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부안군

부안...능가산 개암사

임병기(선과) 2012. 5. 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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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답사기를 일부 수정하여 가져왔다.

 

"부안. 할아버지 슬하에서부터 무수히 들었던 고을이다. 손자인 나에게 조부님은 우리 고향에 잠들지 않은 김천 구성의 10대 조부모님 부터 9~6대 조부모님 산소 위치, 함자, 할머님 성씨와 관향, 여러지방으로 분가한 집안 내력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셨던 것이다. 이야기중에 늘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김천시 지례면에서 7대 조부님 형제분이 분파한 내력 '맏이는 성주로 둘째는 지례에, 셋째 할아버지는 전북 부안으로 가난에 못이겨 이주하셨으며 부안에 계시는 분들은 몇 촌'간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내 어릴적에는 부안에 계시는 친척분들이 음력 시월 열하루,열이틀에 모시던 묘사 참석을 위해 김천 가는 길에 꼭 집안 최고 연장자이던 울할아버지를 뵙기위해 오셨던 기억도 뚜렷히 나건만 이제는 잊혀진 저편의 이야기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국토의 어디를 가던지 푸근하고 아늑한 분위기는 차이가 없더라도 그런 집안 내력이 있기에 부안은 더욱 정감있게 다가온다. 오매불망 고향을 그리다 임종 시 수구초심으로 고향 산천을 떠올렸을 선대 할아버지 묘자리도 알지 못하기에 술 한 잔 올릴 수없는 내가 많이 미운 날이다. 불경의 죄 때문에 지하에 잠들어 계시는 할아버지가 깨어나서 나의 뒷통수를 내려 치지 않으실련지...

 

 

개암사 가는 길에 뇌리를 스치는 나의 가족사와 도침, 복신,왕자 풍 등 백제 부흥운동의 일화들이 떠올라  깊이를 알 수 없는 상념에 젖게한다.  일주문을 지나 두 기의 부도를 거쳐 변한의 궁궐터에 창건과 중수를 반복한 개암사에 이르면, 울금바위를 보관처럼 쓰고 있는 대웅전이 학이 비상하려는 자태로 반긴다.

 

"개암사는 전라북도 서부 변산반도의 동쪽에 위치한 고찰로 634년 백제의 왕사(王師) 묘련(妙蓮) 스님이 창건한 고찰이다. 능가산(楞伽山)이라고도 부르는 뒷산에는 백제부흥운동의 유서가 깃든 우금산성(전북 기념물 제20호)이 있다.

사찰의 이름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배경은 뒷산 정상의 웅장한 ‘우금바위(또는 우금암)’의 전설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마한의 효왕(孝王) 28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사를 보내어 감독하게 하고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우금바위에 천연석굴이 있어 그 바위를 개암이라 불렀는데, 바위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크게 둘로 이루어진 듯하여 ‘바위가 열린 상태’라는 의미에서 ‘開巖’이라 칭했다는 구전도 있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이 개암사 창건에 대한 역사기록도 조선후기에 편찬된 사적기(寺蹟記)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적기는 1658년 金波堂 如如스님이 엮은 『개암사중건사적기(開巖寺重建寺蹟記)』와 1640년 월파자(月坡子) 최경(崔勁)이 지은 『법당중창기문(法堂重創記文)』, 1941년 주봉당(舟峰堂) 상의(尙毅) 스님이 편찬한 『개암사중건연혁기(開巖寺重建沿革記)』 등이 있다.

그 내용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먼저 『법당중창기문』의 「별기(別記)」에 인용된 원효방상량문(元曉房上樑文)에는 백제와 관련된 이 지역의 역사적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백제 멸망 직후 묘련의 제자 도침(道琛)이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과 더불어 이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고, 개암사는 원효방(元曉房)의 본사로서 백제부흥운동 당시 구심축을 이룬 장소이다.

즉 634년 묘련이 처음 설립한 후 676년에 원효ㆍ의상 스님이 우금암(禹金巖) 아래에 있는 우금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수했는데, 이 우금굴은 이후 원효방이라 불리면서 조선시대 후기까지 개암사의 산내암자로 자리잡고 있었다. 원효스님의 자취를 지닌 원효방은 이후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에도 등장하였으며, 7세기 중엽에 존재했다면 당시부터 개암사의 부속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개암사의 부속암자인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서 참선 득도한 기록이 있다."...전통관광사찰정보

 

 

개암사 대웅전. 효종9년 밀영선사와 혜징선사가 절을 재건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대웅전은 정조 7년(1783) 승담선사가
중수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이다.민흘림으로 된 기둥에 양쪽 추녀끝의 귀솟음이 뚜렷해 흡사 건물이 푸른 창공을 박차고 날아 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웅전 앞마당 끝머리에 서서 바라보면 아! 건물은 이렇게 짓는 것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쩌면 저렇게 하늘과 산과 바위와 건물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더 커서도 안되고 더 작아서도 안되는 아주 딱맞는 크기로 주위 자연과의 조화를 허물어 뜨리지 않고 지었다. 무조건 큰 것만을 고집하는 현대 우리내 한국인들을 당시 조상님들이 바라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건물 곳곳에 진하게 묻어나는 세월의 자취가 우리의 몸을 감싸돌고 앉아계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인자한 웃음속에서 마음 편안함을 느낀다. 이곳 개암사 대웅전 현판은 다른 사찰과 달리 정면 평방에 길다랗게 달려있는데 그 크기가 건물규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 사찰이던지 대웅전 현판은 큼지막하게 만들어 정면 중앙공포 부분에 아래를 내려다 보며 굳건하게
달려있다. 그러나 개암사 대웅전은 그럴수 없는 것이 중앙공포의 양쪽으로 도깨비 문양의 나무 조각이 정면을 무서운 눈초리로 꽤뚤어 보고 있어 현판을 세우면 그 모습이 가려질 수 밖에는 없다. 그렇다보니 현판을 그렇게 배치한 것이다.

 

 

 이 건물은 유난히 용이 많다. 정면 양쪽 귀공포에 각기 한 마리씩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대웅전을 굳게 지키고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부처님 닫집에서 부처님을 수호하는 용들과 지붕 대들보위에 버티고 있는 용들, 이들을 모두 합하면 14마리나 된다. 외부 단청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모두 지워져 버렸지만 건물 내부의 단청은 아직 꽤 남아있다. 천정에 우물정자로 세겨진 단청은 자세히 보면 아직까지 초기 모습 그대로 간직한 듯 색상이 선명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부처님 머리 위에 다포식 건물을 본뜬 닫집은 그 화려함이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용이 대웅전 안에서 노니는 것일까? 용은 설치된 위치와 나라에 따라 다양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만,일반적으로 대웅전 내부의 용은 팔부신중의 하나로 불법을 수호하는 호위신장으로 보면 되는 것이니 천정에 가릉빈가가 노래하고
장엄의 꽃이 만개한 것으로 보아서 대웅전 자체를 불국토로 형상화 한 것이다.

 

 

임란 이후 남해안의 대부분의 사찰이 불에 타 버렸고,다행히 부유한 절집은 사찰 전체를 불국토를 상징하여 가람을 중수하였으나, 가난한 절집에서는 민생고 해결에 매진할 처지니 중수는 엄두도내지 못한 것이 명약관화하지 않는가? 그러니 대웅전 전각만이라도 불국토로 형상화하기 위해 화려하게  조성하였던 것이다.

 

대웅전 후벽

 

내부의 화려함도 볼거리지만 외부 가구에도 주두의 꽃잎, 공포 첨차의 연꽃 줄기. 소로의 꽃봉오리를 덧붙여 연꽃으로 내부와 걸맞게 정토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비록 현대적 느낌의 여타 전각이 맘에 차지 않더라도 대웅전이 있기에 법당안에서 한 참을 쉬면서 불국토의 세계속으로 몰입 해보는 것도 개암사 답사의 한 맛이 된다.

 

 

목조삼존불. 스님이 제를 올리고 계시어 문밖에서 잡았다. 전통관광 사찰 정보 자료를 가져 왔다.

 

대웅보전 안에는 1657년에 개금한 삼존불상이 있다. 구전으로는 고려시대 불상이라 전하지만, 꼿꼿한 자세와 근엄하고 차분한 인상 등을 통해 조선중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주존은 목조 석가여래좌상으로 상호는 사각형의 판판한 형태이며, 눈두덩이의 양감은 거의 표현되지 않은 단아한 얼굴이다. 눈은 가늘게 뜬 차분한 모습이며, 그리 크지 않은 코는 콧등의 폭을 줄이거나 콧볼을 넓히지 않아 통자형으로 보인다. 입은 조금 작은 듯하고, 입술이 얇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소라형의 나발이 촘촘히 박혀 있으며, 원통형의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앙 계주가 있다. 목은 짧은 편이고, 목과 가슴 사이의 경계에 얇고 간격이 좁은 음각선으로 삼도를 나타내었다.

상체는 사각으로 어깨는 둥글게 하였으며, 세장한 신체에 건장한 우람함이 느껴진다. 대의는 통견의로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군의주름의 폭이 좁고, 물결모양으로 반전되는 주름이 딱딱하게 표현되어 마치 나뭇잎을 붙여 놓은 듯한 모습이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팔이 몸통에 거의 붙어 있으며, 손가락은 길고 큰 편이다.하체는 결가부좌를 취하였으며, 발바닥이 반 정도 보이나 자세하게 표현되지는 않았다. 무릎은 상체에 비해 낮고 폭이 넓어진 모습이며, 몸 가운데에서 모아져 퍼지는 주름은 사다리꼴의 두꺼운 주름으로 표현되어 있다.

좌우 협시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도 주존과 똑같은 조각수법으로, 조선중기의 근엄미를 내재한 당당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보관과 군의에 붙어 있는 보주형 장식, 가냘픈 손가락의 자태를 통해 보살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 석가삼존불은 고풍스럽고 당당한 자세를 지닌 조선중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며, 맑고 단아한 상호의 인상에서 개암사를 찾는 이들로 하여금 잔잔한 마음의 미소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개암사영산회괘불탱초본

영산회 괘불탱 초본...문화재청

개암사영산회괘불탱

개암사 영산회 괘불탱...문화재청

 

길이 14m, 폭 9m의 이 괘불은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이 서 있고 뒷쪽에는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있으며, 앉아 있는 2구의 작은 불상도 보인다. 석가는 머리끝에서 다섯 줄기의 빛이 나며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서 있는 모습이다. 각 상들의 얼굴 형태와 어깨는 각지게 표현하여 경직되어 보이며, 눈썹은 처지게 처리했고 선은 매우 정밀하고 세련되어 강한 인상을 준다. 채색은 주로 붉은색과 녹색에 금색을 사용하였고 군청색을 넣어 색채 대비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영조 25년(1749) 승려화가 의겸이 참여한 그림으로 화면을 꽉 채운 구도와 경직된 형태, 강렬한 색채 등으로 18세기 중엽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며, 제작연대도 확실하여 우리나라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암사 괘불탱의 밑그림도 남아 있는데, 현재 밝혀진 유일한 것으로 당시 괘불화의 제작과정과 필치 등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개암사 대웅보전에 봉안되었던 조선후기 범종으로 명문을 통해 1689년(숙종 15)에 대종으로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윗부분에는 종을 매다는 고리인 단룡의 용뉴와 용통이 있으며, 그 아래 견부에는 견대가 있다. 견대는 4각형의 구획 안에 다시 원을 구획하여 내부에 범자를 새겼으며, 그 아래 4개의 유곽과 4개의 보살입상을 교차로 배치하였다.

유곽은 마름모꼴로 주위에 연화모란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내부는 팔판형유좌를 갖춘 9개의 유두를 양각하여 돌출시켰다. 유곽 사이에 배치된 4개의 보살입상은 구름 위에 천의를 입고 두 손을 모아 꽃을 받든 모습으로, 보관을 쓰고 두광을 갖추었다. 유곽 아래에는 4면에 종을 조성한 명문과 시주자를 교차로 양각하고, 하대에는 당초문ㆍ연화문ㆍ국화문을 교차로 장식하였다.

 

응진전

 

응진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그리고 16나한이 있다. 재질은 목조이며, 사찰에 소장된 『사적기』와 『발원기』를 통해 167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아한 자태와 부드러운 양감, 동적인 자세를 통해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16나한

 

『발원기』와『사적기』등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의해 조선 숙종 3년(1677)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16나한이 지닌 단아한 형태와 부드러운 양감 등은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관련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양식적으로도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지장전

 

 

지장전에 봉안된 청림리 석불은 변산면 청림리 청림사지(靑林寺址)의 불상으로, 청림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얼마 전 개암사로 옮겨온 것이다. 청림사는 두 곳의 절터, 즉 고(古) 청림사터와 신(新) 청림사터가 있었는데, 이 석불은 고 청림사터에 있었다.

불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에는 보주를 감싼 지장보살의 도상으로, 팔각의 복련좌(覆蓮座)에 안좌(安坐)해 있다. 신체는 두건이 머리에서 어깨까지 내려앉은 피모지장의 모습이며, 두건 사이로 귓볼이 도톰하게 돌출되어 있고 통견의 천의 사이로 횡대(橫帶)가 둘러져 있다. 붕괴 시에 목과 몸체가 두 동강 났으나 현재 하나의 돌로 복원되었으며, 파손된 코부분도 보수되었다. 대좌는 가공하지 않은 할석재(割石材)를 지대석으로, 중대석은 아무런 문양 없이 고복형(鼓服形)으로 치석하고, 상대는 팔각의 복련좌로 상부에 원형의 중대석 받침을 각출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 보살상이 승가대사상(僧伽大師像)의 풍모(風帽)를 쓰고 선정인(禪定印)을 취하며, 특히 정혈(頂穴)을 지니고 있어 지장보살상이 아닌 승가대사상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석조

 

장방형의 화강암을 거칠게 치석하여 중앙을 파낸 모습이다. 석조의 전면에는 '乾隆六辛酉三月日施主○元○○○便于木(건륭육신유삼월일시주○원○○○편우목)'이라는 음각 명문이 새겨져 있어 1741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괘불지주

 

거칠게 다듬어진 화강암에 상ㆍ하 둥근 구멍을 뚫고, 괘불지주 한 면에 '己巳年月日○○淸禪(기사년월일○○청선)'이라는 명문을 음각하였다. 여기서 ‘己巳年’은 괘불이 조성된 1749년으로, ‘淸禪’이란 명문은 개암사 괘불화기의 삼강질(三綱秩)에 등장하는 별좌(別座) 청선비구(淸禪比丘)임을 알 수 있다.

 

 

부안을 답사하면서 백제의 부흥운동을 되짚어 보지 않는다면,더구나 개암사 뒷자락의 울금바위를 보고도 개암사 이야기만 전개한다면, 느낌이 반감되기에 울금산성과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옮기니 찬찬히 정독하시며 답사 기회가 있으시면 참조하시길......


[역사여행] 백제부흥운동 전적지-변산반도...<< 한 겨 레 신 문 >>

누가 월명암의 `서해낙조'를 변산 8경의 백미라 했는가. 월명암까지 가는 산길. 변산반도의 맨끝 서해 계화도가 꿈처럼 보이는 곳. 서쪽 바다와 남쪽 바다 사이의 산길을 올라가면 거기서부터 울창한 나무바다가 시작되는 곳. 그런데 취재팀은 겹겹 산중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해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앞뒤가 산으로 에워싸인 한복판에서 일몰을 맞았다.

등 뒤의 서쪽 하늘은 산봉우리 뒤로 넘어간 저녁해의 어스름에 싸이기 시작했다. 해발 448m의 쌍선봉에 올라 장엄화려하고 슬픔마저 깃든 `월명 낙조'를 취재하려던 계획은 이렇게 해서 무산됐다. 해질녘이 다 돼 길을 나선 얄팍한 계산 탓이었다. 사실 이번 역사여행의 주목적이 낙조대 탐승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주류성과 백강 등 백제부흥전쟁의 현장이 이곳 변산반도 일대였다는 학설이 관심거리였다. 굳이 월명암을 넣은 것은 겹겹이 산으로 두른 내변산과, 어염이 풍부한 해안선을 따라 농경지가 비옥한 외변산이 하나의 땅덩어리 안에 어우러져 있어 항전의 근거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곳의 지세를 짐작해보기 위함이었다.

주류성(우금산성)으로 꼽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전북 부안읍에서 차로 십분쯤, 왼쪽으로는 기름진 벌판 `장패평'이 펼쳐지고 오른쪽 들녘 너머 로 기상봉, 옥녀봉 따위가 가지런한 사이로 내지른 2차선 국도이다. 장패평(장패평)은 말 그대로 장수들이 싸우다 패한 벌판이란 뜻이다. 주류성에 웅거한 백제부흥군과 당나라 침략군의 접전이 이곳에서 벌어졌
고 당나라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장패평의 끄트머리이자 개암사로 들어가는 들머리에는 이런 전설의 단초가 됐을 법한 `장군총'이 있다. 안내판은 싸움에서 패한 당군의 장수 28명의 주검을 백제부흥군이 거둬 묻어주었다는 이 지방의 전설을 적었다. 하지만 장군총이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규모는 아니고 길이 1.5~2m의 평평
한 자연석 19개를 그대로 누인 모습이다. 본래는 28개였는데 몇 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선사시대의 남방식 지석묘로 보는 학계의 해석에 좀 더 수긍이 가되 지방민들의 전설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리라고 짐작해보면 족한 곳이다.

주류성은 개암사 뒷길로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된다. 높이가 각각 40m 와 30m쯤 되는 우람한 울금바위에서 시 배만남장대쪽으로 1천5백13m, 남장대에서 북장대를 거쳐 울금바위로 되돌아오기까지 다시 2천4백13m로 모두 3천9백26m에 이르는 장대한 석성이다. 울금바위 뒤쪽 벼랑을 기어 정상에 오르면 일망무제로 펼쳐진 호남평야와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은 능선을 따라 꿈틀꿈틀 내뻗어 비바람에 씻겨오면서도 천여년 전의 자태를 완연히 지녔다.

이 곳이 7세기 중엽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군에 맞서 3년 동안이나 세차게 항전했다는 곳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떨쳐 일어섰다가 숨진 백제 민중의 한맺힌 넋이 떠돌고 있는 곳이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의 10만군과 신라 김유신의 5만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략한 데 이어 의자왕이 피난한 웅진성마저 함락시켰다. 의자왕은 침략군에 변변히 항전도 못하고 투항해 구차한 목숨을 유지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힘을 빌려준 당은 웅진, 마한, 동명 등 5곳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사비성에는 류인원의 1만 군사를 주둔시켜 이 땅을 영구히 강점하려 했다. 당은 군사통치를 통해 백제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했다. 점령
군은 곳곳에서 강도질과 약탈, 부녀자 겁간을 서슴지 않았다. 당나라 침략군에 맞선 백제 민중의 투쟁은 그해 8월2일 시작돼 곳곳으로 확산됐다. 성과 정현성을 지키던 군인들이 항전에 나섰고 백제 귀족 정무의 지휘 아래 두시원산에 모인 병력이 침략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백제 서북지방의 주요한 성인 임존성(충남 예산)에는 항전의 깃발을 올린 지 10여일 만에 3만여명의 부대가 모였다. 주류성에선 백제의 장군이 었던 복신과 중 도침의 지휘 아래 부흥군의 대오가 정비됐다. 항전군의 두 축이 형성된 것이다.

초기에 성에 의지해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전에 치중했던 부흥군은 점차 세가 늘자 침략군의 본거지를 공략하러 나섰다. 항전군이 사비성 남쪽에 목책을 치고 포위 공격에 나서자 침략군은 한때 외부와의 연락이 끊기고 소금마저 떨어지는 위기에 몰렸다. 유인궤가 이끄는 당의 지원군은 항전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역습하려다 떼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지금의 주류성은 겉보기에 메마르기 짝이 없는 옛 석성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20만평에 이르는 성곽 안에 백제 이궁터가 있다고 하나 수풀에 묻혀 가 볼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그렇지만 이곳은 그 먼 옛날 백제의 이름 없는 민중들이 침략자들의 군사통치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의기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물론 그들을 근대적인 저항민족주의의 틀에 꿰어 맞출 일은 아니다. 또한 백제왕조에 대한 충절의 발로만으로 해석하는 것도 지나쳐 보인다. 당나라 침략군의 무단통치가 백제 왕실과 귀족의 치하에 비해 훨씬 가혹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다른 잇속 계산 없이 점령군을 내쫓는데 열심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대가를 얻지 못한 그들의 죽음이 후세의 여행자를 짙은 우수에 젖게 하는 것 아닌가.

다시 전쟁 얘기다. 임존성과 주류성을 양대 근거지로 한 항전군의 기세가 높아지자 수십개 의 성이 이에 호응해 금강 이북이 침략자의 압제에서 해방됐다. 항전군의 승세는 2년쯤 뒤인 662년 5월 왜국에 가있던 왕자 풍이 돌아와 국왕이 될
무렵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세가 다소 안정되자 항전 지도부는 자중지란을 일으킨다. 부흥전쟁 초기부터 동지인 복신과 도침이 자리다툼을 하다 복신이 도침을 죽였다. 복신은 다시 왕자 풍과 불화를 빚다가 풍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귀족과 왕족이 이렇게 저들끼리의 싸움에 골몰하자 항전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침략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663년 나당연합군은 주 류성과 임존성 공격에 나서 이를 함락시켰고 뒤늦게 도착한 왜국의 지원군은 백강 어귀에서 크게 패했다. 그해 9월로 삼년에 걸친 백제부흥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부흥군에 가담한 백성들이 다시 무참하게 살륙됐다. 그러나 국왕으로 떠받들렸던 풍은 고구려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주류성의 중심인 울금바위에는 세개의 큰 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복신의 지휘소로 4백~5백명의 장병을 모아놓고 집회를 할 만한 거대한 자연 석굴이며 입구의 너비와 깊이가 각각 20여m로 높은 곳은 30여m에 이른다. 복신이 왕자 풍과 다투던 끝에 거짓으로 병을 꾸미고 태업(사보타주)을 하던 곳이며 끝내 풍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법한 곳이다. 주류성의 위치 문제에 대해선 사실 아직까지 학계의 합의가 없다. 충남의 한산과 예산쪽 의 내포, 논산군의 연기라는 주장과 이곳 부안설이 다투고 있는 상태다.

각 지방의 향토사 연구자들이 저마다 자기 고장이 맞다고 주장하는 `주류성 유치경쟁'을 속된 지역 이기주의로 매도할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역대 왕조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소외를 겪어 온 이쪽 지방민들이 자신의 뿌리와 정체 의식을 옛 백제에서 찾으려는 비원의 발로로 보인다.

부안군 애향운동본부(0683-82-3993)는 동진강 하구~계화도 간척지~백산~주류성~개암사~내소사~로 이어지는 백제부흥전쟁 전적지 답사 코스를 개발했다. 동진강과 계화도는 왜국의 지원 함대와 당나라 수군의 진입로였다는 곳이다.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상전벽해가 돼 별 유적은 없지만 간척지의 넓은 벌판과 서해 바다를 구경하는 셈치고 들를만 하다. 백산은 백제부흥군이 왜국에서 돌아오는 왕자 풍을 맞았다는 평야지대의 토성인데, 사실 이보다는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총집결해 전주로 진격한 근거지로 더욱 유명하다. 토성 안에는 농민혁명 기념탑이 서있고 입구에는 이곳 농민회가 작은 화강암을 쪼아 `백산성지'라고 새긴 안내비가 애틋하다.

주류성 오르는 길의 들머리인 개암사는 본래 마한, 진한, 변한 시대에 변한의 왕궁터였다고 전한다. 지금의 개암사는 백제 무왕35년(634년)에 왕실의 고문격인 왕사 묘련이 궁전을 절로 고쳤다고 하니 이곳이 후일 백제부흥군의 근거지가 된 내력이 짐작되기도 한다. 개암사와 내소사 모두 백제 옛절이지만 지금의 절집돛 조선 중기에 중수한 것들이다.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돼 있는 개암사는 산중 사찰로서 의 청량감이 돋보이고, 내소사는 절집보다 양옆 전나무숲 사이로 6백m쯤 곧게 뻗은 진입로가 시원하다. 변산반도 대부분이 국립공원으로 돼 있는 이곳은 변산해수욕장과 흡사 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바닷가의 수성암 단애인 채석강의 자연풍광 등이 본래 이름높다. 호랑가시나무, 꽝꽝나무, 후박나무 따위의 난대성 식물 군락은 이들 식물의 북상한계선으로 각각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2004.04.21]

 

201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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