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진천군

진천...노원리 석조보살입상

임병기(선과) 2012. 7.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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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면 노원리 408-2 궁골마을 뒷편에 계신다. 마을에서 만난 몇 분의 어르신들이 한결 같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어 다른 지역의 이방인 경계 공포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뵙고 왔다. 언제나 그러하듯 접시꽃만 보면 어느시인이 생각나 쓴웃음을 지었다. 궁골宮谷 지명으로 미루어 분명 전설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디지털 진천문화대전에 등재된 달빛에 물든 이야기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라 세조(世祖) 홀필렬(忽必烈)[쿠빌라이칸]은 중국에서 황후감을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고려의 한 지역에 아름다운 서기(瑞氣)가 어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홀필렬이 이상히 여겨 측근에게 물어보니 귀인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홀필렬이 부하를 데리고 서기가 어린 옥녀봉 아래에 와 보니 서기가 기골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기씨 처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홀필렬은 기뻐하며 기씨 집에 찾아가 부모에게 절을 올리고 사위로 삼아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부모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였으나 기씨가 은근히 바라는 기색이라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기씨 처녀를 황후로 맞이한 홀필렬은 황후의 부모를 위해 기씨가 탄생한 지역에 웅장한 궁궐을 세웠다. 그 궁궐을 세운 곳이 바로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궁골마을이다. 지금은 묵정밭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도 땅을 파면 부서진 기왓장이 나온다고 한다.

이와는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어느 날 아침 홀필렬이 세수를 하고 있는데, 공중에서 까치가 두어 번 울더니 세숫대야에 단추 한 개를 떨어뜨리고 갔다. 그 단추는 옥으로 만든 것이었고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홀필렬이 세수를 다한 후에 의관을 정제하려다 보니 옥관자(玉貫子)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기씨가 세수를 할 때 까치가 두어 번 울고 갔는데, 세수를 한 후에 저고리를 입으려고 보니 단추가 없어져 있었다. 또 며칠 후 세수를 하는데 또 까치가 울더니 세숫대야에 옥관자를 떨어뜨렸다. 기씨가 이상히 여겨 옥관자를 비단 헝겊으로 쌌는데, 이상한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홀필렬은 옥관자를 찾으려고 점성가를 불러 알아보았다. 점성가가 하는 말이 동쪽 어느 처녀가 옥관자를 가지고 있는데 황제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며, 동쪽으로 서기가 어린 곳을 찾아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점성가의 말을 들은 홀필렬기씨를 찾아갔다. 홀필렬기씨의 단추를 자신이 가지고 있고, 자신의 옥관자를 기씨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홀필렬은 그동안 중국 여자와 수차례 결혼을 했으나 첫날밤이 지나면 여자가 어김없이 죽고 말았었다. 그러던 중 육척 장신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행동이 호걸남아와 같은 기씨를 보고서 홀필렬기씨가 자신의 천생연분임을 깨닫고 기씨를 배필로 맞이하게 되었다

 

 

궁골마을 뒷편은 미륵불과 당목. 우물을 주민들이 신성한 공간으로 모시는 듯 보였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도 벽사의 상징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미륵불과 당목 우물(용정)앞 제단에는 주민들이 정성으로 올린 과자 향 초공양이 민심을 담아 하늘하늘 피고 있었다.여기는 궁골 민초들에게는 마음의 안식처요, 미륵의 상주처이며, 때로는 마을의 문화가 계승 전승되는 놀이의 장이며, 화해와 용서의 공간일 것이다.

 

 

불신에 비하여 불두가 지나치게 크게 조성되어 매몰된 하반신을 짐작케 한다. 상호는 거의 정방형이며 보관을 쓰고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백호공 흔적이 남아 있고, 눈·코·입의 윤곽이 또렷하게 살아 있다. 궁골에서 살다간 민초들의 얼굴 처럼소박한 모습이다. 불신은 양감이 없으며 팔과 손도 분명하지 않다. 법의 역시 마멸로 인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가슴과 불신 하단의 나비매듭은 뚜렷하여 밋밋한 불상의 법의에 포인트를 주었다. 양 손목에는 팔찌를 끼고 있는 듯하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있으며,  왼손은 어깨까지 치켜 올린 모습으로 아미타 구품의 하나로 보인다.

 

 

동쪽을 향한 불상과 넓은 대지 등 여러 정황으로 보아 불상 주변 일대가 절터로 보이지만 지표 조사 결과 기와 조각이나 주춧돌과 같은 절터로 추정될 만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으며 단지 자기 조각만 수습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시대에 유행했던 보살상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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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데자뷰라고 했다. 아마 증평 남하리의 불상에서 바라보았던 풍광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어딜까? 이 분위기와 흡사한 불상을 분명히 보았었는데.

201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