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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국립 광주박물관 중흥사지 쌍사자석등 외

임병기(선과) 2014. 3. 19.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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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차례 방문에도 인연 짓지 못한 쌍사자 석등을 만나기위한 발걸음이었다. 처음에는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야외전시장에 만족했고 또 한 번은 휴관일이었었다. 입구에서부터 해설사가 상주해있었으나 민학기님의 유려한 설명으로 대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한층더 기쁨이 배가되었다. 본래부터 사진과는 친하지 않으니 이해하길 바라며 설명문은 박물관 자료를 발췌했다.

 

석등은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면 중흥산성 안의 옛 절터에 중흥산성 삼층석탑과 함께 있었다. 1932년에 조선총독부가 구입하여 경복궁 자경전 앞으로 옮겨간다. 1935년에는 보물 183호로 지정된다. 1960년에는 경무대 정원, 1960년에는 덕수궁 국립박물관 전시실, 1972년에는 경복궁 국립박물관 전시실,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다. 이후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한편, 쌍사자 석등과 함께 있었던 석탑도 일제강점기에 무너져 광복 이후에 복원되었다.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힘찬 모습으로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쌍사자석등이라고 부른다.  제일 아래는 8각 받침돌 위에 위 아래로 보는 8개의 연꽃잎으로 된 밑받침이 있다. 특히 위의 연꽃은 아래에 비해 작고 꽃잎이 마치 돌아가는 것처럼 조각되어 운동감이 느껴진다. 그 다음에 두 마리 사자로 이루어진 간주석 있다. 사자는 모두 갈기가 있는 숫 사자로 입과 꼬리 그리고 다리 부분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두마리 모두 숫사자?)

 

사진..한악어님

 

사자상은 위의 연꽃받침을 바치고 있다. 이러한 석등은 8각의 기둥을 대신하여 장고 모양의 고복형간주석과 함께 9세기에 등장한다. 기둥에 사자를 배치한 이유는 사자의 용맹성과 위용으로 불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도로 여겨진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상 받침대와 부도의 팔각받침대에도 사자가 등장한다. 또한 향로의 뚜껑, 손잡이 향로, 촛대 등 공양구에도 등장하는 등 사자장식이 유행한다.

 


사진...한악어님

 

8각 화사석과 지붕돌, 다시 그 위에 연꽃 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있다. 화사석 사각 테두리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칸막이를 고정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화사석과 지붕돌 그리고 보주를 결합식으로 만들어 틈 사이로 연기를 배출시켰다.

 

사진...한악어님

 

 

 

무술명청동범종

 

고흥 포두면 송산리 출토. 종신에 “戊戌正月初五日/□主前副戶/長公必棟梁/道人元明大匠信/仇十周愿入重五十/斤印造成也 三寶/ 戊戌正月初五日沙於鄕前副”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명문은 무술년 정월 초오일에 부호장 공필과 동량 도인 원명이 발원하고, 대장 신구가 50근의 구리로 만들어 부처님에게 받쳤다는 내용이다.

 

천판에 삼각형 모양의 꽃잎인 입상화문이 있어 고려후기 종으로 고리는 용의 발 부분을 음통에 바짝 붙여 간략화 하였다. 윗 띠에는 국화당초무늬가 아래 띠에는 보상화당초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으며 몸체에는 구슬무늬가 돌려진 당좌와 연꽃 위에 앉아 천의를 날린 보살상이 동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독특한 점은 유곽을 원형으로 돌리고 그곳에 32자의 범자를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연꽃방은 사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보기 드문 예이다. 제작시기인 무술은 고리의 조형성이 떨어지고, 보살무늬가 형식화되며, 틀을 벗어난 연꽃방의 표현 등으로 보아 1298년 작품으로 추정한다.

 

태안2년명 청동범종

 

여수시 쌍봉면 여산리 출토.  종신에 “長生寺 金鍾重五十斤/棟梁寺主□倡渼/京成□正春元施納/十六斤太安二年十二月日”라는 명문이 있다. 명문에는 주지 등이 발원하여 태안 2년(1086)에 장생사 금종을 만드는데 50근의 구리가 들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장생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이나 위치를 알 수 없다. 한편 위패형 명패에는 임금이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성수천장聖壽天長”이라는 글자가 있다.

 

음통은 대나무 마디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천판가장자리에는 연꽃무늬가 촘촘히 장식되어 있으며 유곽에는 구슬무늬를 사각으로 돌리고 그 안에 간략한 당초무늬를 표현하다. 아래에는 띠를 돌리고 풍성한 모란문양을 장식하였으며 종신의 빈 공간에는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는 비천상을 새겼다.

 

신룡동 오층석탑 사리기

 

1981년 신룡동 옛 절터에 남아있는 고려전기의 오층석탑  1층 탑신 사리공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사리갖춤은 직사각형 모양의 금동사리함과 병 모양의 금동사리그릇을 비롯하여 금동연꽃장식편과 풍경편, 소형 나무탑, 대나무 편 등 이다. 금동사리함 속에 연꽃장식을 넣고 그 위에 사리병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소형 나무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무구정경无坵淨經』에 의거 99기의 작은 탑을 넣는 전통을 따라 상징적으로 안치한 것으로 추정되며 대나무편은 다른 출토 예가 없어 정확한 의미가 전하지 않는다.

 

광주 서오층탑 사리기

 

광주광역시 서구 구동의 광주공원에는 ‘광주서오층석탑’으로 부르는 탑이 있으며, 주변에 ‘성거사’로 부르는 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석탑은 몸체의 줄어드는 비율이 적어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느낌을 주는 고려시대 전기의 석탑으로 보물 제 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리갖춤은 1961년 이 탑을 해체 보수할 때 2층 탑신에 있는 사리봉안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다.. 사리갖춤은 크게 2부분으로 분리되는 전각모양이다. 기단 위에는 네 모서리에 사천왕상을 세우고, 그 안에 여의두문이 투각된 난간을 두르고 있다. 중앙에는 금동 연꽃잎으로 자리를 마련하여 그곳에 사리 62과를 담은 은제 사리호를 놓았다. 뚜껑 역할을 하는 외부 사리장치는 4모형의 지붕에 4벽체를 두르고 있다.. 지붕의 모서리와 모서리 중앙에 금동으로 만든 작은 꽃을 배치하였고, 지붕 끝에는 풍경을 달았다. 이는 부처가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경전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네 벽에는 판으로 눌러 만든 보살상을 각각 배치하였다.

 

월출산 용암사지 3층탑 사리기

 

영암 월출산 구정봉에는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이 있고, 그 아래에 용암사 절터가 있다. 절터에 있던 3층 석탑이 무너져 있어 탑의 기단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방을 판자돌로 짠 감실이 발견되었으며 감실에는 백자항아리에 청자 뚜껑을 덮은 사리기가 깨져 흩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백자사리기 안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사리단지가 발견되었다. 사리단지 안에는 32과의 사리가 있었는데, 사리는 석탑에 다시 봉안하였다.

 

문헌에는 승주 조계산의 선암사,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 영암 월출산의 용암사 등은 비보지로 땅의 기운을 보충하거나 돋우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용암사지 석탑도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것으로 풍수도참설에 따라 부처의 힘으로 산천을 보호하기 위해 고려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장치는 고려후기에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후대에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넣은 것으로 추측한다..

 

금동지장보살좌상

 

금동지장보살좌상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오른 손은 아미타구품인의 손갖춤을 하고 있으며, 왼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대좌의 구슬장식과 연꽃받침 표현은 원나라의 라마계통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담양 서봉사지 나한상

 

담양 서봉사지에서 출토된 나한상으로두 백회 계통의 무른 돌로 만들어져 있다.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알려져 있다. 

 

 

 

사진...한학어님

 

201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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