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 보탑사에 들렸을 때는 가건물만 몇 동 있었다. 아마 공사중에 다녀온 듯하지만 진입공간마져도 낮설었다. 진천을 4~5차례 답사하면서도 보탑사 준공 후에는 이번이 처음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3층 목탑이 연꽃 꽃술처럼 보인다. 보탑사홈페이지. 문화재청 디지철진천문화대전 글을 참조 하였습니다.

보탑사는 대동여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충북 진천군 진천읍 보련산 자락의 연꽃골(蓮谷里)에 우뚝 서 있습니다. 연꽃골은 진천읍에서 서쪽으로 약 12km 되는 곳에 있으며, 가는 길에 김유신장군 생가터가 있으며 보탑사 못미처에는 큰 저수지가 있어 풍광이 빼어난 곳입니다. 특히 이 연꽃골이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에 단 3기 뿐 인 백비(비문을 새기지 않은 비, 보물 제404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분명한 고증자료는 없지만 옛 절터였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보탑사를 짓기 전에 실시한 지표조사 때 많은 와당이 나온 점과 산의 이름이나 지명 등으로 보아 확신할 수 있습니다


2004년 카페에 올렸던 보탑사 상량문을 다시 읽어 보자.
탑은 하늘을 우러러 사람들이 쌓아 올리는 정성입니다. 불기 2538년(단기4327, 서기1994) 9월 9일. 오늘 좋은 날 깨달음의 길, 화합의 길을 열 보탑사 탑의 상량을 합니다.
깨달음의 길, 화합의 길은 온 우주법계의 극락입니다. 보탑사 불자들은 이 극락을 향해 정성으로 탑전을 지어 올립니다. 인연공덕은 미묘해서 서로다른 얼굴을 한자리에 모이게 합니다. 대한민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바로 연꽃골 옛절터! 옛날에도 눈밝은 이들이 있어 서기가 감도는 연꽃골에 작은 절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늘의 해를 안으려는 땅의 기운이 하늘에 닿지 않는 꽃술을 밀어낸 까닭이었나 봅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한 삼선포교원에서 지광, 묘순, 능현스님 등 대중스님들과 부처님 법문을 마음으로 익히고 몸으로 베풀려고 다짐한 불자들이 마음의 먼지를 닦아내고 정혜 결사하듯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이들 서로 다른 불자들이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보탑사 심주에 모시고 또한 신묘장구대다라니, 반야심경, 무궁정광대다라니경, 멸죄청정주, 소재길상다라니, 향마진언, 대원성취진언 등 대중이 정성을 다한 사경을 봉안하며 1천3백여년 단절된 탑 짓는 전통을 되살려 잃어버린 꽃술을 다시 피우고 있습니다.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마저 사양식 논리로 풀어 보려던 오늘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선지식은 바른 해답을 주셨습니다. 불국사의 석가탑은 석가여래가 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닫고 향마촉지를 하셨을 때 모습이라 하셨습니다. 석가탑 아래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위는 보리수 아래 석가세존이 앉으셨던 암좌요, 여덟 개의 둥근 연화석은 팔부금강신장들이 부처님 모시고 둘러 앉았던 자리입니다.
다보탑은 다보여래이십니다.
석가세존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시는 사자후가 끝나갈 무렵 삼천대천 세계의 대중들이 기쁨에 환희할 때 다보여래께서 헌신하시어 세존을 찬탄하며 그 법을 증명하신 다보여래를 신리인들이 석가여래 맞은편에 모셨습니다.
다보탑은 온세상 입니다.
우주의 그 근본형상은 네모나고 둥글고 뾰족합니다. 원형과 방형과 삼각형입니다. 둥근 것이 하늘이요 네모난 것이 땅이며 삼각에서 발달한 팔각이 인간의 상징입니다. 다보탑에는 이러한 우주와 인간들이 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탑사를 세우기 전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조상의 역사인 단기는 잊어버렸고 신앙의 역사인 불기마저 희미해진 채 서양의 역사로 20세기 말을 헤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역사를 잊은 탓에 나라는 동강이 나서 49년의 세월을 흘렀고, 믿음을 버린탓에 제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서양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습니다.
물론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얼굴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고 믿음이 달라도 세계일화 하나의 인류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이 되라는 조상의 가르침을 지녀왔습니다. 나를 다져 남을 돕고 인류에 도움이 되는 삶을 지고의 덕목으로 삼아 왔습니다. 한국인이 그 본성을 잃고 역사를 잊고 믿음을 버리고 어떻게 홍익인간이 되겠습니까?
고려조 일연스님이 김부식의 왜곡된 삼국사기를 보고 분연히 일어나 삼국유사를 지은것도 민족의 정신과 바른 신앙을 되살리려는 비원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탑사를 세우려는 까닭은 하늘의 문을 열고 역사의 맥을 잇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통일염원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깨끗하게 모으신 시주는 성보가 될 것입니다. 그 성보를 짓는 이들은 각분야 혜안의 번문가들과 도감 신영훈과 송광사 운문사 대웅보전을 중건한 조희환 도편수 그리고 그 창건을 주관하는 지헌건설의 김영일 상무 등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한민족 문화의 뿌리와 흐름을 샅샅이 뒤져서 설계하고 시공하였습니다. 삼국통일의 대역사를 이룬 신라의 황용사 탑 이후 다시 서는 목탑 보탑사는 한민족의 역량을 집약하는 성역입니다. 잊어버렸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축술과 오늘의 기술이 조화를 이뤄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잇는 문화재 답사입니다.
삼층탑사 보탑사는 부처님을 모두 모셔 사방팔방 시방세계에 불광을 비출것입니다.
서방에 아미타불 세지 관음보살. 북방에 비로자나불 보현, 문수보살. 남방에 석가모니불 지장, 미륵보살 세지 관음보살, 동방에 약사여래불 일광, 월광보살님이 1층 금당에 게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층 법보전에 모신 경전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불 미륵부처님은 3층에서 기다리십니다. 이런 사찰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나무가 아플세라 쇠못하나 쓰지 않고 후손들이 어려울까 지붕에 흙 한덩이 올리지 않고 자연의 법칙대로 서로 보듬어 감싸안아 하나가 되는 탑사! 오! 고맙고 자랑스럽다."
한국의 불교를 되살리는 깨끗한 비구들이여! 역사를 잇는 장인들이여! 한민족 모두의 마음을 이 보탑사에 모아 분단된 나라를 통일하고 만인들에게 자비를 일깨우게 하소서.
돌보가 올라가는 순간 잠자는 한국인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여 대립과 미망에서 깨어나게 하고 절로 새 절이 일어나고 민족이 깨어나게 부처님께 합장 염원 하나이다.
토헌 서희건 씀

보탑사의 3층 목탑은, 신라가 새로운 통일국가를 염원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웠듯이 남북통일은 물론 옛 고구려 땅까지도 통일하려는 간절함 염원을 담아 지은 탑입니다. 이 탑의 특징은 3층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신라 황룡사의 9층탑 이후 처음으로 3층까지 오를 수 있게 지은 탑입니다.
금당(金堂)-1층 사방불
보탑의 1층은 보탑사의 핵심인 금당입니다. 이 금당에는 심주(心柱)를 중심으로 사방에 사방불을 모셨습니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 사방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사방불의 시원(始源) 역시 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인도의 산치대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산치대탑의 동서남북 사방의 출입문 안쪽에 각각 불상을 모신 것이 사방불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방불신앙은 불교의 초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절(寺院)의 배치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탑을 중심으로 사방에 소탑을 세우는 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사방불신앙은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원(中原)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며 일본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방불을 모신 예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한 예로 서역의 교하고성 안에 있는 동북대사를 들 수 있습니다. 절 중심에 사방불탑을 세우고 사방에 중문과 불전(佛殿)을 배치했습니다. 또 중원의 여러 석굴에도 이런 예가 많습니다. 운강석굴의 경우 사방불탑을 중심으로 북쪽 벽 큰 감실(龕室)에 주불을 모시고 동·서 벽면에도 감실을 마련하여 부처님을 모셨으며 남쪽에 출입문을 두었습니다.
고구려의 사찰배치는 중앙에 8각탑을 세우고 북·동·서쪽에 각각 금당(金堂)을 배치하고 남쪽에는 중문을 세우는 3금당 식이었습니다. 백제스님들이 일본에 최초로 세운 비조사(飛鳥寺)의 배치도 이와 똑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삼국시대 이래로 시작된 사방불신앙은 신라시대에 이르러 통일의 대업과 맞물려 절정을 이루게 되었으며, 사방불탑을 <통일대탑>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바로 이런데 있는 것입니다. 통일대탑이 호국(護國)과 통일의 염원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불교적으로는 불법이 사방으로 전파되기를 기원하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방불 유적으로 중요한 것은 6세기 백제시대에 조성된 예산의 석주사방불을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큰 바위 네 면에 불상을 조각한 사방불탑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이 탑을 중심으로 불전이 있었습니다. 이 사방불탑은 그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워 당시의 조각기술을 짐작케 합니다. 또 경주 굴불사 터에 남아 있는 사방불 유적 역시 사방에 불전을 세웠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방불전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탑이 남아 있지 않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삼국시대 목탑에는 사방불이 모셔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지금도 남아 있는 경주의 분황사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목탑에 사방불을 모시던 양식이, 통일신라 이후에는 석탑의 탑신에 사방불을 조성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동의 불궁사 석가탑 3층에도 사방불을 모셨으며, 일본 목탑의 대부분이 사방불탑이듯이 사방불신앙의 유적은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방불신앙은 오랜 불교의 전통신앙이었습니다.
이제 진천에 보탑사를 세우고, 통일신라 이후 스러졌던 사방불신앙을 오늘에 되살려 통일을 염원하고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시방세계에 찬연히 빛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남방 석가여래

동방 약사여래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보탑사 수박. 약사여래불 앞에 4월초파일에 올려두면 7개월 후 동지 때까지 상하지 않고 싱싱한 상태로 유지된다고 한다. 동지 팥죽과 함께 먹는 수박은 어떤 맛일가?

북방 비로자나불

2층 법보전 윤장대

3층 미륵보전

수막새 끝부분 장식공

연곡리 비선골 폐사지에서 옮겨온 석탑이다. 도괴된 석탑을 복원하였지만 결실된 부재가 많다. 신라계열의 고려시대 탑으로 보인다. 이중기단, 3층 옥개석과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초층 탑신에는 양 우주·문비·자물통 등이 모각되어 있고,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4단이다. 지대석은 2매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3매석으로 결구된 하층기단이 놓여 있다. 하층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이 2구씩 배치되어 있다.

2기단. 하기단 면석에 안상이 뚜렷하다

3층이 결실된 각 층의 옥개석 아랫면에는 낙수홈이 패여 있고 옥개받침은 4단씩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한 편이며 전각의 반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옥개석 윗면에는 1단의 각형의 옥신괴임이 조출되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개·보륜이 남아 있으나, 원형을 잃었다.

몸돌의 양우주, 초층몸돌의 문비와 자물쇠

백비 비각

비에는 글씨가 쓰여지지 않았으며, 또한 비의 주인공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처음부터 비문을 새기지 않은 것인지 지워버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비머리에도 네모진 비의 이름을 쓰는 자리만 마련되어 있을 뿐 글씨는 없다. 그래서 백비로 불리운다. 고려전기의 작품으로 전한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에는 거북등 모양의 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는 말머리 모양과 흡사하나 많이 마멸된 상태이며, 앞발의 발톱은 모두 파손된 상태이다. 비신을 받쳐 주는 비좌 부분에는 연꽃 문양을 새겼는데, 잎이 작으면서도 양감이 느껴진다.

이수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이수의 제액에도 비신에서처럼 어떤 명문도 없다.

백비 답사를 마친 노산 이은상님의 시 한편
보련산 깊은 산골에
벙어리 성자 있어
흔들어 물어 보아도
아무런 대답이 없네
영원한 침묵의 설법을
가슴으로 듣고 가오.

보호각 이전..문화재청 사진
이 곳 주민들은 연곡리 백비가 서 있는 곳을 비가 서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비선골이라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보물404호이다.


연곡리 비로자나좌상. 백비와 요사 사이의 등산로로 20여 m 지나 우측의 길아닌 길로 접어들면 이렇게 등을 돌리고 계신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다. 고려시대 석불로 전하며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불상은 나발 형태의 머리 위에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고 불두는 불신과 접합되어 있다. 불신은 비교적 양감이 있다. 상호는 방형[네모반듯한 모양]에 가깝고, 이마와 백호 부분 그리고 입술 부분은 마멸된 것을 복원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수인은 왼손이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잡고 있는 전형적인 지권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어깨는 넓은 편이며, 법의는 통견을 입고 있고 옷 주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된 느낌을 주며 단순하다. 광배와 대좌는 모두 결실되었다.





2012.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