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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인제군

인제...설악산 백담사

by 임병기(선과) 201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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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인제 북면 용대리까지 나홀로 답사는 쉽지 않아 차일피일 인연을 미루어왔었다. 다행히 인드라망 님들의 사찰순례팀에 동참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어 인연짓게 되었다. 첫날은 용대리에서 백담사행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봉정암으로 바로 향했다. 인드라망 사찰순례 이틀째. 봉정암에서 조물주가 조각해 놓은 절경을 따라 나홀로 3시간 만에 도착한  백담사. 입구의 지극한 염원을 담은 돌탑들이 먼저 반겨준다. 대청봉으로 부터 흘러 내리는 계곡에 백개의 담潭(못)이 있어 백담사百潭寺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하지만 만해선사의 이름만으로도 설레이던 백담사는 전두환 대통령의 유배지(?)로 인해 숱한 이야기가 민초들에게 회자되는 백담사百談寺가 되어버려 유쾌하지만은 않다.

 

 

수신교. 수신修身은 그렇다치고 세심洗心은 어쩔건지. 누군가의 발원으로 가장 큰 보시인 월천공덕으로 놓여진 다리. 외양과 달리 하부에는 난림공사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여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일주문을 차량으로 통과한 탓에 백담사 출입문처럼 여겨지는 금강문. 편액은 무림 김영기선생의 작품이다.

 

 

밀적금강(흄금강).문수동자

 

 

나라연금강(아금강). 보현동자

 

 

대구 우록의 남지장사. 거창 가조 고견사처럼 솟을 문이 이채롭다. 금강문이 있음에도 솟을문을 조성한 목적은 무엇일까? 옛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금강문이 조성되기 전에는 산골 절집의 출입문 아니었을까? 극락보전 아미타불 복장유물로 추정해보면 어느 왕족의 원찰로 서원 향교 부조묘의 출입문처럼 솟을문을 조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지만 내게는 단정할 에비던스가 없다.

 

범종루. 누하주를 낮게 조성하여 루라 부르까요? 각으로 칭할까요?

 

설악산에 있는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이, 이 절도 647년(진덕왕 1)에 자장 율사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창건 당시에는 절이 현재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자장 율사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한 다음,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하였던 것이다.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 한계사는 불타버렸고, 30년 가까이 빈터만 남아 있다가 719년(성덕왕 18)에 중창하였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종연(宗演) 광학(光學) 스님 등이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5년 만에 절을 중건하고 운흥사(雲興寺)라 하였다. 그러나 987년 심원사(深原寺)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 네 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아래로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를 세우고 선구사(旋龜寺)하 아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靈鷲寺)하 하였다. 그러나 1455년의 여섯 번째의 화재로 영축사가 불타자, 이듬해 재익(載益) 재화(載和) 신열(愼悅) 스님이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고 지금처럼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最鵬)태현(太賢)?태수(太守) 스님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香閣)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 하였으며, 1783년(정조 7) 절 이름을 백담사로 다시 바꾸었다.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때까지 7차에 걸친 화재를 당한 연유로,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으로부터 먼 곳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의 백담사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거듭되는 화재로 고심을 하고 있던 사승(寺僧)의 꿈에 어느 날 노승이 나타났다.

 

현몽한 노승은 대청봉에서 1백 개째에 있는 웅덩이[潭] 옆에 절을 세우라고 하였다. 이튿날 스님은 노승이 점지한 대로 절터를 잡아 중건하고 절 이름 또한 웅덩이 ‘潭’자를 넣어 백담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백담사에는 오랫동안 화재가 없었다. 그러나 1915년 겨울밤에 일어난 화재는 불상과 탱화 20여 위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과 경전?범종까지 모두 태웠다. 당시의 주지 인공(印空) 스님은 오세암에 머물면서 백담사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기호(基鎬)와 인순(仁淳) 스님 등이 강원도 일대를 다니면서 받은 시주금으로 1919년 4월 법당 20칸과 화엄실(華嚴室) 25칸을 지었으며, 1921년 봄에는 법화실(法華室) 16칸을 비롯하여 응향각(凝香閣)사무실 등 30칸을 이룩하고, 종과 북을 새로이 주조하여 낙성법회를 열었다. 한용운 스님이 백담사사적을 편찬한 1928년 당시의 백담사는 복구가 끝나고 정리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근대에 이르러 백담사는 한용운 스님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사상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57년 대웅전과 법화실 화엄실을 중건하였다. 특히 이 절은 1988년 12월 전직의 전두환 대통령이 은거하여 2년 동안 머물게 됨에 따라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백담다원

 

 백담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1957년의 중건 때 지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계 겹처마의 건물이다. 본래 대웅전이라 하였으나 1991년 증축불사 때 지금처럼 극락보전으로 편액을 바꾸어 달았다. 1987년에 만든 정면문의 꽃창살은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으며, 외벽에는 수행자가 본성을 찾는 것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폭의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불단에는 설법인을 결한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불단의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과 지장탱화를 봉안하였으며 왼쪽에는 신중탱이 걸려 있다.   

 

 

이분합 꽃창살

 

 

극락보전 외벽. 심우도

 

아미타삼존불

 

많은 순례객. 예불을 올리시는 스님.초 쌀을 판매하시는 보살님. 여유를 가질고 뵐 수 없었다.

백담사의 극락보전안에 주불로 봉안되어 있는  목불좌상은 조선 영조24년인 1748년에 조성된 아미타목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정상계주가 큼직하게 솟아있고 육계의 구분이 불분명하며, 나발이 촘촘하게 표현되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여 당시의 사각형적이고 평판적인 얼굴보다 우수한 편이다. 또한 눈이 가늘고 입이 작으며 코가 돌출하여 독특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다.

 

 

상체는 가슴이 넓고 어깨가 둥글어 당당한 인상을 주지만 다소 평판적인 당시의 특징을 따른 것이며, 하체의 앉아있는 형태는 넓고 큼직하며 상체와 조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당시의 목불상 가운데 대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두손은 시무외 ·여원인에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을 짓고 있고 두발은 결가부좌하고 있다. 통견의 불의는 두꺼운 편인데, 옷주름이 돌출하고 어깨의 Ω형 주름과 무릎사이의 주름들이 곡선적으로 처리된 점, 그리고 가슴은 U자형 중복주름이나 가슴의 내의상단주름의 곡선적인 주름들은 조선초기의 특징이 내려온 것으로 이 불상을 좀더 돋보이게 한다.

 

저고리앞면

출처...문화재청

 

이처럼 18세기 전반기의 불상가운데 수작으로 평가되는 이 목불상은 복장품을 갖추고 있어서 특히 주목된다.

복장유물(腹藏遺物)은 만자소화(卍字小花)무늬의 노란색단 삼회장저고리는 1748년(영조 24년) 저고리로서 상태가 매우 아름답고 색상이 선명하며 바느질상태가 고르다. 등길이 37.5㎝, 화장은 75㎝, 품은 41㎝, 저고리 깃은 만자소화문(卍字小花紋)을 한 노란색 호박단이고 깃과 곁마기는 만자운용문(卍字雲龍紋)자색단이다. 끝동은 만자소화문(卍字小花紋) 자색단, 고름은 떨어져 없으나 고름달렸던 자리가 2.5㎝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름이 있었다(너비 2.5㎝). 일반적으로 삼회장저고리일 경우에 깃과 곁마기와 고름은 같은 옷감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 고름도 깃과 같은 만자운용문(卍字雲龍紋) 자색단이었을 것이다.

만자문(卍字紋)은 길상만복(吉祥萬福)이 모두 모인다는 뜻이다. 이 만자(卍字)는 사단(四端)에서 횡으로 선을 연장하여 만자(卍字)를 서로 연결한 장각만자문(長脚卍字紋)으로 도안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저고리의 만자문(卍字紋)도 장각만자문(長脚卍字紋)이다. 이러한 장각만자문(長脚卍字紋)은 만불도두(滿不到頭), 또는 부귀단두(富貴斷頭)라고도 한다. 그래서 장각만자문양(長脚卍字紋樣)은 무한한 행복을 뜻한다. 대부분의 장각만자문(長脚卍字紋)은 소화문(小花紋)을 섞어서 도안하는데 이 노랑 삼회장저고리에서는 소화문(小花紋)을 국화문의 단순화한 소화(小花)를 사용하여 도안하였다.

저고리 주인공은 깃과 곁마기의 만자운용문(卍字雲龍紋)자단색으로 보아 궁중의 왕족이거나 왕실과 관계된 신분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저고리는 당대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기타 복장물은 유리와 수정등의 파편 수백점을 보자기에 싼 것으로 복장물로 대체한 것이다.

 

 

 

무너진 석탑을 보수하였다. 단층기단으로  위에는 장방 형의 판석이 놓여 있다. 중대석에는 양우주가 있으나 탱주 는 없다. 갑석하면은 호형으로 몰딩하였으며, 상면에는 탑신받침을 각출하고 있다. 탑신과 1·2층의 옥개석이 같은 탑의 부재이고 3 층옥개석과 기단부가 같은 탑의 부재로 보인다.

 

옥개석은 모두 3단 의 옥개받침이 있고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반전하며 상면에 1단의 탑신받침이 각출되어 있다. 탑신에는 모두 양우주가 각출되어 있다. 상륜에는 복발이 보인다. 3층 이상의 탑이었을 가능성과  2개 탑 부재를 조합한 느낌도 있다.

 

 

탑신의 양우주.두터운 3단 옥개받침. 모서리에 풍탁공이 보인다.

 

 

옥개석에 비해 탑신이 작아 균형감이 떨어진다.

 

 

 

신심이 돈독한 불자들의 염원이겠지만 탑 주변에는 공양대를 철거하였으면 좋겠다. 솟을문에서 바라보면 극락보전 중정이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로 탑을 둘러싼 공양대 때문으로 보인다.

 

화엄실.

 

극락보전 중정 좌우에는 화엄실과 종무소인 법화실이 맞보며 백담사의 중심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화엄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배(?)생활 의 거처이기도 했다.  봉정암에서 하산하는 순례단을 기다리며 툇마루에 앉아 있는 동안에 거의 모든 사람이 육두문자에 가까운 험담을 던지고 지나갔다. 

 

 

권력무상,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제행무상이라 했거늘.

 

산령각

 

극락보전 오른쪽 뒤편에 나한전이 자리한다. 잘 다듬어진 기단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을 세웠다. 창호는 정자(井)살창을 짜아 각 각 사분합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옆면에는 이분합의 문을 달아 출입을 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천정은 반자로 마감하였다. 안에는 석가삼존상을 중심으로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나한이란 아라한을 의미하며 응공(應供)으로 한역되며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자'라는 의미이다.  안에는 금동 석가여래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와 뒤쪽에 1960년에 조성한 18나한상을 비롯한 500나한상, 시봉, 신장 등이 모셔진 불단이 있다. 중앙의 삼존불은 석가모니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상이다. 

 

불화로는 1927년에 조성한 나한탱이 있다. 그림에는 모두 130분의 나한상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오백나한도의 일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래의 백담사에는 이와 같은 불화가 세 폭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화 속에 그려진 한 스님 한 스님의 표정은 하나같이 뚜렷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고, 손모양이나 자세가 모두 다르다. 비록 오래된 작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오백나한도가 흔치 않다는 현실에 입각해 볼 때 이 탱화는 잘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미계를 받은 사미 스님들이 구족계를 받아 비구스님이 되기전  공부를 하는 듯 했다. 길게 열을 지어 나한전에 들려 예불을 올린후 각자 포행을 떠나는 모습도 보였다. 자유분방한 전각밖의 분위기와 달리 엄숙함이 가득해 발길이 조심스러웠다.

 

 

만해시비 뒷편에 놓인 옛 백담사의 유물들로 보인다. 석종형부도가 과연 제자리인가? 영시암 가는 방향 좌측에 외로히 서있는 부도 옆으로 모시면 좋을 듯하다. 이건 예의가 아니며 방치나 다름없다.

 

 

만해기념관

 

 

시비와 흉상

 

 

나룻배와 행인(行人)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홍성 만해 생가 마루에도 액자속에 나룻배와 행인이 놓여 있었다. 님의 침묵이 걸려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고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숱하게 암송했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만해 한용운

 

1879(고종 16)∼1944. 승려·시인·독립운동가.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아버지는 응준(應俊)이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애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1914년 ≪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활동사항

그의 혁신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불교행정조직혁신론 : 한용운이 활약하던 1910년 초에는 친일적 색채를 띤 원종(圓宗)이라는 불교종파가 생겼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 불교의 원류가 하나임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동화정책에 교묘하게 영합하였다. 그는 그들에 대항하는 길은 사찰 중심의 현재 조직이 전교(傳敎)와 행정에 있어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사적 원류로 보아 일본 불교는 종파적 특색을 가진 데 비해 한국 불교는 선교 융합적 특색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일제의 <조선사찰령>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에 넘어갈 추세였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규약·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일제의 야욕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고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이후에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결실된 것이다. 비록, 대다수 승려들의 개혁적인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큰 실효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탁견(卓見)이었다.

오늘날에는 조계종·태고종·천태종·진각종 등 한국 불교의 대부분 종단은 이 총무원제도와 본사제도를 병행하는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다.

 

② 사원운영의 혁신론 : 불교가 시대를 계도(啓導)하려면 그 운영과 조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유신의 골자이다.

사원 운영에 있어서 첫째로 염불당(念佛堂)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근본 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변재(遍在)한 법신불(法身佛)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둘째로 불교의식의 개혁이다. 많은 다라니(陀羅尼)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또 대부분의 다라니가 산스크리트(Sanskrit) 음역(音譯) 위주로 암송되고 있어서 그의 한글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셋째로 승려의 취처(娶妻)이다. 생활 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

 

③ 청년불교의 제창 : 엄밀한 의미로 한국 근대불교에 있어서 불교청년회를 조직한 것은 그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친일적 경향의 원종에 대항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한 것은 1914년이었다.그 강령을 보면, 첫째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 불교통일, 셋째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이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모체(母體)를 청년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그는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 해외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중국 등지에 해외 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④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 :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다. 한국 불교는 그 동안 오교구산(五敎九山)이니 선교 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듯이 오도(誤導)하여왔다.그러나 선과 교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실천이 불교 진흥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실수(實修)에 있어서 외전(外典)을 첨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한국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여야 한다고 보았다. ⑤ 경전의 한역 :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이다. 현대 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그가 쓴 ≪불교대전≫은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이 책은 요즈음에 간행되는 ≪불교성전≫의 효시인 셈이다. 그의 노력은 광복 후에 결실을 보아 한글대장경 사업을 촉진시켰으며, 불교 근대화에 결정적 공헌을 한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불교학 진흥을 위하여서는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용운의 대표작인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의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주장은 90여 년 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탁월한 불교개혁책이라고 인정받고 있다.그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현실화되었는데 종단행정의 단일화를 위한 노력이 곧 총무원으로 나타났고, 승려 자질 향상은 오늘날 여러 방면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 국역(國譯)의 중요성 강조는 숱한 불교성전의 편찬과 함께, 역경원(譯經院) 등의 발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과격한 부분이 없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첫째, 사원 운영의 조직에서 염불당 및 불필요한 법당을 타파하라는 주장인데, 그것은 이상론이다. 불교의 근본 교리로도 무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다양한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다. 오히려, 그 사상성을 고양(高揚)시키려는 노력 대신에, 단순히 지난 과오를 매도하는 태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둘째, 승려의 대처(帶妻)에 관한 주장인데,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청정한 교단은 독신 수행승에 의하여 주도하여온 것이 우리 불교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취처(娶妻)를 합법화시키는 일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이른바 이판(理判)이니 사판(事判)이니 하는 승려의 자격 기준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적절한 개혁책이었지만, 보편타당한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국, 그는 악과 부조리의 사회현실을 타파하려는 노력의 결심으로 이 ‘불교유신’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무질서한 불교교단의 통제를 주장하였고, 이른바 불교현대화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의 실천적 불교정신의 응결이 바로 청년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비록 다소간 혁신적 사상이 가미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독창적이었고 위대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또, 불교인의 일반적 신앙자세를 탈피하여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중교화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불교인으로서 그만큼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의 암울한 시대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의 위대성은 한층 돋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전혀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그의 여러 주장들은 오히려 1960년대 이후부터 빛을 발하여 현대불교의 이론적 근거로서, 또 실천윤리의 강령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한용운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혁신론자로서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예언자적 가치를 부여받기에 충분한 불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뜻이다.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를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시 도처에는 부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즉 ‘못한다·아니한다·없다·말라’ 등의 부정적 종지법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유와 비극적 세계인식은 그가 당대 사회를 모순의 시대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이며, 이에 대한 타파와 극복만이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일관된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정신은 그대로 시를 통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상징화된다. 이별이 더 큰 만남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였던 것과 같이 부정은 참다운 긍정과 생성을 이룩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저항시로서 만해의 시의 참된 면모가 드러난다.

 

한편, ≪님의 침묵≫의 또 다른 특징은 신성과 세속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님의 침묵≫의 전편을 통독하면 많은 시구가 대중가요와 같은 느낌을 준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와 같이 신성 지향을 갈망하면서도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정감이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그것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또한 ≪님의 침묵≫에는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 바로 이 지점에 참된 민중시로서의 만해의 시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님의 침묵≫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체는 물론 여성운이 활용되고 여성적인 상관물(相關物)들이 등장하는 등 여성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불교의 관음사상 또는 인도의 여성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한시·가사·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한과 눈물의 애상적 정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정철(鄭澈)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주의의 <사미인곡>을 쓴 것처럼, 한용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화한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저항과 극복정신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여성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애한의 정조는 실상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응전(應戰) 방식일 뿐 내면에 흐르는 선비정신으로서의 저항정신 및 극복정신과 조화되어 한국 문학의 총체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만해의 시의 저항시로서 가치를 가지며, 또한 전통시와 상관관계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아울러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Tagore, R.) 등 외래 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실상 그의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창조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시의 은유와 역설 역시 서구의 것보다도 전통시에서 연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주체성을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밖에 그는 현대시 <님의 침묵>과는 별도로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죽음>·<흑풍>·<박명>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는데 이들 역시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 있어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상황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하여 참으로 값진 교훈이라 하겠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의지와 저항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은 그의 시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자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시정신과 미학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갈 것이 확실하다.

 

 

백담사. 고성 건봉사 옛사진

 

 

극락보전 뒷편 연지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인연짓게 해준 인망님들에게 거듭 고마움을 전한다.

()()()

 

2012.06.23

***문화재청.백담사 홈페이지.전통사찰관광정보.문화유적총람.인제군청.네이브 백과사전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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