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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인제군

인제...한계사지

by 임병기(선과) 201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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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진부에서 홍천을 거쳐 구룡령을 넘어 미천골 선림원지 답사, 양양을 거쳐 오색에서 한계령을 경유하여 인제 한계사지에 도착했으니 숨가픈 일정이다. 설악산 장수대 탐방센터에 주차후 한계사지 위치를 물었더니 출입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전에 공문으로 접수된 경우 또는 학술 목적에 한하여 출입을 허용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내가 아니지 않은가? (소근소근...) 잠시후 방문 허락을 받았다. 뜻밖에도 한계사지는 탐방센터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더위에 지친 나에게 큰 선물로 여겨졌다.
 
 
한계사지. 여느 폐사지처럼 풀이 우거지고 옛님은 숨바꼭질 하듯 보일듯말듯 머리만 보일줄 알았다. 그런 나의 판단을 보기좋게 한 방 먹이듯  말끔하게 주변정리가 되어 있었다. 내가 우리나라 유명한 산 초입에 위치한 공원관리소 직원들의 업무 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 했지만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 될 것 같다.
 
 
백담사 사적기에의하면 한계사는 백담사의 전신이었다. "한계싸는 647년(진덕왕 1)에 자장 율사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창건 당시에는 절이 현재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자장 율사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한 다음,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하였던 것이다.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 한계사는 불타버렸고, 30년 가까이 빈터만 남아 있다가 719년(성덕왕 18)에 중창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중건과 관련되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지금은 강원도 화천군으로 바뀐 낭천현에는 비금사(琵琴寺)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가 매우 부정하여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와 같은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 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절은 비금사가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전후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은 몰라 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아가면서 일러주었다.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들 한다.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사적기와 달리 고려초기 백운거사 이규보는 한계사를 찾아 주지승과 한 잔술을 나누 었었다는 기록도 보이며 조선조 김수증의 곡운집에도 한계사가 언급되어 있어 조선시대까지 향화가 피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지누의 절터 톱아보기] 내용을 살펴보자. 조선후기에 곡운(谷雲) 김수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선중기의 강직한 선비인 청음(淸陰) 김상헌의 장손이자 노론(老論)의 영수인 문곡(文谷) 김수항의 맏형이었다. 그는 지금의 화천인 낭천현(狼川縣)에 곡운정사(谷雲精舍)를 짓고 은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무렵 조카인 삼연(三淵) 김창흡과 함께 한계산 일대로 유람을 떠났다.

당시의 기록을 문집인 〈곡운집(谷雲集)〉에 ‘한계산기(寒溪山記)’로 남겼는데 그들이 떠난 날은 1691년 5월6일이었다. 원천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방천을 지나 지금의 양구읍인 함춘역에서 또 하루를 묵었다. 이윽고 셋째 날인 5월8일, 산회수곡(山回水曲)의 진부령에 올라서서 설악산을 바라 본 후 백담사 들머리인 남교역을 지나 한계사에 다다랐다.

그가 표현한 한계사 들머리는 송림 속으로 난 좁은 길을 걸어야 했는데 그 길은 금강산의 장안사로 오르는 길과도 같다고 했다. 또 계곡을 이리저리 건너고 나니 북쪽의 골짜기 아래 절집이 있었으며, 뒤로 바위 봉우리를 둔 절집에는 열명 정도의 스님이 머물고 있다고 했다. 절은 모두 판자로 새로 지었으며 법당은 이제 막 새로 짓는 중이며 자신은 그 동쪽의 요사에서 묵었지만 절에는 별달리 볼 것이 없다고 했으니 모호한 일이다.

지금 한계사터에는 석탑 2기와 마멸이 심한 석불 1기, 사자와 향로가 새겨졌던 불대좌 그리고 연화문과 화불이 선명하게 남은 광배와 탑 앞에 직사각형의 대좌가 남아 있음에도 그는 볼 것이 없다고 했으니 묘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의문은 다음날인 5월9일의 기록에서 풀린다. 그는 아침을 먹은 후 빼곡한 솔밭 사이로 길을 나서 일대의 바위 봉우리들이 빚어내는 빼어난 정경 속의 대승폭포를 구경하고 대승암에서 묵는다. 그런데 그가 한계사의 옛터를 봤다고 한 것이다. 드디어 5월10일, 그는 한계사 옛터를 찾았는데 절집은 상년(上年)에 불탔다고 했다. 상년이란 지난해를 일컫는 말이니 1690년을 말하는 것이지 싶다. 그곳은 불에 타 깨진 와편들이 뒹굴고 타다 남은 나무며 재가 난무했으며 석불 3기, 그리고 탑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에는 작약 꽃만 무성하게 피어 있다고 했다.

그 5년 후, 1696년 8월 김수증의 또 다른 조카인 농암(農巖) 김창협도 이 일대를 유람하여 ‘동정기(東征記)’를 남겼다. 그는 8월28일 새로 지은 한계사에 들렀으며 그때까지도 건물은 다 지어지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또 김수증이 하룻밤을 묵었던 대승암에도 몇 안 되던 스님들마저 떠나버려 아무도 머물지 않는 황량한 모습임을 기록에 남기고 있으나 그 다음부분은 결락이 되어 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사적비 또는 부도의 귀부였을 것이다.
 
 
버선코를 닮은 전각 소맷돌
 
 
석불좌상
 
마모가 심하여 형체를 파악할 수 없다. 불두는 결실되었다. 김수증의 곡운집베 기록된  3기석불 중  한 분이었을 것이다. 미루어 추측하면 금당에는 삼존불이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배례석?
 
 
남삼층탑
 
쌍탑으로 보기도 하는 두 삼층석탑 가운데 금당터 앞의 탑으로 기단을 2층으로 두고 3층의 탑신을 세웠다.하기단 지대석은 5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하나의 부재이며 하기단면석에는 동그란 안상이 면마다 3기가 얕게 조각되어 있고, 상기단은 양우주와 탱주 하나를 새겼다. 기단갑석에는 부연을 두고 위에 2단의 호형과 각형 탑신받침을 두었다. 낙수면물매가 깊지 않은은 옥개석의 받침은 위로붙 4*5*5이며 처마에는 반전이 있다.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겼으며 상륜의 보주는본래의 것이 아닌 것 같다. 3 층옥개.탑신.상기단 면석은 복원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며  폐사지 아래의. 낡은 산장 옆에 옮겨져 있던 것을 복원한 탑이다.
 
 
기단
 
 
탑신
 
 
 
안내문을 새로 설치했으면
 
 
불상대좌
 
광배 앞에 위치하고 있다. 가운데 부재는 중대석으로 원위치겠지만 맨위 대좌는 하대석으로 보인다. 즉 중대석과 하대석이 바뀐 대좌이다. 8각 하대석 안상에는 사자를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안상의 사자상
 
 
광배
 
상부가 결실된 주형거신광배에는 2개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있다. 두광의 8판연화문은 보이나 보상화문은 구분되지 않는다. 우측에 화불도 보인다.
 


 
화불
 
 
금당터 뒷쪽 언덕의 북삼층탑
 
남상층탑과 큰 차이가 없는 삼층탑이다.하기단의 밑돌과 가운데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고, 탑신 옥개석받침이 모두 4단이며 하기단에 탱주가있으며 안상이 표현되지 않는 점이 남삼층탑가 차이가 있다. 상륜에는 노반이 남아 있다.
 
 
기단
 
 
탑신
 
 
옥개 받침. 풍탁공도 보인다.
 
 
 
 
고려 초의 문인인 백운거사 이규보는 한계사의 주지를 만나 밤새 술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시를 한 수 남겼다.
 






  안개인 양 구름인 양 반공중에 노니니 霞想雲情逸天半
      좋은 벼슬 많은 녹(祿)이 날 잡지 못하리 玉籠金鎖莫我絆
                                                    나는 평생에 원차산을 배웠기에 平生自學元次山
                 한계로 가서 낭만랑(浪漫郞)이라 불리고 싶었네 欲往寒溪稱浪漫
한계의 주인을 우연히 여기서 만나  寒溪主人偶此逢
재미있게 눈썹 펴고 함께 웃는구나  聊復軒眉一笑同
   중이지만 술 한 잔쯤이야 어떠하리  禪味何妨飮餘滴
                                                     그 얘기 솜씨 신바람이 나는구나  談鋒更愛生雄風
                                                     노느라고 해 지는 줄도 몰랐는데  相從不覺西日側
        저녁 연기 십리 길에 석양을 재촉하누나  十里靑煙催晩色
다시는 한계를 그리워하지 않겠네  不須更憶寒溪遊
스님의 눈빛이 한계보다 더 푸르이 見公眼色奪溪碧




 
201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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