척한 죽지랑의 전생인 거사를 위해 조성한 석불로 알려져 있는 연유로 자락길 변에 신라향가 모죽지랑가 입간판이 서있다.

모죽지랑가...득오

 

간 봄을 그리워하매

모든 것이 울어서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에 주름살이

지려 하는구나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기를

짓고저

죽지랑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오

 

 

 

요즘처럼 좋은 계절에 편안한 복장을 갖추고 느긋한 마음으로 죽령 옛길 탐험하는 것도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답사가 목적이라면 부석사, 선비촌, 소수서원을 답사 후 희방사역부터 옛길 코스로 접어들어 백룡사 석불좌상을 뵙고 고갯마루에서 선인들의 발자취와 죽령을 거쳐간 죽지랑 과 삼국시대 인물, 왕건, 요즘 드라마 방영중인 정도전, 수양에게 몰살당한 금성대군을 떠올리며 보국사지석불 답사로 마무리하는 일정도 의미있는 코스로 여겨진다. 원점회귀 등의 제반 여건을 고려한다면 각 지자체에서 디테일한 탐방 안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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