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대구...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李公堤碑 및 郡守李侯範善永世不忘碑)

임병기(선과) 2013. 9. 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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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구 상동 신천우안도로 상동교 옆 이서 공원내에 위치한다. 이공제李公堤는 제방명칭이며 영세불망비와 함께 비각에 보호되어 있다. 이공제는 송나라 소식이 항주지사로 있을 때 축조한 제방을 소공제로 이름지은 것을 본따서 명명하였다고 한다.

 

 

 

 

문화재청 자료를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최근 이서 이전부터 신천은 존재했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 되고 있다.

"왼쪽에 있는 것은 이공제비로, 대구판관을 지낸 이서 선생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대구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당시 대구는 하천이 중심부로 흘러 홍수 때마다 큰 피해를 당하였었다. 조선 정조 즉위년(1776) 대구판관으로 부임해온 이서 선생은 주민들의 어려움을 알고 1778년 자신의 재산을 털어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리게 하였다. 홍수의 피해에서 벗어난 주민들은 물길을 돌려 새로 만든 냇물을 ‘신천 ’이라 부르고, 제방의 명칭도 ‘이공제 ’라 한 후 정조 21년(1797)에 이 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자 하였다. 원래 수성교 서쪽 제방에 있던 것을,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겼다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운데에 있는 비는 옆의 이공제비가 초라하여 그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는 의미로 순조 5년(1805)에 다시 세운 것이다.

오른쪽에 서 있는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는 광무 3년(1899)에 세운 비로, 고종 때 대구수령으로 있던 이범선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1898년 큰 홍수가 일어나 이공제의 하류부분이 파손되어 대구읍성이 위험하게 되자, 이범선은 민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빠른 기간에 보수공사를 완성하여 주민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이에 보답하고자 광무 3년(1899) 이곳 주민들이 비를 세워 이공제비와 함께 보호하고 있다.

3기 모두 대구지방 수령을 지냈던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자 주민들이 나서서 세운 것으로, 이들이 오늘날의 대구를 이루게 한 사람들이라는데 큰 의의를 지닌다. "

 

최초의 이공제비

 

근자에 회자되고 있는 신천 물길과 관련 영남일보 정혜진 기자의 글으로 보자.

 

"신천 물길은 예전과 그대로이며, 18세기 이서공(公)에 의해 물길이 돌려져 지금의 신천이라는 이름이 유래됐다는 대구시의 설명은 잘못된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이서공이 제방을 쌓음으로써 물 피해를 막았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신천 본류의 피해를 줄이는 정도였는지, 아니면 신천의 큰 지류를 본류로 합류시키는 규모였는지에 대한 고증이 더 필요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대구시에서는 이서공에 의해 신천 물길이 돌려졌고 이에 따라 '새내'라는 뜻으로 '신천'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명을 수년 동안 인터넷과 이공제비(대구시 유형문화재 23호) 등 문화재 안내에 정확한 고증없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천의 물길은 예전과 그대로라는 새로운 주장에 대한 보도(영남일보 1월25일자 27면 보도) 이후 학계 등에서 고문서를 확인한 결과 신천이라는 용어는 16세기 문헌에도 나오며 위치 또한 현재 위치와 같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26권 대구 도호부편에는 신천을 '부(府: 대구부를 뜻함)에서 동으로 4리에 있다. 팔조령에서 나와 금호로 들어간다'고 기록돼 있어 16세기 당시 신천의 물길이 지금과 일치한다. 영조 때 만들어진 대구읍지(1767~1768)에도 신천을 '부의 동쪽으로 4리 쯤에 있다. 한 근원은 팔조령에서 나오고 또 한 근원은 최정산에서 나온다. 사방산(四方山) 앞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으로 들어간다'고 돼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신천이 용두산에서 나와 수도산과 반월당쪽으로 흘렀다면 부의 남쪽이나 서쪽이 되어야 하고 거리도 전혀 맞지 않는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등 15세기 이후 일관되게 서술된 신천에 대한 기록은 일제시대 이후 달라졌다. 1924년 판 대구읍지에서는 영조 때 대구읍지와는 달리 '과거에는 이(신천) 물길이 부의 서쪽에 있었는데 매년 홍수피해가 생겨 판관 이서가 동쪽으로 돌렸다'는 내용이 나오며, 37년 일본어로 발간된 대구독본(大邱讀本)에도 '이공비'를 설명하면서 같은 내용이 서술돼 있다. 따라서 그동안 알려진 신천의 역사는 고문헌에 대한 정확한 고증없이 일제시대 출판물만 보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97년 대구시 문화예술과에서 발간한 '대구문화재'의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공의) 치수사업으로 용두산~수도산~반월당~동산(신명여고 앞)~달성공원 앞을 지나 금호강으로 흘렀던 물길이 오늘날의 흐름 방향으로 바뀌고'라고 돼 있다. 이에 근거해 현재 수성구 상동 이서공원에 있는 이공제비 설명문이 동일하게 틀린 내용으로 '대구광역시장'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대구시사 편찬위원으로도 활동한 한 학자는 "신천 본류는 15~16세기 기록에도 나오듯 그대로이나 지류가 시대에 따라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서공에 의해 물길이 돌려진 후 새내라는 뜻으로 신천이라고 불렀다는 그동안의 주장이 그럴 듯하게 들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별 의심없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시 문화재위원으로도 활동한 윤용진 교수는 "일제시대 자료를 분석하니 용두산에서 반월당으로 흘러 달성공원 앞을 지나간 물은 신천이 아니라 지금의 이천천으로 합류된 전혀 다른 물길"이라고 말했다.

향토사학자 손필헌씨는 "고문헌에도 신천이라는 말이 나와 이서에 의해 신천이라는 말이 유래됐다는 말에 항상 의문을 갖고 있었다"면서 "정확한 고증을 통해 밝혀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서공의 후손인 덕수이씨 대구종친회 대표를 맡고 있는 이종학씨는 "어느 쪽이든 사재를 털어 홍수를 막아낸 이서공의 공적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며 "어느쪽이든 이서공의 공적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순조조에 재건립한 이공제비

 

 

 

군수이후범선영불망비

 

 

 

 

 

4대강 사업을 치적으로 삼으려던 전직 대통령의 요즘 심사는 어떨까? 퇴임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국토부, 감사원 까지 가세하여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있으니 말이다. 백년하청, 치수. 모두 공직자의 덕목일진데 사재를 털어 제방을 쌓은 판관 이서같은 공직자를 이제는 기대하기 어려울까?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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