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이거사지 석탑재, 비로자나불좌상

임병기(선과) 2013. 2. 16.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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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주 골목길순례는 아직 찾지 못했던 이거사지 석탑재와 비로자나불좌상 그리고 옥정암마애불을 만날 목적으로 준비했었다. 답사 몇일전 하늘사랑님의 글과 사진이 올라와 일각이여삼추 같은 심정으로 주말을 기다렸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사지총람에 의하면 이거사는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성덕왕 1년 조와 삼국유사 권3 탑상 유덕사조에 사명이 언급되어 있다. 그외에 자세한 내역은 없으며  조선후기 동경잡기에도 사명이 언급되어 있다." 이 절터를 이거사지로 추정하는 까닭은 <삼국사기> 에 성덕왕 사후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현재 이곳 남쪽에 성덕왕릉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거사지를 일전에 답사한 경험이 있는 이상령님의 안내로 망설임 없이 일사천리로 절터에 닿았다. 텅빈 절터였지만 거의 완형의 석탑 하기단이 순례객의 마음을 뛰게 한다. 4개 부재로 조성한 기단 면석에는 양우주와 탱주 2개를 모각하였고 상부에는 호각형의 2단 상기단 면석을 표현하였다. 조성시기는 상기단 면석의 탱주 2개로도 추측이 가능하며, 또한 성덕왕 재위기간 702~737년을 고려한다면 8세기 초 이전의 석탑으로 생각된다.

 

 

탑신석에는 양우주가 보이고  옥개석 층급은 5단이다.

 

 

3층 옥개석과 노반

 

 

초층 옥개석과 사리공

 

 

 

상기단 면석에는 양우주와 2개 탱주를 모각하였다.

 

 

탑신석

 

남산 염불암터의 이거사지 석탑 옥개석...사진 출처 / 우리카페 하늘사랑님

 

문화재청 사지총람에는  경주 구정동 석탑재 중의 하나인 초층 옥개석이 이거사지에서 옮겨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안태고향을 떠난 옥개석은 제자리를 찾아간 염불암지 석탑 옆에 뒹굴고 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이산가족을 만든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특히 경주시의 부끄러운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 이다.

 

 

이거사지 뒤쪽. 개인 민묘 윗쪽에 비로자나불 좌상이 있다.

 

 

전각속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불두는 복원된 듯 보인다.

 

 

불신 뒷쪽에도 법의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한 우견편단 법의,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불이다.

 

 

석탑과 동시대에 조성된 불상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석탑과 동시대에 이거사지에 봉안되었던 불상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들 주지하고 있는 내용처럼 청와대에 자리하고 있다.

 

 

청와대에 위치한 이거사지 석불좌상에 대한 2008년 5월 12일 서울투데이 김경중기자의 글을 가져왔다.

 

"[서울투데이] 불기 2552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으면서 청와대 경내 유일한 고대불상이 지난 9일 공개됐다.청와대 대통령 관저 뒤쪽 보호각 안에 안치된 높이 1m의 이 석조여래좌상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로 등재돼 있으며 그 양식으로 보아 8세기 무렵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평가된다. 석굴암 본존불과 크기만 다를 뿐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근거다.이 불상은 어디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일까?


출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경주 남산일 것이라는 추정과 경주시 도지동 유덕사(有德寺)라는 주장이 그 것이다.유덕사라는 주장은 신문기자 출신 미술평론가이자 문화재 사가(史家)인 이구열 씨의 1973년 저서인 '한국문화재비화'와 그 재판인 '한국문화재 수난사'(돌베개.1996)에서 나온다. 남산이라는 추정은 경주라는 원래 자리를 떠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대체로 남산에서 나온 것인데서 기인한다

 

 

 

실제로 남산은 지금도 거대한 신라시대 야외 불교 박물관을 방불케하고 있다.그 출처가 어디건 청와대 불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에 안치되게 되었는지는 이구열 씨가 자세히 정리했다.이씨에 의하면 이 불상은 1913년 무렵, 데라우치 조선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에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小平)라는 일본인 집 정원에서 발견돼 고난의 여정을 시작한다. 오히라는 데라우치가 이 불상을 탐낸다고 생각해 즉시 지금의 남산 밑 왜성대에 있던 총독관저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후 이 불상은 "1927년에 경복궁에 새 총독관저(지금의 청와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갔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枕流閣) 뒤의 샘터 위에 잘 안치돼 있다"고 이구열씨는 적었다.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74년 1월이며 현재의 보호각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졌다.한데 이구열 씨가 무엇을 근거로 이 불상의 출처를 유덕사로 지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다른 무엇보다 유덕사의 위치 자체를 지금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탑상(塔像) 편에 '유덕사(有德寺)'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이야기에 보인다.이에 의하면 "신라의 대부(大夫)이자 각간(角干)인 최유덕(崔有德)이 자기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그 이름을 유덕사(有德寺)라 했다. 그의 먼 후손인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가 유덕(有德)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다고 한다"고 했다.이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유덕사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으며, 더구나 그 위치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 높이 약 130㎝에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인 이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경주 남산에서 1912년에 옮겨온 것으로 지금의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다가 1989년 관저 신축 때 지금의 북악산 기슭으로 옮겼다. 우견편단(右肩偏袒) 법의(法衣)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왼쪽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 제5책(1917)에 수록된 이 불상이며 오른쪽은 2007년 보존처리를 끝낸 뒤 모습이다.

[ 문화부 기사참조, 대통령경호실 제공 ]

 

 

그렇다면 이 불상이 유래한 곳은 어디일까?
경주 지역사에 정통한 이 지역 출신 신라사 연구자 이근직 박사(문화재청 전문위원)는 "남산은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이며, 유덕사 또한 무엇을 근거로 나온 주장인지 모르겠다"면서 "식민지 시대 이 불상과 관련되는 자료 등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는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移車寺) 터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이거사는 성덕왕릉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사찰의 존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시대 기록에도 보인다. 이에 의하면 성덕왕이 재위 35년(736)만에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그 출처가 이처럼 비교적 확실하게 밝혀짐에 따라 경주지역 문화계 일각에서는 원래 자리로 불상을 모셔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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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찾아 모셔야 합니다. 이거사지 석탑은 복원은 경주시의 시급한 문화행정으로 보여 집니다. 고향을 떠나 불국사역으로 지금은 염불암터에 외롭게 뒹굴고 있는 옥개석은 지금 당장 이거사지로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청와대에 있는 불상도 안태고향으로 돌아와야 겠지요.

 

201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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