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대구...대구 향교

임병기(선과) 2013. 9. 19.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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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향교 외삼문

 

중구 남산동 735-4번지 대구향교. 태조 7년(1398) 지금의 교동에 창건된 후 정종 2년(1400)에 소실되었으나 곧 재건되었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그후 선조 32년(1599) 달성공원 근처에 이건되었고 선조 34년 선조 34년(1601) 중건되었으나, 선조 38년(1605) 다시 교동으로 이건되어 명륜당 등을 복원하였다(향교 홈페이지에는 달성공원의 위치가 사갈지조라고 설명되어 있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갈불상지조蛇蝎不祥之兆 즉 뱀과 전갈은 상극으로 풍수지리상 길지가 아니라는 의미 같다). 일제강점기 1932년에 도시 확장, 유림의 집회, 항일운동을 원천 봉쇄하기 위하여 또 다시 현위치에 옮겨지게 되었다.

 

대구향교는 일반적인 향교의 전형인 전학후묘 배치에 벗어난 일자형 구조로 우묘좌학 배치이다. 이러한 구조는 청도 화양향교, 성주 향교에도 보인다. 성주 향교는 위계를 구분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성전을 뒤쪽에 두었고, 대구 향교와 화양향교는 높이에 차이를 둔 배치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내,외삼문, 명륜당 동서재, 대성전과 동서무, 낙육재, 양사재, 유림회관등의 부속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하여 방문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향교 배치도

 

명륜당

 

외삼문을 통과하면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진입방향 우측에 자리한다. 좌우에는 동.서재를 두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4년 중건한 콘크리트벽체에 기와로 지붕을 올렸다.

 

 

동.서재 , 1932년 교동에서 이건시 복원되지 않고 있다가 1990년 낙육재와 함께 건립되었다.

 

 

공자상. 대구의 자매 도시 중국 청도시에서 기증한 백옥으로 만든 공자상이다. 1997년 10월 달구벌 축제 기간중에  축하사절로 20여명의 예술단을 파견하면서 당시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동소문. 대성전과 명륜당을 연결하는 문이다.

 

 

내삼문

 

명륜당 담장의 동소문을 출입하지 않고 이곳으로 답사 동선을 유도하는 안내문이 아쉬웠다.

 

 

내삼문 앞의 넓은 마당은 익숙하지 않다. 향교 본래의 목적 보다는 시민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도록 조성한 도심 휴식공간 느낌이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세태의 반영이라고 수긍할련다.

 

 

향교목으로는 아직 젊은(?) 은행나무

 

대성전

 

년 2회 춘추(2월,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대제를 배향한다. 좌우로 동서무가 배치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공자를 정위에 모시고 사성(안자, 증자, 자사, 맹자)을 배향하고 동종과 서종에는 송조 이현(회암 주희, 명도 정호), 신라조 이현(고운 최치원,빙설재 설총), 고려조 이현(회헌 안향, 포은 정몽주), 조선조 십사현(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회재 이언적, 정암 조광조,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우계 성혼, 율곡 이이,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현석 박세채,동춘당 송준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배롱이 절정이었다.

 

 

정.측면 3칸 겹처마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성전 주초석

 

예전 방문시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어느 절집 중정에 있었던 4단 층급의 석탑 옥개석이었을까? 더욱 화가 치민 것은 모서리의 우아했을 반전을 무자비하게 절단한 작태이었다.

 

 

관세위? 헌관이 대성전에 들어가기전 손을 씻는 곳으로 일반적으로 계단 동쪽 아래에 자리한다.

 

 

망료위? 제향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망예위라고도 한다. 도동서원 담장에 설치된 '차'와 같은 용도일 것이다.

 

낙육재樂育齋

 

명륜당과 맞보고 있는 영남낙육재 1721년 대구에 설립된 관립도서관의 효시로서 많은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학문연구에 큰 공적을 남긴 곳이다. 경종 원년(1721년) 경상감사 조태억이 인재양성과 문풍진흥을 목적으로 당시 대구부 남문밖(현재 대구시 남문동 문우관(현 남산동 문우관에서 동산양말공업사 일대)에서 설립되었는데 이곳에서 경상도내의 유능한 선비들을 선발하여 기숙시켜가며 독서 및 학문 연구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지방제도의 재편과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어 모든 학교의 운영이 방해받자 낙육재를 폐쇄하고 협성학교(경북고 전신)를 설립하였다. 소장되었던 장서 764책은 대구시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다.낙육재는 독서, 시, 부의 제술연학 등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향교의 주요기능인 문묘나 사묘는 치루지 않았다. 해방이후 낙육재를 복원하기 위하여 대구시 보조금 및 대구향교재단 자체 자금으로 1990년 10월 7일 대구향교 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사재養士齋

 

본래 위치는 교동이며, 영조 재위시절(1766년)에 판관 김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1767년 관찰사 김응순이 기문을 쓰고, 1768년 판관 김노도 기문을 썼다. 매년 춘추로 향교의 유생들을 선발하여 기숙케 하고 강학하였으며 향시를 치를시는 과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1991년 향교내에 2층 건물로 복원하였으며 윗층은 대구향교 여성유도회 여성예학연구원으로, 하층은 향교 서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상지 五常池

 

향교에 어울리는 조경이다. 인의예지신 오상과 상스런 백일홍 그리고 군자를 상징하는 연지로 조성한 듯 보인다.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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