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무주군

무주...적상산 안국사

임병기(선과) 2011. 8. 2.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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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호

 

굽이굽이 끝없이 길이 이어진다. 구절 양장이라고 했던가. 급경사로 인해 주위 풍광을 돌아볼 여유는 포기한지 오래이고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렇게 얼마나 올랐을까? 산정상에 철옹성 요새 처럼 석축이 가로 막는다. 뭘까? 사고지가 있었던 적성산성을 보수한 것일가? 어리석게도 산정상 적상호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잘난 중생의 유쾌한 착각이었다.

 

사진 한 장 박고 싶었지만 사진 촬영 금지 라는 안내문에 주눅이 들어 돌아서서 사고지에서 겨우 한장 잡았다. 북한과 극한 대립시절 중고교를 다니고 군사 정권 통치시설 국가 주요시설 사진 촬영은 이적행위에 버금가는 범죄로 교육받은 잔재가 아직 뇌리에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현재의 도로는 안국사 진입로로 건설된 것이 아니라 무주양수댐 건설을 위해 조성한 도로로 첩첩산중 천연의 요새에 위치한 안국사에 신작로가 개설된 듯하다. 적상赤裳? "동국여지승람의 무주 산천편에는 그 이름을 ‘상산(裳山)’이라 하여 “사면으로 곧추선 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깎이어 마치 치마를 두른 것 같아 이름 하나니, 옛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사서 성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애로틱한 연상을 한 속물인간의 본성이 여지없이 탄로나 버렸다.

 

 

일주문 못미쳐 적상호반을 바라보며 사고지가 먼저 반긴다. 적상산사고: 아래 내용은 무주군청 홈페이지 자료이다.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이 약 300년 간 무사히 보관됐던 적상산 사고지가 역사 학습장으로 많은 관광객들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전시관은 <조선왕조실록> 복본 34권(왕조별로 1권씩 27권, 무주에 관한 기록 7권)과 왕실 족보인 <선원록> 복본 5권을 제작해 비치했다.

 

또 실록 제작·편찬 과정 및 옮기는 과정 등을 담은 22종의 전시패널을 설치되어 있으며 무주군관광해설사가 관람객에게 적상산사고의 역사적 가치와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알기 쉽게 해설을 하고 있어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에게 꼭 가볼만한 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다.임진왜란전 평지에 있던 4대 사고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전주사고의 실록을 임진왜란 이후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마니산등 5대 사고를 설치하여 각각 실록을 보관했다. 당시 북방 침입으로 인해 묘향산사고의 실록이 보관에 어려움이 있자 무주의 적상산에 실록전을 세우고, 1634년 묘향산의 실록을 옮겼다.

 

그후 1910년대에 일제에 의해 사고가 폐지되자 적상산의 실록은 왕실 규장각으로 옮겨 보관해오다가. 6·25 때 북한으로 반출됐으며 김일성 종합대학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1992년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사고지가 수몰되자 사고 건물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고, 전라북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돼 있다.

 

운영시간 :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단, 6월~8월 금, 토, 일만)
           9월~11월15일까지는 상시운영
문의전화 : 063-324-2114(무주군관광안내소)

 

 

적상산 사고를 지나 건너편 부도전이 있다. 부도전 안내문은 보이지 않고 아랫마을 가는 길 이정표가 서 있었다. 그때문에 진입하면서는 스쳐지났고 안국사에서 보살님의 안내로 돌아오는 길에 들렸다. 부도밭에는 청운당ㆍ월인당ㆍ보운당 등 조선조 석종형 부도 4기가 남아 있다.

 

청운당 부도는 2기가 있다. 맨왼쪽 부도는 '청운당사리탑(淸雲堂舍利塔)'이라는 명문을 가진 부도로, 탑신 위에 연목과 기와골이 모각된 팔각원당형의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뒷면에는 '강희오십육년(康熙五十六年)'이라는 음각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부도가 1717년(숙종 43)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좌로부터)청운당.보운당.월인당.청운당 부도

 

오른쪽에 있는 부도에는 '청운당인명봉골탑(淸雲堂印明奉骨塔)'이라는 탑명이 새겨져 있다. 장방형의 대좌 위에 석종의 탑신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대좌에는 원형의 연화문이 돋을새김되었고, 탑신 윗부분에 여의두문의 보륜을 장엄하였다. 월인당 부도 역시 석종형 부도로 탑신에 '월인당대사영골탑(月印堂大師?骨塔)'이라는 탑명이 있다. 탑신 위로 연화보주가 우뚝 솟아 있다. 뒷면에는 월인당의 행장을 알 수 있는 '속성김해김씨(俗姓金海金氏)', '경오년칠월일조성(庚午年七月日造成)'이라는 글이 남아 있다. '보운당사정탑(寶雲堂思正塔)'이라는 명문을 가진 이 부도는 '건륭십팔계유(乾隆十八癸酉)'라는 명문을 통해 1753년(영조 29)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적상산 사고터에서 굽이돌아 오르는 안국사의 초입. 일주문이 반긴다.일주문 역시 무주 양수댐 건설로 인하여 이건했을 것이다. 일주문 정면에는 1992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적상산 안국사(赤裳山 安國寺)’라는 편액과 뒷편에는 1995년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국중제일정토도장(國中第一淨土道場)’이라는 2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적상산성

 

일주문을 지나 왼쪽 산아래로 내려가면 적성산성 담장이 남아 있다. 적상산성은 고려 말인 1347년에 최영장군이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를 정벌한 후 서울로 돌아오다가 적상산의 산세에 감탄하여 산성을 쌓도록 한 곳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사고가 건립되면서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세워 산성을 보강하였으며, 현재 사적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길이 8,143㎞로 안국사와 사고를 중심으로 그 유구를 찾아볼 수 있으며, 현재 1m의 높이로 자연석을 쌓아 올린 자연석축의 모습이다.

 

호국사 비각

 

호국사비에는 인조 21년(1643) 이조판서겸 대제학인 이식이 왕명으로 사고를 순찰하고, 정축란 이후 문란해진 사고의 관리와 성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왕에게 진상하여 1645년 호국사를 창건하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마모가 심해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비문은 적상산성과 관계되는 기록들, 사고지 설치, 사고지 방비의 허술함, 호국사 창건 경위 등을 담고 있다. 특히 호국사 창건비용은 전라감사의 봉급에서 충당하고, 승장이 사역을 맡았으며, 무주현감이 물자의 조달과 감독을 맡았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호국사는 본래 적상산성 안에 있는 사고의 수호를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1910년 경술국치로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나라의 국사를 보존한 호국의 도량이었는데, 1949년 여순사건의 병화로 소실되는 불행을 당하였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 이수. 직사각형 모양을 한 비석의 받침돌로 사면에 안상을 배치하고, 좌우에 구름모양의 무늬를 조각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여의두문을 조각하여 돌출시켰으며, 상두면은 복연을 새겨서 장식하였다.

 

여의두문

 

받침돌 안상

 

청하루. 호국사터에 복원하면서 루대 정면을 지나치게 경사지게 계단을 설치한 느낌이다. 산지 사찰에서 루대는 누하 진입 보다는 우회 진입공간이 대부분이다. 루대 본래 기능 외에 청하루 내부에는 ‘석실비장(石室秘藏)’ㆍ‘청하루(淸霞樓)’ㆍ‘극락전(極樂殿)’ㆍ‘산신각(山神閣)’ 등 수몰되기 전 안국사에 있던 현판들이 걸려 있다고 했지만 미쳐 확인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더군다나 열쇠를 가진 보살님이 직접 오셔서 성보박물관 문도 열어주었는데. 나의 인연이 여기 까지인 것을...

 

청하루

 

1995년 무주 양수발전소의 완공으로 수몰될 처지에 놓이게 되어, 1991년부터 주지 원행 스님이 여순사건 때 전소된 호국사의 옛 터로 옮겨와 가람을 순차적으로 복원하였다. 안국사를 비롯 조선시대 사찰명에 국國자가 들어가는 사찰은 왕실 원당 또는 호국 사찰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안국사 역시 사고에서 유래된 절집이었을 것이다.

 

"옛 무주읍지인 『적성지(赤城誌)』 「적상산안국사기(赤裳山安國寺記)」에는 1277년(충렬왕 3) 월인(月印) 스님이 안국사를 창건한 후, 조선 초기 이태조가 무학대사(無學大師)로 하여금 적상산의 견고하고 험준함을 생각하여 성을 쌓고 절을 중건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성 안에는 고경사(高境寺)를 비롯하여 상원사(上元寺)ㆍ중원사(中元寺) 등 여러 절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중건 당시에는 적성산성의 수호사찰로 건립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1864년(고종 1)에 지은 「안국사중수기(安國寺重修記)」 현판에 “나라에서 선사 양각(璿史兩閣)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계보를 비장(秘藏)하고 승병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인 것과 이 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다. 안국사라고 이름한 것은 비록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큰일을 하는 절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어, 사찰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중건 이후 조선중기까지 절이 계속 유지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614년(광해군 6) 적상산성 내에 사고(史庫)를 설치한 후 덕웅(德雄) 스님이 승병 92명을 모집하여 산성을 중수하고 사고를 지켰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이를 지킬 사람이 없어 상훈(尙訓) 스님이 사고의 책을 안렴대의 석굴로 옮겨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봉안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1614년 사고가 설치되어 4년 뒤 묘향산의 실록을 옮겨 온 이래 1910년 장서들이 서울의 규장각으로 옮겨질 때까지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은 우리나라 유일의 사고로, 안국사는 이러한 사고 수호사찰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1728년에 영산괘불, 1758년에 감로탱, 1772년에 극락전 후불탱 등을 조성하여 18세기 이후 대규모의 불화 조성과 함께 범종 등의 불전장엄구가 갖추어지지는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864년에는 적상산 사고를 방문한 이면광의 건의로 안국사를 중수하고, 1872년(고종 9)에는 사고의 실록전과 선원각이 개수되었으며, 1902년에는 사고와 함께 안국사의 대대적인 중수와 개수가 이루어졌다. 19세기 말 안국사는 가람이 정비되어 무주의 큰절로서 자리매김하였으며, 1910년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과 산신각이 배치되고, 그 앞으로 청하루, 승방을 구성하였다.

 

이후 1910년 적상산 사고의 장서가 서울 규장각으로 옮겨감으로써 사고의 건물이 퇴락하자, 당지 주지인 이철허(李澈虛) 스님이 선원각의 건물을 경내로 옮겼으며, 근래에는 1968년 유정환 스님이 선원각을 천불전으로 개수하고 퇴락한 청하루를 해체하여, 경내에 극락전ㆍ천불전ㆍ산신각ㆍ요사로 구성되는 소규모 가람을 이룩하였다."

 

 

요사에 걸린 현판. 거암 김봉관의 글씨로 무주지역 주요 사찰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안국사 금당 극락전. 정면 측면 각 3칸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협칸은 두 짝의 문을 단 이분합이고 어칸은 사분합이며 .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동귀틀이 자연의 곡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정감이 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초기에는 맞배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범종각 동종. 1788년(정조 12)에 조성된 동종이다. 안국사 동종은 높이 85㎝, 구경 78㎝의 대형 종으로 어깨에 범자(梵字)가 둘러져 있으며, 4개의 유곽과 종신에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한국동란의 전화로 용뉴는 결실되었으나 종신에 ‘乾隆五十三年戊申三月日赤裳山安國寺大鍾’이라는 명문과 ‘改鑄重’이라는 시주질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18세기 후반 조선 종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극락전 한쪽 모서리는 어떤 이유인지 단청을 하다 멈춘 자리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학대사(鶴大師)에 관한 전설이 전한다. 이런 전설은 우리나라 많은 사찰에 구전되어 오는 유형이다.

 

"안국사의 주 법당으로 극락전을 지은 스님이 단청불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제가 지금부터 100일 동안 단청을 할 테니 극락전에 하얀 막을 치고 물 한 그릇만 넣어 주되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범상치 않은 노인을 말을 깊이 새기며 궁금증을 억누른 채 노인에게 단청불사를 맡긴 채 무사히 끝나기를 부처님께 기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구름이 걷히고 단풍이 떨어질 무렵의 어느 날, 스님은 천막 속의 단청불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단청이 시작된 지 99일째 되던 날 그 호기심은 극에 달하여, 하루를 참지 못하고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붓을 입에 문 흰 학이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눈치 챈 학은 완성하지 못한 단청 일을 남겨 놓은 채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인지 안국사 극락전의 뒤편 한쪽에는 딱 하루거리에 해당하는 분량의 목재가 단청이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나뭇결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온통 학이 노닐었다’고 할 만큼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안국사 극락전삼존불.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있다. 불상의 조성기록은 없으나, 고개 숙인 자세에 굵고 짧은 목, 장방형의 얼굴에 오뚝한 코, 자연스런 천의의 옷주름, 사실적인 손표현 등에서 17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보인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고개를 숙여 움츠린 듯한 어깨에 구부정한 자세를 보이며 장방형의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원만한 상호를 가지고 있다. 얼굴은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가진 나발에 턱이 짧아지고 각이 진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오뚝한 코에 삼도가 표현된 짧은 목을 지니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의로 자연스런 옷주름과 사실적인 손표현에서 아미타불의 원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좌협시인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흡사한 모습으로 짧은 상투 속에 보관을 착용하였으며, 보관 아래쪽으로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흘러내리고 있어 보살의 오묘함이 느껴진다. 우협시인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칭적인 구도로 조각수법에 있어 아미타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닮고 있다. 관음과 세지보살은 아미타불상과 함께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괘불탱을 볼 수 없어 요사 공양주 보살님에게 여주었더니 안국사에 거주하며 설명과 찻집을 운영하는 듯한 젊은 보살님이 나오셔서 박물관을 개방하며 부도전 위치도 상세히 안내해주고는 즐겁게 감사하라며 다시 요사로 발길 돌린다.

 

안국사 박물관으로 1998년 사월 초파일에 개관하였다. 세계각국 부처님과 불교유물을 수집, 전시하여 덕유산 국립공원 적상산 지구를 찾는 탐방객들과 청소년들에게 우리 문화와 세계각국의 불교문화를 비교 관람할 수 있도록 한국, 중국, 일본, 티벳, 태국, 미얀마를 비롯하여 세계 20여 개국 불교국가의 불상과 탱화, 그리고 불교 유물 및 도자기 등 500여점 이상을 항시 전시하고 있다

 

 

괘불탱은 모사본이며 진본은 극락전 괘불함에 보관 되어 있다고 한다. 여수 흥국사. 진주 청곡사 처럼 지하공간을 확보하여 2층으로 건축하였으면 괘불을 항시 전시가능하였을텐데 아쉽다. 괘불은 야단법석, 사찰의 주요 법회, 초파일등 종교적 행사 뿐만 아니라 여러 사찰에서는 극심한 가뭄에 기우제를 올릴 때 걸기도 한다.

 

"괘불은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로 길이 10.75m, 폭 7.01m나 되는 대형불화이며 재질은 마본이다.중앙에 크게 묘사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며 좌측에는 극락도사 아미타불과 협시인 관음대세지보살, 우측에는 증청묘법 다보여래와 협시인 문수보현대보살을 횡렬로 배치하였다. 본존인 석가모니불은 둥글고 큼직한 얼굴에 우람한 신체, 유난히 길게 늘어진 팔 등 상체에 비하여 하체가 짧아 단구적인 무게감을 주고 있다.

 

특히 녹색으로 구분된 분소의는 기본적으로 편단우견 착의법이나 오른쪽 어깨를 덮은 착의법을 걸치고 있으며, 방형의 구획선과 대의의 가장자리는 운문과 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좌우측에 묘사된 존상들은 채운을 배경으로 천상의모습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본존 두광 좌우에 묘사된 공양물을 받쳐 든 천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불화는 녹색과 밝은 홍색을 중심으로 회색, 황색, 분홍 등 중간 색조가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고, 연화문, 모란, 변형된 여러가지 꽃무늬와 도안화된 문양들이 조화를 이루며 영축산에서의 설법을 아름답게 이끌고있다. 대의를 분소의처럼 구분한 것은 이 괘불 이외에도 의겸이 참여한 내소사 괘불, 개암사 괘불 등에도 보이며, 이 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화엄사 괘불, 다보사 괘불 등 18세기 괘불탱에 많이 보이는 특징이다.

안국사 괘불은 영조 4년(1728)에 조성되었는데, 그 후 1792년, 1809년, 1939년 등 조성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이 괘불을 그린 화사는 1750년 전후 경남고성 운흥사를 중심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활약한 의겸이다. 그는 내소사괘불(1700년), 안정사괘불(1702년), 운흥사괘불(1749년), 청곡사괘불(1722년) 등 대형괘불 등에 참여한 당대 저명한 불화승이다. 

주상전하(主上殿下) 만세만세 성수만세(萬歲萬歲 聖壽萬歲) 주비전하(主妃殿下) 제년제년 성수제년(齊年齊年 聖壽齊年)
세자저하(世子低下) 천추천추 성수천추(千秋千秋 聖壽千秋) 라는 발원문이 있다."

 

 

성보박물관 내부

 

 

안국사는 가을날이 최고라고 하지만 이른 아침 나홀로 순례의 맛도 그만이다. 표현력 부족이 오히려 다행이라면 믿을려나?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다시 또 나혼자 길 위에 서겠지 아마??? 구름위 별천지 같은 안국사가 번창하면 나라가 번창하고, 안국사가 쇠하면 나라가 쇠한다는 무학대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세세만년 사격과 더불어 사세가 커졌으면 좋을 것이다.

 

 

가을의 赤裳山...김선옥


 

온 산에 불이 붙어 맹렬히

 

타오르고 있다

 

사방으로 번져가는 불길

 

산 바위도 

 

툭툭 소리 내며 열을 뿜는다

 

솔가지로 불 끄는 여인네

 

치마에 불이 옮겨 붙어

 

흰 살결이 빨갛게 그을렸다

 

최영장군이 쌓은 적상 산성도

 

월인 화상이 세운 안국사도

 

광해군 때 지은 史庫址도

 

최근 양수발전을 위해 만든

 

850m 높이의 산정 호수도

 

무서운 불길 속에 휩싸였다

 

빨갛고 노랗다 못해 푸르다

 

적상산은 그예 가슴 쥐어짜

 

긴 한숨을 토해낸다

 

갈바람이 덕유산 향로봉까지

 

화염을 몰아 치닫는다

 

2011.07.25

 

***참고자료:전통사찰관광정보.문화재청.무주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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