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충분히 알려진 내용이어서 덧붙이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리라 생각된다. 몇년전에는 발굴현장에 동선을 세워 발굴지를 둘러볼 수 있었는데, 도난 사건 때문인지 출입 할 수 없었다. 당간지주 건너편 귀부가 위치했던 사지에도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고 가리개로 덮여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샅샅이 검색하여도 사천왕사지 당간지주에 관한 자료가 없다.
이런이런 이번에 홈페이지 개편하면서 누락시켰구먼!!!!라고 중얼거렸다.
ㅎㅎ
그건 당연히 지정문화재라고 생각한 나의 오류였다.
다른 곳에서 이건되어 비지정 일까?
그나저나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왜 비지정문화재 자료는 없는거지??????????????
국도변에 동서로 서 있는 당간지주로 1928년 사천왕사지 부근 민가에 위치했던 것을 이건하였다고 전한다. 기단과 간대석은 처음부터 남아 있지 않았는지 아니면 묻혔는지 확실치 않다. 서쪽 당간지주 하부에는 절단되어 복원한 상처가 흉이되어 있다. 지주 내외부에는 특별한 장식은 조형하지 않았고 외부 모서리를 좁게 깎았으며 꼭대기에는 부드럽게 모죽임하여 공글지게 하였다. 간공을 상.하의 방형 중간의 원형으로 3개를 마련하여 이채롭다.
크기가 작고 특별한 장식이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천왕사가 장기적으로 프랜을 수립하여 창건한 사찰이 아니라 불력으로 당나라군 침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디테일한 계획을 세울 시간적 여유가 없이 급하게 세워진 사찰이었다고 생각하면 수긍이 갈 것이다. 사천왕사 준공이 679년으로 전하고 있어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도 그즈음으로 보면 무리가 없겠다.
예전 답사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천왕사는 우리가 고교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여왕의 지기삼사와 향가 '제망매가' '도솔가'의 저자로 알려진 월명사 스님의 주석처로 전한다.
제망매가..월명사
삶과 죽음의 길은
이승에 있음에 머뭇거리고
죽은 누이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죽었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한 부모에 태어나고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 세계에서 만나 볼 나는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201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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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과연 사천왕사지인가? 무릎까지 자란 잡초, 흩어진 금당터, 탑, 석등의 잔해들만 널부러져 나의 맘마져 한없이 젖어들고 있다. 너무 흔해 대접을 받지 못하는가? 경주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면 답사의 1번지라도 좋을 사천왕사지가 아니던가? 서글픔이 서서히 울분으로 변해 물기 머금은 애꿎은 잡초만 걷어차면서 안개에 가린 낭산자락과 망덕사지를 초점 없이 바라본다.
사천왕사 일찍이 선덕여왕은 유언으로 자기의 무덤자리를 도리천에 마련해달라고 하였지만 경주에 부처님이 노니는 도리천이 없다는 신하들의 답에 낭산狼山 정상이 그 곳이 라고 하지 않았던가?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당나라는 신라를 삼키기 위해 마각을 드러내고 1차 공격 실패 후 2차 공격을 위해 사신으로 가있던 김인문을 옥에 가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게 된다.
그 사실을 간파한 당나라에서 유학중이던 의상대사가 귀국 문무왕(?)에게 고하여 지극 정성 염불을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밀교(신인종)의 문두루비법 의식을 통하여 당을 물리치기 위해 선덕여왕의 능 앞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나라 군사는 서해에서 수장되고 2차 공격에 실패하게 된다.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신라인이 총력을 기우려 창건한 호국사찰이 사천왕사이었건만 덧없는 세월은 모든 것을 삼국유사의 한장면으로 만 기억하고 있으니 더욱더 서글픈 현실은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사실을 안 일본 놈들이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능을 반 토막 낸 철길을 부설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이설 이야기는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천왕사지를 건너 선덕여왕릉에 오를려고 했지만 도랑물이 발길을 잡는다. 이왕 젖은 몸 버릴 것이 더 있겠나만은 선덕여왕을 뵈올 자신이 없다는 화려하고(?) 허울 좋은 핑계로 사천왕사지에 주석했던 월명스님의 노래(향가) 도솔가를 떠올리며 당간지주에 슬픈 마음 달아 올렸다.
도솔가
[월명사. 신라 경덕왕(742-765)
경덕왕 19년 경자 4월 초하룻날에 해가 둘이 떠서 10여 일간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은 "인연 있는 스님을 청하여 산화공덕을 지으면 예방이 되리라."하였다. 이에 조원전에 단을 깨끗이 모시고 청양루에 행차하여 인연 있는 스님을 기다렸다. 그때 마침 월명사가 천백사의 남쪽 길로 지나가므로 왕이 사람을 시켜 불러들여 단을 열고 계청을 지으라 명했다. 월명사는 "저는 다만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오직 향가만 알고 범패 소리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하였다. 왕은 "이미 인연 있는 스님으로 정하였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다."고 하였다. 월명이 이에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가사는 이러하다.
원문 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오날 이에 散花 블어 빠쌀본 고자 너는 고단 마사매 命ㅅ 브리압디 彌勒座主 뫼셔롸
현대어 해역 오늘 이에 '산화'의 노래 불러 뿌리온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심부름하옵기에 미륵좌주를 모셔라!
시로 다시 풀어보면 청운에 한 떨기 꽃 던져 보냈네 은근히 굳은 마음에서 우러나 멀리 도솔천의 큰 선가(仙家)를 맞았네]
2003.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