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부산시

부산...내원정사 목조관음보살 좌상

임병기(선과) 2014. 3. 3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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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서대신동3가 산3-2 구덕산에 위치한 사찰로 1973년 석암당 혜수스님. 석련스님이 개창하였다. 내원정사는 불교의 현대화에 발 맞추어 도심불교 도량으로 면모를 갖춘 사찰로 보이며 유치원, 사회복지재단, 템플스테이 등을 열어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근 가능하여 불교의 대중화에도 기여할 것 같다.

 

 

내원정사 대적광전은  근자에 지은 사찰이면서도 몇가지 눈여겨 볼 특징이 있다. 우선 기단에 보이는 고식의 흔적이다. 동화사 금당선원 외에도 경북지방 사찰에 보이는 고식기단은 흔치 않으나 내원정사 대적광전 기단에는 거칠지만 안상을 새겨 두었다. 겹처마 다포집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에는 어칸 협칸 구분없이 2분합문에  꽃이 만개하였다.

 

 

누구나 고민해보았겠지만 우리가 옛님을 답사하면서 늘 느끼는 숙제의 하나가 오늘날의 패러다임은 무엇일까?라는 것이다.석탑,불상, 부도...

 

내원정사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으 봉안되었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석탑형식의 불단을 조성하였다. 좌우에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진신사리를 모신 석탑 기단 모서리에는  불법 수호의 상징으로 사자가  지키고 있으며, 방속에는 많은 부처님이 자리하고 계신다. 또한 네벽면에는 목각으로 조성한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닫집 위에도 호랑이 2마리가 앉아 있고 닫집속의 용, 건너편 대들보에는 코끼리 2마리를 조성하였다.

 

나이탓인가?

어느 절집에서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이시대의 불상 배치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하고 싶다.

 

 

목각탱

 

육화료

 

육화六和?는 불교의 공동체 생활인 육화경법六和敬法에서 온 말로  송나라 고승 목암의 조정사원祖庭事苑에 의하면 신.구.의.계.견.리 여섯가지 규범이다.


첫째, 혼자만 편히 살지 말고 함께 머물 것.身和共住신화공주
둘째, 입씨름이나 언쟁을 삼갈 것.口和無諍구화무쟁
셋째, 뜻의 화합을 위하여 남의 의견을 존중할 것.의화동사意和同事의화동사
넷째, 계로써 화합하여 함께 규율울 지킬 것.계화동수(戒和同修계화동수
다섯째, 모든 대중이 견해를 같이할 것.견화동해(見和同解견화동해
여섯째, 이익이 있으면 모두 함께 균등하게 나눌 것.利和同均)이화동균

 

육화료에 모셔진 목조관음보살좌상.

 

1999년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조사하던 한국교원대 정영호 박사는 불상 복장구에서 붉은 종이 한장과, 불상 조성기를 담은 누런 종이, 묘법연화경을 발견했다. 붉은 종이엔 '1956년 관세음 보살상을 기증한  석당 정재환 동아대 이사장, 정수봉 총장 부부의 이름과 자녀들의 이름이 연명으로 적혀 있었다.

 

내원정사에 소장된 이 불상과 석당은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다음에서 자료를 발췌했다.

 

"1973년께 동아대 박물관 이용현 과장은 석당이 찾는다는 말에 다대포 별장으로 올라갔다.  '20년전부터 우리집에 모시고 있는 송나라 불상이 있는데 내가 죽고 나면 이 불상을 누가 관리하겠나.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 불상을 모실 수 있는 사찰을 찾고 싶은데…' 당시 신변을 정리하던 석당은 다대포 별장의 단칸 법당에 모셔두고 있던 불상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아직 관음보살상을 모시지 않고 있는 절 중에서 내가 자주 가서 뵐 수 있도록 차가 들어갈 수 있는 절이었으면 좋겠네. 그리고 현대교육을 받은 주지가 있어서 관리문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이라면 더 좋겠는데. 자네가 알아봐 주겠나.'

석당의 말을 들은 이 과장은 부산 경남 인근의 사찰을 샅샅이 훑었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엔 석당이 자주 찾던 지리산 내원사로 이 불상을 모셔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불상은 내원사에서도 1년 밖에 있지 못했다. 내원사 주지가 '최근들어 깊은 산중의 사찰을 노린 문화재 절도범들이 들끓어 이 불상을 지키느라 밤잠을 못자고 있다'며 다른 좋은 곳을 알아봐 달라고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불상은 다시 석당의 다대포 별장으로 옮겨 와야 했다. 석당은 1976년 11월30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침 저녁으로 이 불상 앞에서 불공을 들였다. 석당의 49재齋도 절에서 행하지 않고 바로 이 불상 앞에서 올렸다.  당시 49재를 주재했던 내원정사 석암 큰스님과의 인연으로 불상은 서구 대신동 내원정사로 옮겨지게 됐다.

 

석당은 운흥사의 불상을 어떻게 입수했고 왜 중국불상으로 알고 있었을까. 전언에 따르면 석당은 이 불상을 1950년대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아 상당한 사례를 지불하고 사들였는데 아마도 운흥사에 있던 불상을 누군가 가져가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다가 전쟁통에 돈이 궁하자 이를 석당에게 팔았던 것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석당에게 물건을 건네준 사람이 송나라 불상이라 했고 윤왕좌(輪王坐: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라는 특이한 자세의  불상은 당시만해도 국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형태여서 중국 불상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불상 복장구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의하면 존명은 관음보살로 경남 고성 운흥사에서 옹정雍正 8년(1730년, 영조 6년)에 당대 최고의 금어 의겸 스님이 운흥사에서 조성하여 관음전에 모셨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기 익히 알고 있듯이 의겸 스님은  숙종, 영조대에 경상도, 전라도에서활동한 당대 불화의 일인자이다. 스님의 주요 작품으로는 진주 청곡사 영산회괘불, 수월관음도,  안국사 영산회괘불,  개암사 영산회괘불, 해인사 영산회상도, 운흥사 괘불 등이 있다. 스님은  1730년에 운흥사 불사에 참여하여  운흥사 괘불  대웅전 삼세불화 관음보살도 삼장탱화 감로왕도를 그렸으며, 내원정사 관음보살좌상도  그때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대표적 금어인 스님이 불상을 조각한 일도 흔치 않은 사례로 전한다.

 

 

온화한 상호의 관음보살상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손을 걸치고 왼손은 무릎 뒤로 쭉 뻗어 육신을 지탱하듯 바닥을 짚고 있다(설마 왼손이 미완성은 아니겠죠?). 이러한 자세는 흔치 않으며 윤왕좌輪王坐라고 한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 어깨를 감싸고 있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군의 자락은 유려하며 매우 안정감이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관음보살좌상은 육화료 요사에 모셔져 있어 사전에 종무소의 허락을 받은 후 참배가 가능하다. 

 

 

201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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