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포항시

포항...장기 읍성

임병기(선과) 2011. 12. 1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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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위치한 장기읍성(長鬐邑城)은 이 고장의 진산(鎭山)인 동악산(東岳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일제(日帝)의 잔혹함은 이 읍성에도 밀려 들어와서 성안의 모든 관아(官衙) 등 시설이 파괴되고 단지 향교만이 이 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고, 성벽은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었으나 복원 중에 있다. 동ㆍ서ㆍ북문의 터와 수구(水口) 1개소, 12개소의 치성(雉城), 4개소의 우물, 3개소의 못 등이 옛 성의 모습을 그대로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산성(산성)과 같은 기능을 겸한 읍성으로서 해발 252m의 동악산(東岳山)에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지맥 정상(해발 100m)의 평탄면에 축성된 동ㆍ서로 약간 긴 마름모꼴이다. 성 전체의 모양은 연잎 모양의 말굽형이며, 180도 시각으로 동해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쌓았다.

 

이 읍성(邑城)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邑城)들과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이 그 특성이라 하겠다. 동해안의 중요 진성(鎭城)을 들면 울산(蔚山)의 처용암(處容岩)지방, 울주군 강동면(蔚州郡 江東面) 정자리지방, 양남면(陽南面)의 수념(水念)지방, 감포(甘浦),이곳 장기·포항·영일지방, 흥해 칠포지방들인데 이들 지역은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서라벌(慶州)을 침공하는 왜구(倭寇)를 방어한 군사기지였고, 고려(高麗),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같은 역할을 다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은 이들 지역과 경주(慶州)사이에는 산성(山城)들이 있는데 가령 관문성(關門城) 속칭 만리성은 울산·울주·양남(蔚山 · 蔚州 ·陽南)지역, 양북면(陽北面)의 팔조리산성(八助里山城)은 감포(甘浦)지방, 시령(枾嶺:감재) 산성(山城)은 장기지방, 북형산성(北兄山城)은 포항·흥해지방의 후방방어(後方防禦)의 군사거점이였다고 할 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본다.

 

 

더우기 시령산성(枾嶺山城)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경주시 양북면(陽北面)의 경계지점인데 경주에서 옛길을 따르면 감포길을 가다가 추령(楸嶺:관해동재)에서 부처재(佛嶺)를 거쳐 기림사(祇林寺)계곡을 건너면 감재에 이른다. 이곳에 산성이 있고 장기와의 거리는 불과 5∼6km 밖에 되지 않는 직행길로 80∼90里 정도이다. 이 길은 경주에서 동북방향으로 포항과 감포의 중간지점이 된다. 이러한 지리적인 형국(形局)은 장기지방이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장기는 역대에 걸쳐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선 태종(朝鮮 太宗) 15年(1415)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수령(守令:현감(顯監)의 위계(位階)를 사품이상9四品以上)으로 높여 무신(武臣)으로 고관(高官)을 임명(任命)하여 지현사(知縣事)라 하였다가 세조(世祖) 5年(1460)에는 독진(獨鎭)으로 되었다가 동왕(同王) 12年(1467)에 독진(獨鎭)으로 파하였다. 뒤에 현감(顯監)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9訓導)를 두었다. 축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1. 단종(端宗) 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는 성(城)의 둘레가 174보(步)이고 성안에 우물 두 곳이 있다. 2. 예종(睿宗) 1년(1469)에 지은 경상도속선지리지(慶尙道續選地理誌)에는 세종 21년(1439)에 돌로 쌓고 둘레가 3,664尺이고 높이는 12尺이며 샘(泉)이 두 곳이고 못(池) 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창(軍倉)도 있다. 3. 중종(中宗) 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석축(石築)을 하고 둘레가 2,980尺이고 높이는 10尺으로 우물이 네곳이고 못이 두 곳이다. 4. 구읍성이 현의 남쪽 2里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尺이고 높이는 12尺이고 샘이 두 곳 있다. 이상의 네 가지 기록에서 성의 규모를 보면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城)을 여러대에 걸쳐 중축(重築)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성(城)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4의 구읍성(舊邑城)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분명히 고려시대(高麗時代)이전의 고성(古城)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城)을 여러대에 걸쳐 중축(重築)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성(城)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4의 구읍성(舊邑城)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분명히 고려시대(高麗時代)이전의 고성(古城)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자료는 장기면사무소 홈에서 가져왔습니다.

 

 

장기천과 현내들 그리고 동해

 

201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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