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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양양군

양양...오봉산 낙산사

by 임병기(선과) 2010.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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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산불이 사내로 다가오는 장면을 티비에서 가슴조리며 바라보아야했던 안타까움, 끝내 동종이 화마에 녹아내리는 장면에 울분을 토해내었던 그 아프고 한심했던 기억에 두 어번 스쳐가면서도 차마 들리지 못했었다. 얼마전 복원하였다는 소식과 건칠관음이 명주사에서 옮겨왔다는 것을 알고 명주사 방문시에 불현듯 관음보살이 보고 싶어  이제 인연을 지었다. 일주문을 비켜서 진입하여서인지  옛기억속에 절집이 아니어서 마음 마져 산란했다.  태백준령을 거쳐 우뚝 선 설악산 줄기가 마지막 기를 응집한 오봉산 그 품안에 낙산사는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로서 해변에 위치하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낙산은 산스크리트의 보타락가(補陀洛伽 Potalaka)에서 유래한 말이며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을 뜻한다.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의 하나인 낙산사는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낙산사 창건 이후 이 절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원효(元曉), 조신(調信),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의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이 절은 858년 범일에 의해 중건된 후 여러 차례 불타 중건이 거듭되었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고,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 지역에서 발생한 큰 산불로 낙산사원장·원통보전·일주문·낙산사홍예문 등 주요 전각과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고, 낙산사 7층석탑이 일부 손상되었다.

 

 

홍예문

 

유일하게 기억속에 남아 있는 홍예문이다.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에는 1963년 세운 누각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루이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고 세워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언제 일까? 그날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화마의 흔적이 경내에 수북히 쌓여 있다. 고교시절 수학여행의 기억, 책가방 속에, 빛 바랜 앨범에 담겨 있던 추억도 멀어져간 심정이었다. 초교시절 나와 여행을 했던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 아이들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의 고운 추억은 오래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낙산사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에 관한 일화가 전해온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당나라의 침공 사실을 알고 귀국한 의상대사와  원효에 대한 일화 내용이 서로 다르다.  오늘날 제도권과 비제도권, 친여인사와 재야인사의 차이일까? 아무튼 두 설화를 비교해보기 바란다.


의상대사(625~702)는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때 가장 존경을 받았던 유명한 고승이다 그는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불법을 배우고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많은것을 깨닫고 670년에 귀국한 분이다 그는 귀국 후 관세음보살님이 머물고 계신다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落山寺)앞 바닷가로 가서 목욕 재계하고 절벽에 있는 굴 입구를 향하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관세음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한 기도를 올렸다

7일째 되는날 새벽 이제 관세음보살님께서 광림 하실 때가 되었음을 느낀 의상대사는 기도할 때 깔고 앉았던 방석을 물 위에 뛰우자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들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굴 속으로 인도 하였다. 텅 빈 굴 안에서 의상대사는 공중을 향해 합장을 하고 절 하였다.어쩐 일인지 관세음 보살님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벌만 하사 하였다. 의상대사가 수정염주를 받아 가지고 굴 밖으로 나오려는데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보주 한개를 바치는 것이었다

의상대사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아! 나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구나. 의상대사는 다시 7일을 더 기도한 뒤 또 굴 안으로 들어가 3일 동안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자 기도했다 그러자 드디어 관세음보살님께서 모습을 드러내고 서 의상대사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그대가 서 있는 곳 바로 위 산 꼭대기에 대나무가 두그루 솟아 있을 것이다.그곳에다가 절을 짓도록 하라.

의상대사는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합장을 하고 굴 밖으로 나와 산위로 올라 가보니 과연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나 있었다 그는 이곳이 참으로 관음진신께서 머무르시는 곳임을 확인하고는 그 곳에 터를 닦고 절을 지었다.
이 절이 바로 관음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지금의 강원도 양양 낙산사(落山寺)이다. 의상대사는 낙산사를 창건한 후 관세음보살님의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법당에 모셨는데 그 원만하고 아름다운 상호가 꼭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그러자 대나무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 뒤, 원효(元曉)대사가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곳 낙산사를 찿아왔다. 처음 원효대사가 남쪽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였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농담삼아 그 여인에게 벼를 좀 달라고 하자 그 여인도 흉년이 들어서 쭉정이 밖에는 없다고 농담 삼아 말 하였다.

원효대사는 좀 언짢았다. 다시 원효대사는 그 곳을 지나 낙산사 쪽으로 가다가 다리가 놓인 시냇가에 이르렀다 다리 밑에서 한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그여인 곁으로 다가가서 물 한 모금을 청하였다.그런데 그여인은 깨끗한 물을 떠 주는 것이 아니라 빨래를 헹군더러운 물을 떠 주는 것이었다

원효대사는 몹시 불쾌하여 망설일 것도 없이 얼른 그물을 버리고 위에서 다시 맑은 물을 떠서 마셨다 바로 그 때였다.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에서 푸른 새 한 마리가 지저귀면서 말했다. 제호(醍호,훌륭한 음료수)를 버리다니, 화상은 관음보살 친견은 단념하시오," 그 소리를 들은 원효대사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니 새는 간 곳이 없고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새가 울던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대사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목적지인 낙산사에 도착하여 법당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께 합장하고 절을 하려는데, 관음보살상의 좌대 아래에 또 한짝의 신발이 떨어져 있는게 아닌가? 이에 원효대사는 비로소 앞서 만났던 두여인이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새가 울었던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 원효대사는 또 전에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던 굴 속으로 들어가 다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 하고자 했으나, 풍랑이 너무 심하여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효대사는 끝내 다시는 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복원의 모델. 단원의 낙산사...출처/다음

 

낙산사...이성선

 

원효는 서울을 버렸다.

의상도 서울을 떠났다.

세상 복판에서 다시 삶의 파도 끝

오봉산 자락에 의상은 바다 향해 앉았다.

새 깃털처럼 땅을 떠돌던 원효

그도 설악 기슭에 굴을 파고

산을 향해 앉았다.

장난꾸러기 원효가 고개를 돌려

동해 의상을 향해 웃음을 흘리고

의상은 천의 팔을 바다에 집어 넣어

해와 달이 그의 몸을 밟고 올라와

원효의 산 쪽으로 가게 했다.

가까이 보면 등은 떨어져 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하나로 등이 서로 맞닿아

이상하게도 무지개가

한 끝은 바다에 한 끝은 산에 내려

두 스님이 이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조그만 나의 집은

이 무지개가 지붕이다.

수레를 타고 가고 있는 너와 나

의상은 죽어서 해뜨는 부상에 앉고

원효는 함지에 누워 노래한다.

 

 

화마도 비켜 간 낙산배 시조목. 조선 성종(1469~1494) 때 낙산사 지역을 중심으로 재배된 낙산배는 임금님께 진상 될 정도로 맛이 좋아 황실리(黃實梨)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그 유명한 ‘낙산배’였다. 경내에 기념비를 세웠다.

 

 범종각

 

산불을 용케도 피했지마 화마의 생채기를 품은 노송 몇 그루. 그 옆 천왕문은 아직도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 스님들과 불자님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차라히 복원하지 않고 영구히 그대로 보존 하면 어떨까?.

 

그날의 아픔을 가장 처절하게 보여주었던 범종각의 동종 자리에는 신방이 마련되었다. 사라져 버린 동종 다시 보고 싶지 않으세요.?

 

출처...다음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이 그의 아버지인 세조(世祖)를 위해 낙산사(洛山寺)에 보시(布施)한 것이다. 종의 꼭대기에는 꼬리를 튼 용 두 마리가 뒤엉켜 종을 달아 매는 용뉴(龍紐)를 이루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寫實的) 형태를 보이고 있다. 종 몸체는 세줄의 굵은 선으로 위아래로 나누고 있다. 위 부분에는 연화좌(蓮華座) 위의 보살상(菩薩像) 4구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그 사이사이에 범자(梵字)를 배치하였고, 어깨 부분에도 범자을 도드라지게 돌렸다.

 

출처...다음

 

아랫부분은 하대를 돌리고 그 안에 구름무늬(雲紋)와 물결무늬(波狀紋)를 새겼다. 긴 문장의 명문(銘文)에 글은 김수온(金守溫)이 짓고, 글씨는 정난종(鄭蘭宗)이 썼는데 조선 예종(睿宗) 원년(元年) (1469)에 만들어졌다는 내용과 함께 이 종을 만든 조각장(彫刻匠)과 주성장(鑄成匠)이라는 장인(匠人)들의 계급관계(階級關係)를 밝히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만들어진 동중의 하나로 조선 시대의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資料)이다.

 

 

 

빈일루.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다. 전총무원장 지관스님의 글씨로 현판을 걸었다. 단원의 그림속에도 나오고,  1888년 선학스님이 중건했지만 흔적없이 우리곁을 떠났던 빈일루는 1912년 해성스님이 또 세웠으나 한국전쟁의 전화를 입어 소실되었다가, 무슨 인연인지 산불로 인해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된 전각이다. 

 

 

응향각. 길을 찾는 님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전각 

 

낙산사 가는 길 2 ...유경환

절간
추녀 끝
달에 끌려 간다

눈짓 같은
물빛
풍경소리

바람처럼
추녀 끝
끌려 가누나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원통보전은 원통전(圓通殿), 혹은 관음전(觀音殿)으로도 불리며,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다.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 원통보전은 전쟁직후인 1953년, 당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관음보살의 원력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과 군인들,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복구된 것이었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 따르면,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 뒤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開山祖)인 범일(梵日, 810∼889)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고려의 명유(名儒)인 이규보 등이 새롭게 관음상의 복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원통보전 내에는 건칠관세음보살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는데, 2003년 2월 3일 보물 제 1362호로 지정되었다.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도가 걸렸으며 그밖에 관음상 주위로는 오른쪽에 신중탱화(1959년)와 동종(銅鐘), 사진본으로 된 의상대사 진영 등이 조성되었다.

2005년 4월 화마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주지 금곡 정념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의 노력으로 건칠관세음보살상은 안전한 곳으로 봉안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봉 선사의 글씨

 

 

원통전 소맷돌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낙산사 원통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상으로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금속제 팔각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하품중생인의 아미타인을 짓고 있다.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지는 이 상은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하고, 삼도(三道)가 뚜렷한 목과 두드러진 가슴, 가냘픈 듯 섬세한 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른 내의 깃과 등 뒤에까지 화려하게 장식된 영락 등은 이 상이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작임을 짐작케 해준다.

 

온몸에 걸친 화려한 구슬장식과 착의법(着衣法) 역시 조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상호(相互)가 빼어나다. (불상의 크기 112.0×76.0cm)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 되었다.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월정사팔각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담장도 복원되었다.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최근에 연결·보수하였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길이 220m이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위·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층의 길게 다듬은 돌기단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긴 받침돌을 놓았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싸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담장

 

해수관음상은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川王像)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甘露水甁)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해수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약700여 톤을 운반해와 조성한 것이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기도처인 관음전이 있다.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송강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671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낙산사”와 낙산사 창건 당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에 설치하였다는 “의상대”, 의상대사가 홍련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설치한 “홍련암” 등 낙산사의 곳곳에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의상대와 홍련암은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노송(老松)들이 자리하고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떠오르는 일출 경관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낙산사 주요 경관 요소이던 낙락장송이 2005년 강원지역의 큰 산불로 소실되어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으나, 의상대 및 홍련암 주변 해안에는 시스택(sea stack)이 발달하여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 문화재 글은 문화재청, 낙산사 홈에서 가져왔습니다.

 

201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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