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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양양군

양양...영혈사

by 임병기(선과) 201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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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혈사 [靈穴寺] (양양)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회일리 323번지 설악산(雪嶽山)에 있는 사찰 설악산 동남쪽 관모봉 아래에 있는 영혈사(靈穴寺)는 원효 대사가 설악산에 와서 처음 일출암(日出庵)을 짓고, 2년 뒤인 689년(신문왕 9)에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이어서 청련암(靑蓮庵)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686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영혈사사적기』에 기록된 창건연대는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사찰측에서는 원효대사가 입적한 혈사(穴寺)가 바로 이 절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또한 사적기등 그 어떤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영혈사의 끝 두자가 ‘穴寺’이고 이 절이 원효대사의 창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추정을 할 수도 있지만, 전국의 사찰 중 ‘혈사’라는 명칭이 많으므로 지금으로서는 단정할 바가 못 된다.

 

창건 이후 1천년 동안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으며, 1688년(숙종 14)의 화재로 영혈사는 불타버렸다. 1690년 취원(聚遠)스님은 절을 중건하고, 법당 서쪽에 영천(靈泉)이 있음을 들어 절 이름을 영천사(靈泉寺)로 바꾸었으며, 절의 동남쪽에 취원암(聚遠庵)을 창건하였다. 1716년에는 학천(鶴天)스님의 절 북쪽 10리 지점에 학소암(鶴巢庵)을 창건하였고, 1764년(영조 40)에는 묘각(妙覺) 스님이 절 서쪽 기슭에 백학암(白鶴庵)을 창건하였다. 사적기를 통하여 볼 때 영혈사가 가장 활성화되었던 때는 이때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후 영혈사의 사세(寺勢)는 차츰 줄어들었다. 1826년(순조 26)에는 학소암을 폐지하였으며, 1853년(고종 4)에는 백학암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신도 김중욱(金重昱)이 산신각을 중수하였다는 기록만 전한다.

 

영천사에서 다시 영혈사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1887년(고종 24) 지화(知和)·도윤(道允) 스님이 퇴락한 절을 일신 중수하고 난 다음부터이다. 그 뒤 1900년에는 신도 김우경(金禹卿)이 산신각을 중수하였고, 1903년에는 보훈(普訓) 스님이 칠성계(七星?)를 창설하여 28인으로부터 모은 계금(?金)으로 밭 75두락(斗落)을 매입하여 이 절의 항공양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1904년에는 신도 김우경이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1912년 대본산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되어 명맥을 이어오다가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낙산사 관음보살

 

그러나 치열한 설악산전투 속에서도 이 절은 기적적으로 피해를 면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이절에 봉안되어 있던 관세음보살 좌상은 전화를 입고 다시 건립한 낙산사 원통보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그 뒤 1887년의 중수 때 건립한 원통보전과 선실 겸 요사로 사용하던 건물 2동뿐인 아담하고 자그마한 절로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1992년의 중건불사를 통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거쳐 이제 다왔거니 라고 생각했는데 산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비록 포장은 되었어도 잘못 진입하였다는 의구심이 엄습할 즈음 강원도 산골절집 느낌이 아니라  도회풍의 색조의 영혈사가 얼굴을 보여준다.

 

 

아미타 삼존불

 

 

인기척에도 요사의 나이 어린(?) 스님은 요지부동으로 공부에 몰두하고 계신다. 그래도 궁금은 해소해야하기에 여쭈었다. 동안의 스님 말씀에 의하면 오층탑은 몇년전에 조성하였다고 했다. 사이버를 검색하여도 2006년 10월 탑이 있는 자리에는 소나무가 있다. 이탑은 어디서 왔을까? 아니 나는 어디서 정보를 얻어 오층탑을 보러 왔단 말인가?

 

 

 

경찰서 5층석탑? 춘천 경찰서에 있던 탑에 대한 설명이다. 일치하는가?

춘천시 효자 1동 590번지 춘천경찰서 담장에 있는 석탑이다. 각 몸돌과 지붕돌은 별도의 석재로 만들었고 다만 상륜부의 노반과 보주만이 3층 지붕돌과 같은 돌이다. 1층 몸돌과 그 하부 부재는 모두 결실. 지붕돌의 반전이 크나 우동의 기울기가 없고 낙수면만이 있어 멀리서 보면 방형석재를 5단으로 쌓아 놓은 모습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양식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알려진 보살사 5층 석탑과 광주의 증심사 범자 7층 석탑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탑의 일정한 체감률은 안정감과 우아함을 동시에 지니게 하고 있다. 각 몸돌은 표면과 모서리를 기계로 치석하였기 때문에 지붕돌의 표면과는 다르고 석질도 다르다. 2층 몸돌의 4면 모두에 글씨를 가득 새겨 두었는데 근년의 일이다.

 

북쪽면과 남쪽면은 춘천의 유지 명단과 기공자의 명단이 가득 새겨져 있다. 동쪽면은「祖國統一」이라고 쓰였고 서쪽면은 ‘정원축조 기념 단기 4290년 경찰의 날’이라고 새겨 놓았다. 이는 단지 4290년인 1957년에 탑이 어떤 형태로든 변형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단지 지붕돌과 몸돌이 서로 다른 점으로 볼 때 1957년 정원축조 기념의 날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양양군 화일리에서 지붕돌만을 가져와 몸돌을 새로 조각하여 완형을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탑에서는 고려 이전의 탑파가 갖는 특징적 양식은 없다. 즉 지붕돌 받침이 모든 층에서 생략된 점, 지붕돌에서 반전은 있으나 우동의 기울기가 없어 판석을 쌓아 놓은 듯한 점, 상륜부가 석종형 부도에 가까울 만큼 약식화 되고 모서리 기둥과 버팀기둥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이는 불교가 기층사회로 깊이 파고 든 조선시대 후기의 어느 암자에서 원탑으로 세운 탑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자료는 양주지에서?자심은 안심암에 있는 승려의 당호이다.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극진하여 모친 별세 후 돌을 깎아서 탑을 세웠는데 매일 같이 그 아래에서 극락세계를 가시라고 기도를 드렸으므로 자심탑이라고 하여 영혈사 노승 여담이 전하여 왔다?라고 했다. 또 郡誌에서?지금 이 탑은 강원도 경찰국에 이전되었고 초석만이 남아 있다?라 했다.

 

  

 

 

지장전 앞의 충령각?

 

동해 36지구대 북파공작 요원 195위의 호국영령 6.25전쟁 발발로 육군 정보국 소속 첩보대대(4863대대) 창설되었으며, 동해지역을 관할하는 36지구대에서 휴전 직후 까지 정보 및 무장 첩보대원으로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고급 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북한군의 고위 인사를 납치하는 등 목숨을 건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사, 순직한 대원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이 사당을 건립하였다.매년 초파일에 인근 군부대 요인들이 참석하여 합동위령제를 올린다고 한다.

 

 

지장전 후벽 사신도는 방위개념 보다도 풍수 좌향이 아닐까?

 

남 주작. 동 청룡

 

 

북 현무, 서 백호

 

 

건칠 관음보살을 낙산사로 모신 탓인지 꽃담마져 낙산사를 연상시킨다. 뿐만아니라 재미 있는 설화도 전해온다.

이 절에는 특히 약수가 유명해서 이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원효가 이 절을 창건하고 의상()이 머물고 있는낙산사 홍련암 을 방문하였다. 그곳에 물이 매우 귀한 것을 보고 지팡이로 영혈사의 샘물 줄기 중 일부를 낙산사쪽으로 돌렸다. 이후 영혈사 샘물의 양이 3분의 1로 줄었고 낙산사에는 물이 풍부해졌다고 한다.

 

201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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