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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인제군

인제...합강정

by 임병기(선과) 201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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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강정

 

2011년 3월 인제 답사 동선에서 인제군청에 모셔진 합강정 미륵을 만나러 갔었다. 하지만 인제군청에는 없었으며 답사후 자료를 검색하였더니 합강정 원위치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고 분통을 터트렸었다. 현재도 인제군청 홈, 인제문화원 등 대부분 자료에 인제군청에 위치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2012년 6월 백담사. 봉정암 순례길 버스속에서 합강정을 보았지만 버스를 멈출 수는 없었었다. 그리고 2달 후 이번 강원도 탑순례 길 드디어 합강정을 만났다. 대구에서 강원도 인제는 가까운 거리는 절대 아니건만 인연은 결코 멀지 않고 늘 곁에 있는 느낌이다.

 

합강정 미륵불을 뵙기 위한 여정이었는데, 문화유산 답사 20년 여 동안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중앙단'이라는 유적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또한 인제출신 박인환 시인의 시비를 접할 수 있어 세번째 만에 인연 지은 보람을 느꼈다. 훗날 우리님들의 발걸음을 위해 간단히 소개한다. 아울러 박인희 '세월이 가면'도 오랫만에 되내어 본다.

 

인제 8경의 제8경인 합강정은 인제읍 합강 2리에 위치한 정자이다. 소양강 상류인 내린천이 기린방면으로 부터 흘러들고 서화방면 인북천과 용대방면 북천이 합류 후 흘러들어 여기서 합류한다는 것에 연유해 명명된 정자로써 조선시대 중엽부터 합강정으로 불려 내려오고 있다. 합강정은 인제지역에 향교가 창건되면서(광해군2년(1610)) 66년이 지난 숙종 2년 병진(1616)에 금부도사를 역임한 바 있는 현감 이세억 재임(1675~1677)시절 지형적으로 전망이 좋은 합강리에 합강정을 세웠으며 인제지역 누정 건립의 효시라고 한다.

 

합강정... 이응규

明沙白石合江頭 밝은 모래 흰 바위있는 합강 머리,

笠樣高亭半樣樓 삿갓 모양의 높은 정자 반쯤은 누각 모양.

萬戶臺空春一夢 만호대 텅 비어 일장춘몽,

中央壇古月千秋 중앙단 오래 되어 달빛은 천 년.

飛霞孤鶩簷端沒 석양에 나는 물새 처마 끝에서 사라지고,

短篴長笳日下遊 짧은 젓대 긴 피리 해 아래서 노닌다.

望裏山川皆勝狀 펼쳐진 산천이야 모두 뛰어난 경치,

麟城從此擅名休 인제가 이 때문에 아름다운 이름 날리지.

 

합강정...박영재

合江亭立合江頭 합강 머리에 서있는 합강정,

影入合江心洗樓 그림자는 합강에 들고 마음은 누각 씻네.

鴻雁羽輕明月夜 기러기 날개는 밝은 달밤에 가볍고,

魚龍背重白雲秋 물고기 등은 흰구름 뜬 가을에 무겁다.

世人不日稱千醉 세상 사람들 얼마 안되어 천취(千醉)라 칭송하고,

仙老有時借一遊 신선같은 노인들 때때로 예서 한 번 노닌다.

第賦古今修護事 옛부터 수리하고 보호하던 일 시로 짓나니,

名從此大永無休 이름은 이로부터 영원토록 이어지리.

 

 

합강미륵 전각

 

 

내린천을 비라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각의 표본. 물론 잘못된 표본!!!

 

 

우리님들은 다 아시죠? 간살은 제거할 수 있다는. 미륵불님 시원하시죠? 전망도 좋구요? 그냥 이대로 둘까요? 문화재 훼손으로 고발 당하지 않는다면 늘 이대로 모시고 싶습니다.

 

불상의 목이 떨어진 것을 다시 봉합하였다. 무릎 아래는 매몰된 상태이다. 발굴하면 될텐데.  머리에는 사각 보관을 쓰고 있어 보살상으로도 보인다. 상호는 마모가 심하여며 통견으로 추정되고 오른손은 가슴에 펴서 붙인 수인이고 왼손은 다리에 붙여 무릎 위까지 내렸다.

 

 

구전에 의하면 약 350여 년 전, 박명천이라는 목상이 목재를 뗏목으로 묶어 합강으로 운반하여 왔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내가 이 강물 속에 묻혀 갑갑하기 짝이 없으니 나를 건져 달라."고 해서 친구 되는 김성천에게 부탁을 하여 물 속에 들어가 보니 수 척이 되는 석주가 광채를 띠고 있었다. 이를 건져내서 미륵불을 만들어 조그마한 누각을 세우고 모신 후 일이 뜻대로 되어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형체 구분이 어렵다. 민초들의 몫으로 모두 돌려주고도 그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고향 터줏대감으로 살아가는 삶이 마냥 즐거운 듯.

 

 

 

현재 위치가 본래의 자리라면 사찰에 모셔진 불상보다는 내린천을 오르내리는 뗏목군과 민초들의 안녕과 무사 운행을 기원하는 불상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합강정 미륵에서 바라본 내린천과 번지점프장

 

강원도 중앙단

 

강원도 중앙단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제단이다. 나라에 역질이 돌거나 가뭄이 들었을 때 각 도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에 신을 모시고 여제를 지냈다. 조선시대 여제는 국가에서 자연신에게 지내는 제사중 소사에 해당하는 제사로 정종 2년인 1400년에 지방의 주현까지 행해졌다. 제사는 매년 청명, 7월 15일, 10월 1일 3회에 걸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고 역병이나 가뭄이 심한 지역에서는 시기와 장소를 별도로 정하여 별여제를 시행하였다. 국가적 차원의 제사인 경우 임금이 직접 제문을 짓고 친히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지방 군현의 경우는 대부분 수령의 주관하에 지내도록 하였다.

 

1742(영조 18)년에 왕명에 의해 전국 중앙단이 만들어져 시행되었는데 강원도 인제,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전라도 광주에서 시행되었다. 강원도 중앙단은 1843년 전후까지 별여제를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며 1901년 경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었다. 현재의 강원도 중앙단은 2001년 7월 24일에 복원되었다. 가로 6.51m이며 높이는 약 80cm의 정방형 사각평면 형태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합강문화제 이야기를 인제군청에서 가져왔다.합강문화제는 1983. 10. 27부터 시작된 향토문화축제로 합강(合江)이라는 자연지리적 경관과 역사지리적인 상징성을 전승시키고 있는 인제군의 대표적인 문화축제이다.

 

중앙단제의 역사적 전승성과 합강의 자연지리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인제군은 1983. 10. 27 향토문화축제를 합강문화제로 명명하고, 합강정 앞에서 인제군 수호지신에게 제를 올리며 제1회 합강문화제가 시작되었다. 제2회 합강문화제는 1984. 11. 5에 개최하였으나 홍수피해가 심하여 제례행사만 개최하였으며, 1985. 9. 9 개최된 제3회 합강문화제에서는 제례행사를 시작으로 노래자랑, 합창경연대회, 사생실기대회, 주부백일장등의 문화예술행사를 개최하였다. 아울러 지역전통문화의 전승을 위해 합강뗏목띄우기를 시연하였으며, 목도, 그네, 씨름, 육상경기, 줄당기기, 벼섬나르기, 불씨만들기 등의 전통민속체험경기와 체육행사등이 열려 지역문화축제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합강문화제는 1985년의 3회를 기점으로 군민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례행사와 문화예술 전시행사, 군민의 화합과 공동체적 의식을 도모하기 위한 전통민속놀이의 체험경기화, 읍면별 체육경기로 대별되어 개최되어 오고 있으며, 지역전통민속의 보존·전승을 위해 뗏목, 숯굽기, 갈이남박 만들기등의 산촌지역의 생업민속을 시연하고 있다.

 

박인환시비

 

"박인환 시인은 인제가 낳은 시인이며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31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수십편의 시는 이 나라 모든 이의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고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어 놓았다.

그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 , "세월이 가면"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짙은 애정을 갖게 하고 사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인제 군민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활짝 꽃 피우지 못한 시혼을 달래고 영원히 그와 함께 하기 위하여 작은 정성을 모아 시비를 건설하는 데 동참하게 되었다.

시비를 건립하기 위하여 당시 문화원장이었던 김진용 씨를 위원장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 학생과 사회 단체 그리고 지역 주민의 동참 속에 모금을 하고 군비와 도비를 지원받아 일천칠백오십팔만원의 예산으로 건립을 하였다.

시비는 자연석으로 박인환 시인의 "구름"이란시의 이미지를 살린 구름 모양의 자연석으로 전면에 "박인환 시비"를 음각하고 후면에는 "세월이 가면" 시를 음각하였다. 처음에는 군축령 및 아미산 공원에 건립하였으나 도로 확장으로 현 위치인 98년도 가을 합강 공원에 이전 건립되었다...인제군청

 

박인환

박인환 그는 1926년 8월 15일 소양강 상류에 위치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 159번지의 강촌 마을에서 4남 2녀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1세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고 14세때 경기중학교에 입학 1941년 3월16일 경기중학을 그만두었다. 그 후 한성학교 야간부에 잠깐 다니다가 다시 황해도 재령령에 있는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이후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으며 그는 종로3가 2번지 지금의 파고다 공원애서 조금 떨어진 교동골목입구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열었다가 2년만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서점을 하면서 문단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후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는 계기가 된다. 1946년 『군상』을 발표 『아메리카 영화시론』등 영화평을 쓰기도 하였으며, 1949년 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기수로 활동했다. 1949년 "경향신문"의 기자와 1951년 종군기자로 활약하였으며, 이때 『박인환 선시집』이 간행되었다.

1956년 3월20일 저녁9시 그는 세종로의 자택에서 눈을 감지 못한채 심장마비로 급사하였다. 그는 8·15 해방후 혼란의 소용돌이와 6·25 전란의 황폐 가운데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 70여편의 시를 남겨 한국현대시의 맹아를 키워냈으며,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현대시의 토착화에 기여하였고 문학사에 큰획을 그어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인환시인 시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수십편의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박인환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1988. 10. 29 인제읍 남북리 아미산공원에 시비를 건립하으나 국도터널공사에 의해 1998. 6. 20 현재의 합강정 소공원에 이전·건립하였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201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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