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원도/양양군

양양...진전사지 삼층석탑.도의선사 부도

by 임병기(선과) 2012. 9. 17.
728x90
728x90

 

2006년 3월의 답사기를 가져왔다.

 

진전사지..한없는 그리움으로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서둘러 길을 나섰다. 텅 빈 고속도로를 달려 넓은 목장이 펼쳐진 대관령을 넘으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이순원 작가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을 떠올렸다.  강릉이 고향인 작가가 초교생인 아들과 함께 60리 굽이굽이 대관령을 넘어면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소설로 구성한 내용으로 대리만족을 했던 기억이 남는다. 나도 언젠가 아들과 함께 동행하고픈 길이었는데 초교생이던 아들이 고 3이 되었건만 오늘도 못난 아버지는 혼자이다.

 

 

양양 38선 휴게소

 

내륙에 태어난 놈이라서 나이와 무관하게 바다는 늘 새로운 느낌이지만 38선은 더더욱 무거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통일을 기대하는 소박한 마음이겠지. 민족의지와 상관없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제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잘려버린 허리를 반세기가 지나도 봉합수술은 커녕 의사놈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니...

 

1950년 10월 1일 3사단 23년대가 38선을 넘어 북진한 날짜를 기념해서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는 안내문이 해풍을 동반한 추운 날씨보다도 더욱 나를 초라하게, 춥게 느끼도록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양양 기사문 바다

 

젊은 날에는 바다보다 백사장이 좋았는데, 언제부터인지 바다뿐만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 시선에 집착하고 있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주관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텐데, 깊고, 넓으며,노련하게 생, 삶을 관조하는 시각으로 왜곡, 포장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부 전선으로 부터 155마일 휴전선을 순례한 노산 이은상 선생이 동해안 고성(?) 바닷가에서 더 나갈 수 없음에 초병과 더불어 목 놓아 울었다는 그 바닷가, 그 느낌은 아니라도 소리내어 울고 싶은 까닭을  로맨티스트의 감정으로 여긴다면, 착각일까? 건방일까? 아니면 노망일까?

 


진전사지 삼층석탑/문화재청

 

멍청한 중생!! 분명히 박았건만 3층탑은 박히지 않아 문화재청 사진을 가져 왔다.

 

작년 TV 앞에서 눈물 뿌렸던 낙산사 화재 상흔을 애써 외면하고 진전사 초입에 이른다. 내가 진전사지에 몰입하는 이유가 뭘까? 폐사지는 전국에 산재하고, 이형의 석탑 역시 흔하디 흔하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고 석조미술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도의선사 부도 때문으로 믿고 싶다.

 

우리문화 매니아들은 익히 알겠지만 선종의 흐름은 종조 달마대사--혜가--승찬--도신--홍인까지는 선맥을 같이 하지만 6조에 이르면 북종선의 신수, 남종선의 혜능으로 분가되며, 신라하대에 혜능의 법종손인 서당 지장에게 공부하고 귀국한 가지산문 도의선사, 실상산문의 홍척선사에 의해 선종이 태동하게 된다.

 

물론, 도의선사는 법제자 염거화상의 제자인 체증선사가 보림사를 창건후 가지산문 종조로 모셨으며, 도의선사 이전에 4조 도신에게 공부한 명랑법사 제자이며 희양산문 개산조 지증 도헌의 스승인 신행선사가 도의선사보다 앞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내게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옛님의 숨결 방에서 수차례 언급했지만 신라하대에 도입되어 제도권에 흡수되지 못하던 선승들은 왕권이 약화되어 득세한 지방호족 세력과 결탁 누구나 부처가 될수 있다는 쇼킹하고 센세이션한 이론으로 사세를 넓히게 된다.

 

이러한 선종 사찰 특징이 철불, 조사당, 부도, 이형석탑이며  진전사지 부도가 우리나라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 부도로 추측되고 있기에 내게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는지 모르겠다.

 

삼층탑 상기단

 

신라 전형의 2기단, 3층탑신, 네개의 옥개석 받침을 갖춘 3층탑은 상기단 면석에 2구의 팔부신장이 힘주어 앉아 계시며, 옥개석 처마 반전이 부드러우며, 풍탁 자국이 남아 있다.

 

삼층탑 하기단

 

하기단 면석에는 연화대좌와 광배를 갖춘 비천상이 구름속을 여행하고 계신다.

삼층탑 1층 몸돌


몸돌 면석에는 여래좌상이 좌정하여 중생들을 굽어 살피신다.  몹시도 추운대도 불구하고 진전사지는 따뜻함이 가득 넘쳐난다. 

傳도의선사 부도


산불감시 초소를 지나 저수지 방죽 맞은편 산길을 오르면 새로히 불사한 진전사 건너 산자락에 눈에 익숙한, 너무도 뵙고 싶었던 부도가   연화문을 양각한 배례석 뒤에 자리하고 있다.

 

傳도의선사 부도로 알려진 진전사 부도는 부처 진신사리, 법신사리를 모셨던 초기 불탑 기단 양식 위에, 스님의 부도를 모신 초기 팔각원당 형태 몸돌, 옥개를 함께 갖추고 천년세월을 간직하고 계신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면 어떤가?

솔바람소리마져 사치로 여겨지는 것을......

 

2006.03.14

 

======================================================================================

 

아직 여러 이론이 있지만 나는 '도의선사 분사리'라는 최완수 선생 이론을 좋아하는 언양 석남사 부도를 문화재청에서 옮겨오니 우리님들 참고하길 바란다.

 


석남사 부도/문화재청

 

"석남사 동북쪽 언덕의 넓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찍부터 석남사를 세운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불려왔다.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을 취하고 있으며, 8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塔身)을 놓은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사자와 구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고, 그 안으로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 신장입상(神將立像)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기단부의 가운데받침돌에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공간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남은 것이 없었다"... 문화재청

2006,03월

 

 

2012년 7월 마지막 날. 칠년만에 다시 찾은 진전사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이다. 오랫만에 다시 찾은 큰 사찰이 화려한 불사로 인해 옛모습을 잃은 모습을 보면 어떤가? 첫사랑 소녀를 세월이 흐른후 완벽한(?) 아줌마로 변한 모습으로 만났을 때 감정과 오십보 백보 아닐까? 하지만 세월이 흘렀어도 진전사지 석탑은 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까무짭잡한 첫사랑 소녀의 모습으로 그렇게 남아 있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진전사지.진전사는 도의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정해오지만 정확한 사적은 알지 못한다. 선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통일신라  헌덕왕 13년인 821년 이후라고 추측할 뿐이다. 또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에 진전사에서 출가하였다고 전한다. 도의선사는 왜? 이골짝으로 찾아 들었을까?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이지누의 "절터 톱아보기" 등의 여러 자료에는 문경 봉암사의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법손 체징의 탑비 에서 그 해답을 구하고 있다.

 

최치원 비문 “… 빛을 지붕 아래 숨기고, 종적을 협소한 곳에 감추었는데, 동해의 동쪽에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에 은둔하였으니 (是用韜光下 斂迹壺中罷思 東海東終 遁北山) …”라고 했으며

 

김영(金穎)이 쓴 보조 체징의 탑비에는 “…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에게 부촉하였다.(是知時未 集隱於山林 付法於廉居禪師) …”

 

고려의 문장가인 이규보는 ‘용담사에서 행하는 총림회방(龍潭寺叢林會榜)’이라는 글의 시작을 도의선사가 선법을 전한 이야기로 풀었는데 “… 진전사에서 입정하여 심인을 몰래 전한 뒤에야 선법이 비로소 우리나라에 펴지게 되었다.(遂入定陳田寺 蜜傳心印 然後禪轍始輾于東土矣) …”고 했다.

 

 

탑은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날아갈 듯한 옷을 입은 천인상(天人像)이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구름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웅건한 모습의 8부신중이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1층 몸돌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문화재청

 

하기단 비천상

상기단 팔부중상

초층 몸돌 여래좌상

상하기단 비천상,팔부중상

초층몸돌 여래좌상

상하기단. 초층몸돌

탑신

 

 

이상국...진전사지 가는 길

 

웃대문턱 둔전 지나

열네살 一然이 머리 깎으러 갔다던 그 길로

설 지난 눈발 속에 한떼의 염소들이

수염을 흔들며 울고 간다

다랑 논배미들

동해로 떠내려갈까봐

제 몸 돌무더기로 눌러놓고

봄을 기다리는데

나라가 바뀔 때마다 몸을 다친 석탑이

찬바람에 알몸을 씻고 있다

천년도 전에 唐물 먹은 중이

설악 동쪽에 탑을 쌓았다는 절간 내력을

오늘은 웬 서양 것들이 와 보겠다고

한글 옆에 영어까지 써놓았으나

나는 글이 짧아 못 읽겠구나

때로는 이 조막만한 삶도 막막하여

이른 봄 추위를 뚫고 천년 절터를 찾았다만

역사도 일연도 보이지 않고

눈 덮인 설악이

길을 막고 돌아가라 하네

 

 

도의선사 부도

 

진전사지에서 예전처럼 한 여름 뙤약볕을 맞으면서 옛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하지만 지금은 진전사 주차장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며 그곳에서 100여m 거리에 부도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신라하대 구산선문 절집과 지리산 연곡사에 남아 있는 팔각원당형 부도와 거리가 멀다. 아직까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석탑 기단부를 응용한 형태이다. 도의선사 부도는 선종의 유입으로 정착된 팔각원당형 부도의 시원을 엿볼 수 있는 부도인 것이다.

 

도의선사에 관한 글을 불교신문에서 가져왔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조(宗祖)인 도의국사(道義國師)는 중국의 남종선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여와 선법을 펼친 해동선문(海東禪門)의 초조(初祖)로 추앙받고 있다. 통일신라 말 고려 초, 불교사상의 흐름이 ‘화엄’에서 ‘선’으로 바뀌는데 일조했고, 면면부절(綿綿不絶)한 우리나라의 남종선의 흐름을 시작시킨 시원(始原)에 해당하는 스님이다.

 

하지만 도의국사의 사상과 행적을 알려주는 자료는 드물다. <조당집>에 의하면 도의국사는 어머니가 임신한 지 39개월 만에 태어났다. 도의국사는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북한군출신이다. 속성은 왕씨, 법호는 명적(明寂), 시호는 원적(元寂)이다. 도의국사는 일찍이 출가해 784년(선덕왕 5년)에 사신인 한찬호, 김양공 등과 함께 중국 당나라로 건너갔다.

 

육조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서당지장 선맥 신라에 전해

나말여초 화엄에서 禪으로의 불교사상 흐름 바꾸는데 일조

 

곧바로 중국 오대산으로 건너가 문수보살로부터 감응을 받았다. 당시 중국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주석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당나라 초기에는 화엄종의 중심지가 돼 많은 고승들과 사찰이 번성한 불교성지였다.

 

그 뒤 도의국사는 육조혜능선사가 <육조단경>을 설하며 선법을 펼쳤던 광부 보단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화엄종 승려로서 당나라에 들어간 도의국사가 보단사에서 다시 구족계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전의 화엄불교를 버리고 조사선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도의국사는 조사선을 수행하면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지식을 친견해 깨달음을 얻고 그 심요를 전수받았다.

도의국사가 혜능선사의 주석처였던 조계산으로 넘어가 혜능선사를 모신 조사당을 참배하려하자 갑자기 문이 열렸고 예배를 세 번 드리고 나니 문이 저절로 닫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시 홍주 개원사(현 난창 우민사)로 가서 서당지장선사를 찾아 수행의 의문점을 묻고 해답을 얻은 도의국사는 지장선사의 법맥을 잇는다. 지장선사는 도의국사를 만나 마치 돌속에서 아름다운 옥을 도른 듯하고 조개껍질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듯 하다며 기뻐했다.

 

지장선사는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 전하랴”라며 도의국사에게 인가를 내렸다. 이후 백장회해선사를 찾아 법요(法要)를 강의 받았는데 회해선사는 “강서(江西, 馬祖道一)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가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즉 도의국사는 육조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서당지장스님 등으로 내려오는 선맥을 신라땅에 들어오게 됐다.

 

도의국사는 37년간의 중국 구법 여정을 마친 뒤 821년(현덕왕 13년) 통일신라로 귀국해 선법을 펴고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의국사가 신라에서 선의 이치를 설파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경전을 숭상하고 절대신을 관조하는 법에 익숙해 있던 당시 사람들은 국사가 설파하는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위임운은 인위적인 조작과 시비분별을 떠나 자연스러운 불성의 움직임에 순응하는 것이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그 자체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지를 세상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의국사는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은둔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도의국사의 제자인 염거선사는 보조체징선사에게 도의국사의 선법을 전했다. 도의국사의 선법은 체징선사에 의해 전남 장흥 보림사에서 만개된다.보림사는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의 근본도량. 체징선사가 입적한 지 3년 뒤인 883년 제자 의초선사 등이 행장을 지어 올리자, 헌강왕은 시호를 보조라하고 사호(寺號)를 보림사라고 하사했다. 사호를 보림사라고 명명한 것은 동국 선종의 총본산임을 인정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육조혜능선사가 주석한 조계산 보림사가 중국 선종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이렇게 해서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의 초조로 추앙된다. 도의국사의 선법은 손상좌 대에 이르러 꽃이 피지만 도의국사가 뿌린 ‘남종선’이라는 씨앗은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면면부절하게 이어진다.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스님은 <불교> 제70호(1930)에 발표한 ‘해동초조에 대하야’를 통해 “도의국사가 해동초조”임을 밝혔다.

 

도의국사의 선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교학불교에 대한 부정이다. 둘째는 조사심인법(祖師心印法)의 수립이다. 교학불교에 대한 비판에서 도의국사는 화엄종의 사종법계와 55선지식이 행하고 설한 법문을 부정한다. 당시 교학불교의 대표적 종단인 화엄종의 교의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조사심인법의 수립에서는 무념무수설(無念無修說)을 강조했다.하지만 교학체계에 대한 부정은 곧 주사심인법을 주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도의국사의 사상적 특징은 무념무수의 사상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기단

몸돌

 

탑은 일반적인 다른 탑과는 달리 8각형의 탑신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기 위한 8각의 돌을 두었는데, 옆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다.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볼 때 우리나라 석조탑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은 데서 오는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명쾌하다...문화재청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2012.07.31 

 

728x90
728x90

'강원도 > 양양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양...개운사지 부도  (0) 2017.08.23
양양...오색리 삼층석탑  (0) 2012.09.19
양양...서림사지 석탑. 석조 비로자나불  (0) 2012.09.15
양양...선림원지  (0) 2012.09.13
양양...오봉산 낙산사  (0) 2010.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