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원도/양양군

양양...선림원지

by 임병기(선과) 2012. 9. 13.
728x90
728x90

 

 

진부 IC 앞에서 숙박후 아침 일찍 도리천님이 안내해준 장평 IC - 봉평 -  홍천내면 보래령터널 - 구룡령 -  미천골 자연휴양림을 경유하여 일사천리로 선림원지에 도착했다. 휴가철이어서 출입이 자유롭지못했으며  휴양림 출입하는 사람은 무조건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30분 내로 나오면 환불해준다고 했다. 30분?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설상가상 카메라 고장으로 스페어 카메라로 다시 찍고 느긋하게 내려왔더니 입장료를 그냥 환불해 주어 적은 금액이지만 기분이 좋더라. 선림원지는 변함이 없었지만 홍각대사 탑비 비신이 복원되어 있었다.

 

2006년 3월 답사기를 먼저 보자.

 

양양 서면 성황당

 

저멀리 밭자락 모퉁이 소나무 아래 성황당이 보여 차에서 내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모두들 떠난 동네를 굿건히 지키고 있건만 처연한 기운이 감도는 까닭은 무엇인지? 성황당은 마을 동구 또는 마을숲에 당산나무, 솟대, 조산탑과 함께 어우러져 신성공간으로 자리잡은 우리의 전통 민속 신앙이다.

 

마을의 안녕, 무병장수,제액초복, 풍요,기자 신앙을 염원하는 제의 공간이며, 마을의 허한 기운을 비보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성황당은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갈 때 미신이라는 미명하에 가장 많이 훼손된 전통 민속신앙이었지만, 최근에 우리것을 찾는 사람들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복원이 이루어진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어제 원주 신림면의 성황림 답사시에 안내해주셨던 마을 노인회장 어르신은 성황당은 매년 4월8일, 9월9일 두차례 왼새끼로 꼰 금줄에 길상지을 꼽아 제를 올린다고 말씀하셨다. 특정 날짜의 의미는 선대로부터 전해와서 이유를 모른다고 하셨지만 사찰의 산신각이 민간토속신앙을 사찰에 습합했듯이 4월8일은 석가모니 탄생일을 선택한 것 같고, 9월9일은 양수에서도 가장 큰 9가 겹친 날을 택일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대부분 지역의 성황당을 비롯 민속신앙에서는 일년중 음기가 가장 강한 정월 보름에 지난해 가장 복을 받고, 흉사가 없는 집안 사람을 제관으로 뽑아 제를 올린다. 멀지 않아 이농으로 젊은 사람이 사라진 마을 동구밖에 성황당만 마을을 지키지는 않을지, 농경사회의 부산물이라도 잊혀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인데...

 

탱크 저지 방어벽

 

감상에 젖은 마음에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듯 탱크 저지 방어벽이 보인다. 25년전 경기도 연천에서 군생활을 했으므로 눈에 익숙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리는 그런 느낌이 전신을 휘감는다.

 

우리문화유산에서도 특히 나의 관심분야인 민속의 성황당에 받은 따뜻하고 감상적인 느낌을 접고 경건하고 엄숙한 자세로 미천골 선림원지를 순례하라는 암시는 아닌지?

 

선림원지


길은 고사하고 산짐승도 찾아들기 어려웠을 신라하대에 홍각선사는 무엇때문에 강원도 양양 하늘아래 첫동네 같은 이곳에 가람을 중수했을가? 선사 이전에 가지산문의 종조 도의,염거,이미 장흥 보림사를 창건한 체증선사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일까?

 

서라벌 제도권에 이입이 힘든 당나라 유학파 스님들도 비록 변방이지만 선종 사찰을 창건하여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홍각선사는 호족의 도움도 기대하기 힘들고, 인적도 드문 겨우 손바닥 만한 옹색한 터에 절집을 세운 까닭은 동양제일의 선종 가람을 열겠다는 의지 표출이었을까?

 

폐사지에서의 의문은 끝이 없겠지만, 오대산 상원사에 보관중 6.25 동란 때 불탄 선림원지 동종이 떠오른 것은 현존하는 신라시대에 종이 상원사 동종, 에밀래종 밖에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삼층탑


선림원지 주추만 남은 금당터 앞에 자리한 삼층탑은 연화문이 고운 배례석을 갖추었다. 상하기단에는 모서리 기둥과 한 개의 버팀 기둥을 세웠고, 상륜부 노반, 보주가 보이며, 상기단 면석에는 팔부신상이 양각되어 있다. 선종 도입과 더불어 유행한 이형석탑은 신라하대이건만, 동시대 탑은  옥개석 받침이  대부분 4개로 줄어드는데 선림원지 삼층탑은 전성기의 전형인 5개다.  하지만 선림원지 석탑이 영원히 기억에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바로 '보물 444호'이기 때문이다.

 

홍각선사 부도 기단


금당터 오른족에 몸돌 위를 잃고 기단만 남은 홍각선사 부도는 화려하다. 안내문에 의하면 부도 중대석에 표현된 운용문의 시원이라고 한다. 지대석위에 안상이 새겨진 팔각의 하대석의 복련, 상대석에는 앙련이 모각되었으며, 몸돌 괴임은 2단이며 조성(886년)시기를 알 수 있어 귀중한 부도다.

석등


신라시대 석등 간주석은 팔각, 고복형으로 대별된다. 어떤 까닭인지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처럼 팔각원당형은 신라 영토에, 고복형 석등은 백제 옛땅에서  자주 나타난다. 즉 지리산 자락 화엄사, 실상사, 동호인들에게 담양 정자와 가사문학 답사시 꼭 들리라고 일러주는 개선사지 석등이 고복형으로 팔각의 화사석,  옥개석 귀꽃이 크고 화려한 공통점도 있다.

 

간주석과, 화사석이 어제 조성한 듯 하얗게 빛을 발하는 선림원지 석등도 고복형 간주, 팔각의 화사석, 귀꽃, 화창이 4개로 화엄사 석등 유형이고, 옥개석 귀꽃만 없다면 안내문에 고복형을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동형이라 표기한 해인사 입구 매화산 청량사 석등과 닮았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주전각 앞 탑과 일직선상에 배치되는데 선림원지 석등은 금당터와 떨어진, 석축으로 미루어 별도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어 선종사찰에서 중시했던 전각 조사당 앞에 불을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석등 뒤에는 조사당 건물터 주초가 남아 있다. 

부도비 귀부, 이수


구산선문 사찰 부도비처럼 비신이 멸실된 홍각선사 부도비는 화려한 이수에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제액이 있으며 귀부는 힘이 넘치고 머리 위에는 뿔을 세웠던 홈 자국, 육각형 문양의 등, 비신받침의 안상, 꼬리는 휘말려 치켜들고 있다.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석축이 석등이 있는 영역과,  계곡에서 금당터로 오르는 곳에 튼실하게 자리잡고 산지 가람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다지만 선풍이 더 높았던 시절에는 가릉빈가 노래보다 아름다운 법음(法音)을 은은하게 울렸을 동종도, 삼층탑 처마끝에서 산새소리, 바람소리 벗삼아 잔잔하게 가람터를 법열로 가득채웠을 풍경도 사라졌지만, 선림원지에서도 한 없는 그리움의 끝을 알 수 없어, 나는 그리움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2006.03.14

 

 

이지누의 폐사지 톱아보기 글에는 간단명료하게 선림원지를 묘사하였다.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터는 화엄과 선종이 만나는 곳이다. 804년, 교와 선을 오갔던 순응화상이 종을 만드는데 참여했는가하면 우리나라 선종의 조종(祖宗)이라 불리는 도의선사의 선법을 이어받은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 체징 그리고 873년에 절집을 다시 일으켜 세운 홍각선사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로 미루어 초기 선종이 화엄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짐작 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 절터에는 3층 석탑과 석등 그리고 홍각선사의 부도라 짐작되는 부도탑의 대좌가 남아 있으며 홍각선사의 탑비 중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3층 탑 뒤로는 금당터가 석등 앞에는 조사당터의 주춧돌이 빈자리를 지키고 있다.

홍각의 것이라고 짐작되는 부도탑의 운룡문은 빼어나다. 나라 안에서 드물게 보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부도탑과 여주의 고달사터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을 포함한 부도탑 2기가 중대석을 운룡문으로 장엄한 것이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로 미루어보면 홍각은 혜목산문(惠目山門), 곧 봉림산문(鳳林山門)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할 수도 있다. 그 또한 여주의 고달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조선사 체징과의 관계를 보면 그는 가지산문에 속하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체징은 도의선사에게서 이어지는 염거화상이 세운 억성사인 이곳 선림원에서 선정에 들었으며 47대 헌안왕 4년인 860년 장흥에 보림사를 세우며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었던 인물이다. 홍각은 이미 체징이 가지산문을 세운 10여년 후에 선림원으로 들어 와 금당과 불전을 이루었으니 그들이 직접 만난 적은 없을 테지만 이어지는 선법을 끊지는 못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절터는 아래로는 축대를 쌓고 위로는 비탈진 경사면을 깎아 만들었다. 또 법계를 중시하는 선종의 영향으로 선종사찰에 어김없이 지어졌던 영당 혹은 조사당터가 석등 앞에 남아 있어 선종사찰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양양의 진전사터와 산청의 단속사터와 마찬가지로 초기 선종사찰들이 모두 경주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깊은 산 속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기득권을 지닌 화엄의 배척 때문이었다. 선림원터가 미천골 깊은 곳에 자리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금당지와 석탑

 

한 장 건진 탑사진이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여러 장의 돌로 탑의 토대를 만들고,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둘로 나눈 뒤 8부중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체감되고 각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고,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 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이 있고, 철제찰주을 꽂았던 구멍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보주 돌이 있으나 원형이 아닌 듯하다. 외형상 정제된 비례를 보여주지만 8부중상의 조각은 섬약하고 석재의 구성도 규율성을 잃고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나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복원공사가 진행되기 전 기단부에서 소탑 60여 기와 동탁1개가 발견된 일이 있다. 탑 앞에는 안상을 새긴 배례석이 남아 있다...문화재청

 

하기단

상기단 면석

상기단 면석

탑신과 옥개

배례석

 석탑 원경

홍각대사 부도

 

일제강점기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승탑임을 알 수 있는데, 신라 때에 돌로 만든 승탑은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중간받침돌·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기단의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승탑으로,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승탑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승탑의 건립시기는 절터에 남아있는 홍각선사비와 이 승탑이 홍각선사의 승탑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 정강왕 1년(886)인 것으로 볼 수 있다...문화재청

 

간주석, 상대

지대석.하기단

 

사진 우측 주초가 조사당지로 추정하고 있다. 부도 철불과 더불어 구산선문을 비롯 선종사찰에서 중요시하는 전각이 조사당이다. 그렇다면 선림원지 어딘가에도 철불이 묻혀 있을 것이다.

 

석등

 

선림원터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등이다. 선림원은 신라의 옛 절로, 이 곳에서 출토된 신라범종을 통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했던 순응법사(順應法師)에 의해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지금은 이 터가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여러 유물들이 남아있고 각종 기와와 토기조각들이 아직까지도 발견되고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8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경사진 면은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운데, 귀꽃조각과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다.

지붕돌이 일부 탈락되긴 하였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으로 흐른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1호)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같은 절터내의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문화재청

 

기단.하대.중대.상대

화사석.옥개

 

홍각대사 탑비

 

2006년 사진에는 비신이 없었다. 이후 복원한듯 보인다.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이다. 선림원터에 있으며,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와 비몸, 비머리돌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비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몸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비머리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인데 신라 후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문화재청

 

귀부

귀부와 비좌

이수.제액

홍각대사 탑비

 

선림원지에 가서...이상국

 

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채는

아직 면산(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경전(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武林)으로 돌아가네 

 

2012.07.31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