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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양양군

양양...서림사지 석탑. 석조 비로자나불

by 임병기(선과) 201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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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답사기가 남아 있다.

 

선림원지로 가는 도중에 찾지 못했던 서림사지 석탑,석불을  돌아나오다  상평초등학교 현서분교 뒷편 백엽상과 나란히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지자체 문화행정은 내마음에 1/10도 채워지지 않는 것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 대부분 지자체 현실은 산길,들길을 물어물어 수차례 시행착오 후 찾은 문화재 앞에는 예외없이 번듯한 안내문이 버티고 있지만 그것은 찾아오는 과정을 철저하게 도외시한 처사가 아닐수 없다.

 

또한 불과 100m 옆 문화재가 훤히 보이는 도로변에 대형 입간판이 흉물스럽게 어깨에 힘을 주고 탐승객을 노려 보거나, 대책없이 5km 후방에 입간판을 세워 놓고는 당신 꼴린대로 찾아가시요! 식의 문화유산 이정표가 비일비재한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안내문의 오기는 애교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건방진 심사일까? 지자체 홈페이지에 건의를 하면  천편일률적으로 계획중, 예산 미확보라는 답변이니 이제 여력도 없다. 알아서 삼키고 소화하여 즐기면 그뿐인데......

 

서림사지지 문화재도 우리나라 여러지방 교정에 자리한 문화유산 처럼 학교 주위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60년대에 식자층인 교직원들에 의해 학교로 옮겨온 것이다.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안태고향이 있으니 훼손이 되었지만 복받은 석불과 석탑이다. 

 

서림원지 삼층탑,석불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시절 이건했기에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많이 부족하다.  석탑,석불을 나란히 안치하거나 석탑을 뒷편에 자리한  배치는 결코 옳은 구도는 아닐 것이다. 사진 뒷편 삼층탑은 1기단,  얕은 모서리 기둥, 낙수면은 급경사이며, 4*4*3의 옥개석 받침, 상륜에는 노반이 보인다.  

불두가 멸실된 석불은 수인 형태로 보아 법신불인 지권인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로 보인다. 석불은 하대석 안상에 사자가 양각되어 있고, 중대석에는 보살인지 여래상인지 모호한 불보살이 보인다. 

 

비로자나석불 후면

 

 마지막 신라인으로 칭송받았던 윤경렬 선생이 그러셨던가? 불두가 사라진 불상은 측면, 후면에서 바라 보거나 머리를 가리고 정면에서 감상하라고....

 

답사후기를 올리려고 다이어리 메모글을 보니 도대체 정체불명의 내용을 알 수 없는 한자[斜形附錄'(사형부록)]가 보여 양양군청 홈에 들어갔더니 서림원지 삼층탑 설명문에 비슷한 한문['斜形附緣'(사형부연)]이 있다. 기단 갑석을 설명한 것으로 내용인즉 '갑석 아래에는 물매(기울기)가 있는 서까래 모습이 새겨져 있다'라고 표현한 것일진데, 그렇다면 斜形附椽(사형부연)이 옳지 않은가?

 2006.03.14

 

 

 

6년전과 달리 평창 봉평- 홍천 남면-구룡령-선림원지를 경유 서림사지 석탑과 비로자나불이 남아 있는 상평초교 현서분교 교정에 도착했다. 행정구역은 서면 서림리로 오래전 폐사된 사찰명에서 동리가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과 삼층석탑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논에 있던 것을 1965년 최정규(崔正圭) 교장과 주민들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사지는 조선 정조 때 편찬된 ≪현산지(峴山誌)(규장각도서)≫ 에 서림사(西林寺)로 나타나고 있다고 전한다. 서림사지 불상 주변에는 기둥주춧돌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며, 금동약사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어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없어졌고 몸도 손상이 많은 상태이다.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싼 형태로 보아 비로자나불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8각형의 대좌(臺座)는 결실된 부분이 있지만 조각솜씨가 매우 우수하다. 밑받침돌 위에 4매의 석재로 구성된 하대석을 올려 놓았는데, 각 면마다 1구씩의 사자를 돋을새김하였다.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에 1구의 향로와 7구의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중대석 위에는 별도로 8각의 딴 돌을 놓았는데 이것은 원래 중대석 받침돌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별도로 중대석 받침을 만든 예는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청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24호)처럼 9세기 중엽의 대좌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전한다.

 

하대석 안상의 사자상

 

 

중대석의 향로와 불보살상

 

 

하대석 위의 부재.

 

이 부재가 앙련을 새긴 상대석으로 보인다.

 

 

중대석 불보상 위의 부재가 중대석 받침으로 추정된다.

 

 

지금이라도 상대석과 중대석받침을 제자리로 옮겼으면 좋겠다.

 

 

비로자나불이 바라보는  곳이 안태고향이다.

 

 

탑은 단층기단위에 세운 3층석탑으로, 탑신 폭이 좁고, 옥개석의 낙수이 급경사로 둔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네 귀퉁이이 반전은 경쾌하다.기단부는 4매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구축하였으며, 그 위에 1매석으로 된 하대석을 두었고, 상면에는 1단 받침을 각출하였다. 상기단 면석과 옥개석은 한 개의 돌이다. 기단과 탑신의 1·2층 몸돌 모서리에는 양우주를 새겼다.  

 

옥개받침은 1·2층 4단, 3층 3단의 받침을 두었다. 2층 옥개석과 3층 몸돌,  3층옥개석과 노반받침이 한개의 부재이다.  노반의 상면중앙에는 방형 찰주공이 있고, 별도의 석재로 만들어진 노반의 상부에는 원형의 찰주공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고려시대 후기에 세운 탑으로 추정되어 비로자나불과 동시대에 봉안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단~초층 옥개

 

 

노반~2층 몸돌

 

 

신라전형 삼층탑의 안정감은 떨어지고 세장한 기운이 확연한 고려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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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지고 한 맺힌 사연을 품고 살아왔지만 옛님이 살아 갈 세월은 영원하기에 모두 수용하고 이해하고 용서를 할 것이다. 그런 화해의 장은 우리가 마련해주어야 하거늘 왜 그냥 저렇게 방치해야만 하나? 앞 뒤를 구분한다면 석불을 뒤로 모시고,  비로자나불 중대석 대좌와 상대석 위치를 바꾸면 좋겠다. 그리고 불신과 어울리는 불두를 모시면 금상첨화이며 화룡점정이겠지요!!!

201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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