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천안시

천안...봉선 홍경사 갈기비

임병기(선과) 2013. 2. 27. 21:04
300x250
300x250

 

 

성환을 거쳐 평택으로 향하는 국도변 국보 7호 봉선 봉경사 갈기비. 한문으로 풀지 않고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봉선奉先- 선대를 받든다. 홍경사弘慶寺. 갈기비碣記碑. 즉 선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건립한 홍경사의 비석을 뜻한다. 답사 매니아들은 익히 알겠지만 비碑는 비신 상부가 방형, 碣은 모죽임하여 둥근형태로 구분한다. 이비석은 이수가 있어 구분이 모호하다.

 

비신 내용에 따르면 1000년전 이곳은 삼남에서 수도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그런데도 도적이 창궐하여 행인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여 고려 안종이 홍경사를 창건하였으나 회향하지 못하고 승하하여 그의 아들 현종이 선왕의 뜻을 이어 현종 12년(1021) 세웠다고 한다. 아울러 절 옆에 객관 '광련통화원'을 건립하여 행인들의 휴식과 숙박을 용이하게 하였다.(돌베개,답사여행의 길잡이에는 현종 7년 건립하여 현종 12년에 준공으로 기록되어 문화재청 자료와 차이가 있다)

 

 

이규보의 동문선에 언급된 그 탑의 탑재 일 것이다.  "200여칸 당우에 공덕상을 그리고 봉선 홍경사 사액을 받았다. 도솔천과 같이 신비롭고 종과 탑이 있었다"

 

 

지대석 각면석에는 안상이 네개가 선명하다. 탐신에는 탱주가 생략되고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 물매는 깊고 층급은 3단이다. 홍경사 창건시에 조성된 석탑으로 보아도 무방한 탑이다.

 

 

 홍경사를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건립된 비로 알려져 있다.

 

 

비신에는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라 횡서橫書하였으며 비문은 해서체로 각자刻字하였는데 최충崔沖이 찬撰하였고 백현례白玄禮의 서書로 되어 있다. 비를 세운 연대는 비문 끝에 「성상어유지십팔재대평기역지제육년하사월 일근기聖上御유之十八載大平紀曆之第六年夏四月 日謹記」라고 적혀 있다.

 

"최충. 984(성종 3)~ 1068(문종 22). 9재학당을 세워 유학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문교의 진흥과 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칭송되었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아버지는 주(州) 향리인 온(溫)이다. 1005년(목종 8)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 七代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그뒤 우보궐(右輔闕)·한림학사(翰林學士)·예부시랑(禮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의 육정육사(六正六邪)와 한(漢)나라의 자사육조(刺史六條)를 각 관청에 써 붙이게 했다. 이어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를 지내고, 1037년(정종 3) 참지정사 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가 되어 〈현종실록〉을 편찬했다. 1041년 왕명을 받아 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使)로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 등 14곳에 성채를 쌓고 돌아왔다. 1047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율령(律令)과 서산(書算)을 고정(考定)했다.

 

1050년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되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해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가 되어 농번기의 공역(工役) 및 국가재정의 낭비를 금하도록 상소하여 시행하게 했고,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하여 국방경계를 강화하도록 했다. 1053년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 훈위를 받았다. 1055년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했다.

 

당시 고려사회는 현종대를 거치면서 거란의 침입과 숭불정책으로 유학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고 관학인 국자감의 교육은 부진한 상태였다. 이에 최충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유학의 보급과 유교적 지식에 밝은 관리의 양성을 목적으로 사숙(私塾)을 개설했다. 교사(校舍)를 송악산(松岳山) 아래 자하동(紫霞洞)에 마련하고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의 9재(九齋)로 나누어 9경(九經:〈周易〉·〈尙書〉·〈毛詩〉·〈儀禮〉·〈周禮〉·〈禮記〉·〈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과 3사(三史:〈史記〉·〈漢書〉·〈後漢書〉)를 중심으로 하고 시부(詩賦)와 사장(詞章)도 가르쳤다. 매년 여름철에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방 등을 빌려, 학생 가운데 과거에 급제했으면서도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교도(敎導)로 삼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때때로 관료나 학자가 찾아오면 학생들과 더불어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하여 초에 금을 긋고 시를 지어 그 성적을 발표하고 소작(小酌)을 베풀었는데, 진퇴(進退)의 절도와 장유(長幼)의 질서가 분명하여 종일토록 수창(酬唱)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최충의 명망과 법도를 갖춘 교육 때문에 과거급제를 목표로 하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9재학당은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곳의 학생은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 불렸다. 뒤에는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렸다. 다른 저명한 유학자들도 문헌공도를 모방하여 11개의 사학을 개설, 문헌공도를 포함하여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를 이루었다. 정종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백현례白玄禮.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서예가. 본관과 자·호를 비롯하여 출신배경 등이 알려져 있지 않다.벼슬은 종6품 봉의랑(奉議郎)·국자감승(國子監丞)을 지냈으며, 1026년(현종 17)에 왕명으로 창건된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의 개창비문(開創碑文)을 썼다.이 비의 글씨에 대하여 이조묵(李祖默)과 오경석(吳慶錫)은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와 비슷하고, 서법이 매우 힘차서 대각국사비와 비견되는 의의를 지닌다고 평한 바 있다. 현재 전하는 유작은 없다." ..다음에서 발췌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돌린 귀부

 

2013.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