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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인제군

인제...설악산 봉정암

by 임병기(선과) 201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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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대리에서 출발한 마을버스는 순례단을 백담사주차장에 내려준다. 소청봉 아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봉정암까지는 약 6시간이 소요된다. 산행동안 오욕과 속세의 풍진을 떨쳐버리고 청정한 마음으로 적멸보궁 사리탑을 친견할 자세를 잡아야할텐데  설레이기만 하다.

 

 

 

비치 빛 계곡물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정비석님은 산정무한에서 명경지수라고 표현했지만 순례객의 일원인 오늘의 내눈에는 명부전 업경대 처럼 보인다. 출발부터 마음을 비우라는 암시일까? 순례를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지켜 보았다. 순례 길을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불자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순수하고 밝아 보였다. 나역시도 그런 표정이 되리하 확신한다.

 

1933년 노산 이은상님의 설악행각에 등장하는 영산암도 이 부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영시암행(行)인 우로로 얼마쯤 가노라니, 로우(路右)에 청징(淸澄)한 일(一)담(潭)이 있고, 담하(潭下)에는 백사장(白沙場)이 보기 좋게 놓였는데, 사변(沙邊)에는 청색(靑色) 반석(盤石)이 기괴(奇怪)한채로 수십명은 앉을만합니다.  담(潭)은 영산담(影山潭) 내산(內山) 제봉(諸峰)의 면용(面容)이 이 담 속에서 투영(投影)하였다는 뜻이라 하거니와, 바위에 올라앉아 물속을 굽어보매, 과연 산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사람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윽고 다시 보매, 산과 하늘은 그대로 보이건만, 구름은 간곳이 없습니다. 아니 보인듯이 스러지는 자(者)가 구름뿐이 아니겠지요.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의 구(句)를 여기 와 다시 한번 읽어보매, 옳은 말인지 긇은 말인지 그는 판단(判斷)하고싶지 않은채로 나도 몰래 내 고개가 무수(無數)히 끄덕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영산담(影山潭) 맑은 물에 저기도 내가 있네

    누가 참이온지 어느것이 그림잔지

    물 속에 지나는 구름 보고, 웃고 돌아서니라.

 

 

나와 자연이 하나되어 물아일여의 경지에 이르면 하늘도 계곡도 나의 벗일텐데, 아직도 건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언강샘심 언어도단도 유만부동이지. 

 

 

처음부터 묵언 산행을 결심하여 일행과 떨어져 마구 달린다(?). 잠시 후 숲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껴 접근하였더니 외진 산골 홀로 부도 한 기가 서있다. 설담당雪淡堂 부도. 1783년에 백담사라 개칭한 설담스님의 부도이다.

 

 

석종형부도. 탑신 상부에  한 줄로 선을 돌출시켰다.  위에는  문양이 모각 되어 있다. 돌출선 밑에는 ""설담당""이라는 각 자가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려준다. 상부에는 원형의 보주받침과 보주를 각출하고 있다. 보주에는 화염문이 양각되어 있고 가장 상 면에는 연화문이 모각되어 있다. 

 

 

1시간여 산행후에 도착한 영시암. 순례객의 1차 집결지이다. 영시암은 조선 숙종 재위시절 김창흡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온다.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후궁 숙빈 장씨가 왕자를 잉태하게 되었다. 숙종은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세력이 세자 책봉을 반대할 것으로 판단하여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 인현왕후의 나이를 고려하면 훗날 왕자를 생산할수 있는데 후궁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로인하여 송시열과 전영의정 김수항은 귀양을 가게되고 끝내 사사되었다. 이때 김수항의 아들 김창흡은 세상인연을 끊고 속세와 등을 져 설악으로 들어와 암자 생활을 하였다. 김창흡은 세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여 "영시"永矢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영원히 쏜 화살?

 

삼연의 증조부는 김상헌이다. 형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비빈을 호종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한 충신이고, 아우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시조를 남긴 인물이다. 삼연의 형제들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장남 김창집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김창협은 대제학을, 삼남인 삼연 김창흡과 넷째 김창업이다.

 

 

영원히 영시암에 머물듯 같았던 삼연 김창흡도 6년 후 암자를 떠나게 된 사연이 가슴 아프다. 삼연의 찬모가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스스로 영시암을 불사르고 설악을 떠나 이곳을 호식동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근자에 삼연선생의 후손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과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서예가 형제의 도움을 받아  영시암 불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영시암과 삼연선생 가문과의 질긴 인연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삼연 김창흡

본관 안동. 자 자익(). 호 삼연(). 시호 문강(). 서울 출생. 영의정 수항()의 셋째아들. 이단상()에게 수학하고, 1673년(현종 14) 진사가 되었으며, 1684년 장악원주부(簿)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배소()에서 사사되자 형 창집() ·창협()과 함께 영평()에 은거하였다.

1721년(경종 1) 집의(), 다음해 세제시강원진선()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나 형 창협과 함께 이이()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신임사화()로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그 해에 죽었다. 1709년(숙종 35)부터 5~6년간이나 계속된 심성론()의 치열한 시비에서 호론()인 형과는 반대로 낙론()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역시 형과 함께 이황()과 이이를 절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죽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양주의 석실서원(), 울진의 신계사(), 강릉의 호해정영당() 등에 제향되었다.문집에 《삼연집》, 저서에 《심양일기()》 《문취()》, 편서에 《안동김씨세보()》가 있다.

 

 

그런저런 역사를 간직한 영시암. 백담사에서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순례객에게 쉼터와 감로수를 제공하는 절집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시암(永矢庵) ...김창흡

 

내 삶은 괴로워 즐거움이 없고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려워라

 

늙어 설악 산중에 들어와

 

 여기 영시암을 지었네.

 

 

 

 

 

 

 

 

 

노산선생의 설악행각의 한 구절입니다.

 

 과연 지금 들려오는 이 심산유곡의 물 소리 ― 귀로 듣지않고 마음으로 들을수 있는 이 지극히 맑은 물 소리는 내게도 ― 이 노둔(魯鈍)한 내 귀, 내 마음에도, 팔만(八萬) 성경(聖經)의 오묘(奧妙)한 진리(眞理)를 설(說)하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생각하매, 석가(釋迦)의 설법(說法), 기독(基督)의 교리(敎理)가 어느것이나 다 이 자연의 진리(말하자면 이 흐르는 물 소리)를 주석(註釋)한것, 번역(飜譯)한것, 연의(演義)한것, 설명(說明)한 것에 지나지 않을것이며, 모든 철학과 문학과 예술이 온통 이것 하나의 부연(敷衍) 재록(再錄)뿐임을 알겠습니다.

 

 

 

 

 

 

봉정암은 자장 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서 공부할 때 문수 보살을 친견하고 진신사리를 받아 귀국한 뒤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창건담이 전한다.

 

“지금부터 자장 율사가 중국으로 건너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3?7일(21일) 기도를 마치고 문수 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받고 644년(선덕왕 13)에 귀국하였다. 자장 율사는 처음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사리를 봉안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지 찬란한 오색빛과 함께 날아온 봉황새가 스님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따라가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이르렀고, 봉황은 한 바위 꼭대기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이 봉황처럼, 부처님처럼 생긴 바위였다.

 

“바로 이곳이로구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 인연처임을 깨달은 스님은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조그마한 암자를 건립하니 바로 봉정암이다. 신비가 깃든 이와 같은 창건설화 속에는 불교의 지극한 성보(聖寶) 진신사리를 신령한 도량에 모시고자 했던 옛사람의 정성이 짙게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봉정암은 창건 이후 지금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667년(문무왕 17)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중건에 이어, 고려 중기인1188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건하였다. 그리고 한용운 스님이 1923년에 쓴 백담사사적기에는 세 번 째 중건이 1518년(중종 13) 환적(幻寂)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네 번 째는 1548년(명종 3) 등운(騰雲) 스님에 의하여, 그리고 다섯 번 째는 1632년 (인조 10) 설정(雪淨)스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백담사사적기에 첨부된 봉정암중수기와 봉정암칠창사적기(鳳頂庵七創師蹟記)에 의하면 제3의 중건은 1648년(인조 26) 환적의천(幻寂義天) 스님에 의하여, 네 번째는 1678년(숙종 4) 등운 스님이, 다섯 번 째는 1748년(영조 24) 설정 스님이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용운 스님도 이 봉정암의 사적비를 참고로 한 것이고, 특히 환적의천 스님의 생존기가 1603년에서 1690년이므로 세 번 째 중건은 1518년이 아니라 1648년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설정 스님의 중건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봉안하고 배탑대(排塔臺)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누각까지 건립하여 절다운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여섯 번째의 중건은 1780년(정조 4) 계심(戒心)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곱 번 째로 1870년 (고종8) 인공(印空) 스님과 수산(睡山) 스님이 중건하여 우리나라 제일 기도도량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봉정암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10여 년 이상 오층석탑만이 외롭게 서 있던 이곳을 찾아온 법련(法蓮) 스님은 천일기도 끝에 자그마한 법당과 요사를 완공하였다.

 

그 뒤 1985년부터 끊임없는 불사를 통하여 청기와로 단장한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산신각 요사 등을 지어 제9차 중건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3년 노산 선생은 추석날 밤 봉정암을 들렸습니다. 선생의 설악행각 기행문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이 봉정암에 들어서자, 괴위(魁偉)한 일(一) 노승(老僧)이 나와 맞아주니, 이는 금년(今年) 80여세의 고령(高齡)인 춘계(春溪)주지(住持)입니다.   주지장로(長老)를 따라 선실(禪室)로 들어서니, 벽상(壁上)에는 ‘마하선실(摩訶禪室)’ ‘조유육죽세식일화(祖牖六竹世識一花)’ 등(等) 구(句)의 추사필(秋史筆)이 걸려있거니와, 듣건대, 이 장로(長老)가 일찌기 추사의 문(門)에서 서법(書法)을 배운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노장(老丈) 역시 추사의 필법(筆法)으로 경전(經典)의 명구(名句)를 써 붙여 놓은 것이 많은데, 문외한(門外漢)의 눈으로도 진기(塵氣) 벗은 서풍(書風)이 그 강직(剛直)한 성격과 상응(相應)하는바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석공양(夕供養)이 끝난 후, 춘계(春溪)노장(老丈)과 나는 사정(寺庭)에 나섰다가, 곤(困)하여 나 혼자 암(菴)의 근경(近境)을 소요(逍遙)합니다. 문득 깨달으니, 광명(光明)한 달ㅅ빛! 오! 참 오늘밤이 추석(秋夕)입니다. 산 밖에 중추가절(仲秋佳節)은 지금 어떠하온지, 여기 이 공산(空山)에는 소소(蕭蕭) 낙목(落木)과 물 소리뿐입니다.

 

깊고 긴 동곡(洞谷)을 내려다보니, 어두운 송림(松林) 위에 달ㅅ빛이 어려, 연방 신필(神筆)을 들고 음영(陰影)을 손질하며 그려나가는 남화(南畵)의 일폭(一幅)과 다름 없는데, 끊이잖고 흐르는 물 소리는 마음에 끝없는 골짜기를 파고 나가며, 들을수록 신비(神秘)한 계시(啓示)를 일러주는듯하여, 차운 밤ㅅ바람 싫은줄도 모르고서 석대(石臺)에 앉은양, 눈을 떴다 감았다, 무한(無限)한 경계(境界)를 어루만져보는 이 순간(瞬間), 나는 무슨 말로 지금의 내 뜻을 전(傳)할 수가 있으오리까.

 

 쉬임 없이 들려오는 물 소리!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이 물 소리! 분명히 다른 곳에서 듣던 그 물소리와는 별로 달리 들리는 것이 또한 무슨 까닭이온지! 물 소리 그것이야 다를 것이 없으련마는……

 

   생각나는 설암선사(雪岩禪師)의 시구(詩句) ―

 

   계성자시광장설(溪聲自是廣長舌)

   팔만진경구누설(八萬眞經俱漏洩)

   가소서천노석가(可笑西天老釋迦)

   도로사십구년설(徒勞四十九年說)1)

 

무론(毋論) 이 시(詩)를 듣는이가 ‘계성자시광장설(溪聲自是廣長舌), 산색무비청정신(山色無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2)고 한 동파(東坡)의 시를 모의(模擬)한것이라고 말할것입니다.   그러나 설암(雪岩), 동파(東坡)의 양시(兩詩) 사이에는 적지 않은 경정(逕庭)이 있다고도 하려니와, 나로서는 그 시상(詩想)의 큰것으로나, 그 철학(哲學)의 깊은것으로나, 양시가 같은 말인법호되, 설암의 것을 사랑하고 존경(尊敬)합니다. 천강남청(茜絳藍靑)이라고 할는지요.

 

 과연 지금 들려오는 이 심산유곡의 물 소리 ― 귀로 듣지않고 마음으로 들을수 있는 이 지극히 맑은 물 소리는 내게도 ― 이 노둔(魯鈍)한 내 귀, 내 마음에도, 팔만(八萬) 성경(聖經)의 오묘(奧妙)한 진리(眞理)를 설(說)하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생각하매, 석가(釋迦)의 설법(說法), 기독(基督)의 교리(敎理)가 어느것이나 다 이 자연의 진리(말하자면 이 흐르는 물 소리)를 주석(註釋)한것, 번역(飜譯)한것, 연의(演義)한것, 설명(說明)한 것에 지나지 않을것이며, 모든 철학과 문학과 예술이 온통 이것 하나의 부연(敷衍) 재록(再錄)뿐임을 알겠습니다.

 

 아니, 다시 더 생각해보면, 이 물소리와 같은 자연만으로도 족우족(足又足)한것이매, 인간의 중언부언(重言復言)인 철학이며 종교며 예술이며 무엇무엇이 필경 소용없는 사족(蛇足)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공산(空山) 월하(月下)에 암석과 송림 사이를 소요(逍遙)하며 물 소리, 바람 소리의 무한한 수시(垂示)에 느끼고 또 느끼는 오늘 이 밤은, 분명 내 일생에 거룩하고 의의 있고 아름다운 한 페지를 만들어 줄것입니다.

 

   깊은 밤 이 산골에 들리는 저 물 소리

   구구(句句) 절절(節節)이 오묘(奧妙)한 진리(眞理)로다

   인간(人間)에 긔똥 설법(說法)은 모두 헛것 이었다.

   물 소리 마음속을 긴 골 이뤄 흐르나니

   밝으신 달이마저 마음 위에 비쳤나니

   이대로 지녀 돌아가 고이고이 잠들리라.

 

시간은 흐르는 저 밤 시내와 함께 흐릅니다. 깊은 밤 낙목(落木) 공산(空山)에 조화되는 풍경은 아니나마, 시계를 끄내어 보매, 어느덧 거의 다된 자정(子正)입니다.   선실(禪室)로 돌아 들어가 먹던 밥바리에 저고리를 깔아 베고 누웠으니, 나도 한 사람 산중(山中) 한인(閑人)인듯하여 잠드는 내 눈가에 평화의 고요한 웃음이 떠있음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윤장대. 사리탑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적멸보궁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최근에 지었다.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 요사와 구 법당이 있다. 안에는 목각 지장탱,신중탱이 있는데, 모두 최근에 조성하였다. 수미단과 닫집은 있으나 불상이나 불화같은 상설(像設)이 없는 것은 적멸보궁의 특징이다. 대신에 불단 뒤쪽으로 커다란 유리창을 내서 앞쪽에 있는 사리탑을 참배하도록 되어 있다. 

 

 

 

봉정암의 오른쪽 거대한 암벽 위에 서 있는 석탑이다. 봉정암은 백담사에 딸린 암자로, 설악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거대한 바위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일반적인 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어 마치 바위를 뚫고 높이 솟아오른 듯 하다. 탑을 받치고 있는 바위 윗면에는 연꽃을 새겨놓아 부처님이 계신 곳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탑신의 몸돌에는 각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2층 몸돌은 1층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두터운 편으로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좁아 보인다. 처마는 밑선과 윗선이 평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솟아 경쾌한 맛을 살렸으며,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어 고려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 가지런히 놓여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와 이곳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지고, 통일신라 문무왕 13년(673) 원효대사를 비롯한 여러 승려들이 암자를 새로 보수한 후 이 탑을 보존하였다 하나 현재 이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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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윗면의 연꽃

 

 

탑신의 양우주. 3단 옥개받침

 

 

 

 

 

 

 

 

 

 

 

 

 

 

봉정암표 공양

 

 

 

 

 

긴 하루해가 마지막 숨을 고른다.

 

 

 

 

봉정암...김명은

 

마음이 간절해야

닿을 수 있는 곳

몸이 가벼워야

오를 수 있는 곳

 

한기가 전율처럼

옅은 구름처럼

스쳐지나간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겹겹의 능선들

새벽 공기를 호흡하며

누군가 기도하고 있다.

 

한사람을 위하여

 

 

 

이튿날 새벽 대청봉 산행. 소청에서 바라본 사리탑

 

 

 

 

 

 

중청봉과 중청대피소

 

 

 

 

 

중청봉에서 바라본 대청봉

 

 

 

 

 

 

 

5대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평창 상원사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그리고 설악산 봉정암. 이제 오랜 소망을 이루고 화룔점정의 마침표를 찍어야겠습니다. 마침표는 종료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자세로 사리탑 앞에서 기원했던 작은 소원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겠습니다.

 

 

동행한 인드라망 순례팀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사리탑 답사 목적으로 묵언 산행으로 다녀왔지만 다음 기회에는 즐기며 나를 찾는 순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한 달이 지나 그때의 느낌이 많이 상쇄되었지만 감흥은 여전합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

2012.06.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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