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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무등산 원효사

임병기(선과) 2014. 3. 2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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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증심사. 약사사는 오래전에 순례하였지만 무엇때문에 원효사는 동선에서 제외 되었을까? 문화재 중심의 답사에 주안점을 두더라도 원효사는 결코 놓칠 코스는 아니었을텐데. 어쨓든 이제사 인연을 짓게 되었다. 어제와 달리 햍볕도 따스하여 주차장에서 부터 올라오는 길도 봄기운을 완상하기 좋았다.

 

 

부도전

 

비구니 스님의 부도? ㅎㅎ

 

 

원담화상부도

 

응담화상기념탑

사진...문화재청

 

입구 부도전을 거쳤지만 동부도는 놓쳐 문화재청 자료를 발췌했다. 팔각원당형 부도이나 기단부의 중대석이나 하대석에서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원래의 탑재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옥개석은 팔각으로 낙수면에는 기와골을, 처마에는 연목을 모각하였고, 우동에는 귀꽃 대신 용, 원숭이 등의 동물을 장식하였다. 각 탑신의 전면 하단에는 연화문을 조출하고 위로 위패 모양을 조식하였다. 기단부는 중, 하대로 이루어졌는데 원형의 상대석은 앙연대로서 단판 8엽에 앙연을 이중으로 돌렸다. 중대석은 8각이나 조각이 매우 화려하고 그 표현 기법 또한 특이하다. 하대석은 8각 복연대와 방형 지대석으로 구분되는 지대석 위에 4마리의 동물 장식을 복연대 4면에 맞도록 배치해 놓았다. 

 

 

 

원효사는 신라시대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1980년의 발굴조사 결과 신라 말기에 작은 암자로 창건되었고 그 뒤 고려 충숙왕 대(1314 ~ 1339)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의 제자이자 승병장으로 유명한 기허 영규(? ~ 1592)스님이 이곳에서 수도한 바 있다.  1597년(광해군 1)에 증심사를 중창한 석경스님이 중창하였다. 1636년(인조 16)에는 신원스님이 중수하였고 이듬해에 옥견스님이 32불을 조성 봉안하고 중수하였다. 1789년(정조 13)과 1802년(순조 2)에는 선방과 법당을 신축하였고 1831년(순조 31)에는 절을 재중수하고 단청불사를 하였으며 1847년(헌종 13)에는 칠성각을 신축하였다. 또한 함명 태선(824 ~ 1902)스님이 지은 〈무진주 무등산원효암중수상량문〉에 의하면 1894년 학산대사가 관청에 호소하여 100금의 재력을 시주받고 고을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사찰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1927년에 원담대사가 중수하였고, 1930년에 지응현·김게 부부가 칠성당과 시왕전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1938년에는 응담스님이 중수하였으며 1944년에는 김동성스님과 지응현이 석가탑, 관음탑을 조성하였다. 그후 한국전쟁으로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 1954년 대웅전을 복구하면서 초석밑에서 고려시대의 금동비로자나불상이 출토되어 봉안되었으나 1974년 도난당하였다. 1980년 법타스님에 의해 대웅전, 명부전, 요사 등의 전각이 세워졌다. 현재 현지스님이 부임한 후 1992년부터 성산각, 개산조당, 요사, 종각, 누각 등의 건물이 세워졌다.

 

근래에 8∼9세기의 해무리굽 청자 조각이 발견되어, 이 절의 창건연대를 높이는 단서가 되었으며,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파편들이 다수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무등산...정다산

 

모두가 우러러 보는 서석산
산의 정상에는 묵은 눈이 서렸구나

태초의 형태를 바꾸지않아
그냥 그대로 가파르게 헌걸차네

모든 산들은 섬세한 모습 자랑하나
깍이고 닳아서 뼈마디만 보여주네

오르려면 아득하여 길이 없더니
멀리 올라야 낮은곳을 알리라

 

대웅전

 

981년 신축된 전각이다.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삼존상과 불화로는 아미타후불탱,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육당 최남선의 춘순례(尋春巡禮)에 원효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법당과 범절이 당당한 일사一寺의 풍모를 갖췄다. 본존인 석가여래상이 거룩하시고 사자의 등에다 지운 대법고는 다른데서 못 보던 것이다. 법당 오른편에 있는 영자전에는 달마로부터 원효. 청허 내지 서월까지의 대탱을 걸고 따로 영조 50년 갑자(1774)에 담양 서봉사에서 모셔 온 원효 탱화를 걸었다. 나한전, 명부전, 선방, 칠성각 같은 것이 다 있고 불상도 볼만 하니 그래도 원효의 창사 이래 오랫동안 명찰이던 자취가 남아 있다.”

 

심춘순례에서 언급한 사자 대좌의 법고는 볼 수 없었고 영자전은 개산조당의 전신인 듯 보인다. 전각내의 원효 영정은 당시의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후불화로는 영산회상도가 걸려있다.

 

 

성산각. 다른 절집의 삼성각이다.

 

 

독성탱.칠성탱.산신탱

 

 

조선후기 석불. 칠성여래로 모신듯 보인다.

 

 

독성

 

일반적인 독성과 달리 승가대사 처럼 보이기도 한다.무릎위에 표범이 누워 있다. 호랑이를 동반한 산신과 달리 나반존자는 표범을 거느린 경우가 있다.

 

만수사 동종

 

용뉴에는 두 마리의 용이 배치되었는데 정상에는 불꽃에 싸인 여의주를 장식했다. 음통은 따로 만들지 않고 상판에 동그란 구멍을 뚫었다. 상대에는 동그라에 범자 ‘옴’을 새겼다. 유곽은 중간부분에 배치했으며 4개 유곽 사이에 보살입상을 조각하고 ‘주상삼전하主上三殿下’라는 명문을 새겼다. 아래에는 종의 조성과 관련된 명문이 양각되어 있고 하대부분에는 당좌와 하대는 생략하였다. 명문의 내용으로 보아 전라남도 담양 추월산 만수사萬壽寺라는 절에서 1710년(숙종 36)에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견 오층탑 부재로 보이나 옥개석 낙수면 물매와 층급받침의 치석 등을 보면 2개 석탑 부재가 혼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석등부재

 

 

 

무등산 주변 광주 화순 담양 사찰, 문화재는 거의 섭렵했지만 진작에 아직 무등산은 오르지 못했다. 빠른 시일내에 산행기회를 잡아 선인들이 노래한 그런 느낌을 향유하며 무등無等의 의미를 깨우치고 싶다. 그날이 언제일지...

 

201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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