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망덕사지 당간지주

임병기(선과) 2013. 2. 1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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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에서 나와 망덕사지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자주 들리고서도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아 골목길 동선에 포함하였었다. 우리님들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망덕사지는 당나라를 기만하고저 창건한 사찰이다. (멀리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이 요즘 카페에 가입하여 자주 글을 올리는 중학교 2학년 김나신 군이다)

 

망덕사는 삼국사기 에 의하면 망덕사는 685년(신문왕 5) 4월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가 두 번이나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자 당 고종이 당시 김인문을 따라 당에 가서 옥에 갇혀 있던 신라의 한림랑 박문준을 불러 “대병을 두 번이나 일으켰는데도 살아 돌아온 자가 없으니 너희 나라에 무슨 밀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

 

박문준이 “신은 상국에 온 지 10년이나 되어 본국의 일을 알수 없으나 듣건대 상국의 은혜로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으니 그 은덕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낭산의 남쪽에 사천왕사를 창건,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법석을 열고 있다는 것 뿐이라 합니다”하였다. 고종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구를 신라에 보내어 그 절을 알아 보도록 하였다. 왕이 미리 이 말을 전해 듣고 사천왕사를 보이는 것이 마땅치 않으므로 새로 한 절을 그 남쪽에 지어 놓고 기다렸다 당(홈)의 사신은 황제의 축수(祝壽) 자리인 사천왕사를 먼저 참배하여 분향을 올리겠다고 하였다

 

곧 새로 지은 절로 인도하자, 사신은 그 문전에 서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逢山의 절 이라’ 하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 이 그 사신에게 은 1 천냥을 주었더니 사신이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는 천왕사 를 세우고 새 절에서 황제의 장수를 축원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고하였다 당나라 사신의 말에 따라서 그 절의 이름을 망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발굴로 밝혀진 망덕사의 가람구조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1금당 쌍탑 구조의 가람배치였다고 한다. 즉 금당앞 좌우의 목탑, 남쪽에는 중문지와 계단, 북쪽의 강당지, 회랑지, 당간지주가 배치된 구조로 알려져 있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가장 온건하게 남아 있는 유물이다.

 

당간지주는 민묘 옆에 서 있다.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사천왕사지 당간지주와 달라 고정공이 없으며 안쪽 윗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두었다. .표면 모서리는 사각으로 모죽임을 하였고  아랫쪽에는 치석되지 않은 상태로 노출되었지만 본래는 묻힌 부분으로도 생각된다. 비록 조각은 없으나 소박하고 웅장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는데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망덕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된 사찰이므로 당간지주도 동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서탑지 주초

 

 

서탑지 심초석

 

 

금당지

 

 

동탑지

 

 

멀리 사천왕사지가 보인다.

 

                            경주 망덕사지 유물 40년만에 공개

 

(서울=연합뉴스)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쌍탑식 가람 중 하나인 경북 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망덕사지(望德寺址)에 대한 1969-70년 발굴조사에서 정병 등 10여 점에 이르는 각종 고려시대 불교 공양구 혹은 식기류가 발굴조사 40년만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를 거쳐 공개됐다. 2009.3.19

 

 

201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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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지
비에 젖은 몸으로 달구지를 끌고선 누런 황톳물을 토해내는 남천의 화랑교를 건너 갯마을 입구에 파킹하고 둑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 아마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친놈이라고 했을거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놈이 틀림없고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었다면 사정없이 뺨을 갈겨버렸을 것이다.


둑길에 장사 벌지리 長沙伐地里 입석이 비속에서 소리 없이 나를 맞아준다.
박제상과 부인의 사연을 간직한 이곳은 박제상이 고구려에 가있는 인질 왕자를 구하고 또다시 일본에 인질로 가있는 왕자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부인이 들어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지명의 유래이다.

벌지리 입석에 기대어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망덕사 터는 흔적도 없다.
당간지주도 석축의 부재도 잡초에 가려 뵈지 않건만 이놈의 중생은 무엇에 끌려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2차 신라 공격에 실패한 당나라는 신라의 호국, 비보사찰 사천왕사를 확인 및 절을 폐쇄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고 신라에서는 망덕사지를 창건하여 사천왕사라고 하여(물론 뇌물과 미인계를 겸했겠지만) 당의 사신을 무사히 돌려보냈던 것이다.

望德寺(당태종의 덕을 추앙한다는 의미인가?)
사천왕사의 대타 망덕사이었지만 신라의 사직을 보호한 그야말로 9회 말 투아웃에 만루홈런으로 전세를 뒤집은 성공한 대타 기용이 아닌가?
게임은 끝났고 관중이 나간 야구장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승리자도 패배자도 역사의 장막으로 사라지고......

맘의 갈등이 새로이 시작된다.
집으로 가자!. 아니다 이왕지사 젖은 몸 남산자락 미륵골, 탑골, 부처골을 들리자!
갈팡질팡 우왕좌왕..................................................우쒸! 개불랄티!!!

200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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