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포항시

구룡포 골목길 톱아보기(2)

임병기(선과) 2012. 11. 1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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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초교 앞 철규분식.이집도 찐빵과 단팥죽으로 식도락가를 비롯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집이라고 한다. 우리도 건너 뛸 수 없어 토박이가 솔선수범(?)하여  맛을 보기 위해 각츌을 했다.  2008년 주간경향 기사를 보자.

 

 

"찐빵 좀 싸주이소!”
“찐빵 없어요!”
별 희한한 집도 다 있다. 분명 찐빵을 메뉴로 내건 분식집인데 찐빵이 없단다. 게다가 가게 안을 슬쩍 둘러보니 먼저 온 손님 여럿이 이미 찐빵을 먹고 있다. 찐빵을 익혀놓은 게 없으면 조금 기다리겠노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찐빵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가게 안에 있던 손님이 추가로 시키니 얼른 갖다 내놓는다. 황당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따져 물으면, ‘그럼 단팥죽과 함께 사가라’고 한다.

구룡포초등학교 앞 철규분식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처음 이 집을 찾고자 했던 것은 50년에 가까운 내력도 내력이지만, 어떤 이의 소개에 혹해서였다. 오랫동안 포항에서 근무한 사람이었는데, 아주 독특한 찐빵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집은 항상 손님들로 북적거리는데, 찐빵을 포장해달라면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찐빵을 포장해 가서 먹으면 아무래도 식어서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래서 시골 찐빵집의 맛에 대한 자부심이 참으로 기특하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철규분식 박상연(66)씨의 이야기는 매일 정해진 양의 찐빵만 만들어 파는데, 찐빵만 팔다보면 나중에 단팥죽을 먹으러 와서 찐빵을 함께 시키는 손님에게 내놓을 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배짱장사도 보통 배짱장사가 아니다. 추가로 찐빵을 더 빚던지, 그래도 ‘먼저 보는 게 임자’라고 나중에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손님보다는 먼저 온 손님부터 파는 게 상식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또 그게 아니었다. 정해진 양만 파는 건 순수 우리 팥만 재료로 쓰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종일 팥을 물에 재워 방부제 같은 안 좋은 것들을 걸러내기 때문이며, 이 집에 오는 손님 중에서는 일부러 단팥죽과 함께 찐빵을 먹으러 멀리서 오는 단골도 많기 때문에 항상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앞의 소개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며 슬쩍 떠봐도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더 크게 감동했다. 억지와 장삿속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조그만 거리를 가지고도 위선에 가까울 정도로 포장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그 솔직함과 고집스러움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게 철규네 찐빵이다. 철규네 찐빵은 울룩불룩 작고 볼품없어 영락없는 시골 찐빵이다. 맛도 솔직히 그렇게 각별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찐빵, 단팥죽과 함께 이 집의 달랑 세 가지 메뉴(여름에는 팥빙수가 추가된다) 중 하나인 국수만 해도 그렇다. 오래된 노란 냄비에 끓여 나오는 그냥 흔한 잔치국수일 뿐이다. 그래도 먼 데서 온 손님도 일부러 들러서 가고, 명절이면 귀성객들도 한 번쯤 꼭 이곳을 찾는다. 구룡포초등학교 출신들은 어릴 적 아버지를 졸라 맛보던 찐빵 맛을 잊지 못해 이번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들른다. 그들은 찐빵이 아니라 추억을 먹는다. 비록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그때의 추억을.

어머니의 가게를 물려받아 장사를 해온 지도 40년이 다 되어간다. 돌이켜보면 고생도 참 많이 했다. 어려울 때면 고기, 채소 등 행상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아이들을 키워온 박씨로서는, 장사를 하면서 굳어진 툭툭하고 거친 성격을 어쩌지 못한다. 그놈의 고집 때문에 손님들과 대놓고 싸우기도 어지간히 많이 했다.

그러나 남을 속이는 일은 할 줄 몰랐다. 장사에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는 것도, 순수한 우리 팥만 사용할 수 없는 것도, 팔기 싫으면 싫은 것을 감출 줄도 모른다. 장사 욕심에 이것저것 늘어놓을 줄도 모른다. 그 솔직함과 융통성 없음이 철규분식이고, 철규분식 주인장이다. 그것은 구룡포의 거친 바닷바람과 영일만의 굽이치는 구릉들이 만들어놓은 솔직함이다. 그래서 철규분식의 찐빵 맛은 과메기처럼 구수한 뒷맛을 남긴다.

 


오늘도 철규분식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찐빵 좀 주이소!”
“찐빵 없습니데이!”

글·사진 유성문<객원기자> rotack@lycos.co.kr

 

 

단팥죽과 찐빵. 내입에는 너무 달았다.  음식평은 금물이라고 대꼽바리 맞어 가면서 조부님께 배웠는데 주제 넘은 멘트였나?

 

 

오징어와 초장을 구입하여 즉석에서 무친 오징어 회 

 

막걸리와 메뚜기 조림

 

구룡포 시장을 거쳐 토박이 보일러님이 상을 차리겠다고 한다. 진즉부터 막걸리를 애타게 찾는 사람도 있고해서 오징어 회도 주문하여 즉석에 비비고, 당군님 장모님이 준비해주신 메뚜기 조림도 꺼내어  바닥가 벤치에 수라상 산해진미 보다 더 멋진 상을 마련하여 우리들만의 향연을 펼쳤다. 막걸리 3~4병과 철규네 찐빵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이놈의 식성을 어쩔거나? 

구룡포 석문터

 

구룡포를 떠올리면 병포리와 더불어 늘 한켠에 자리한 석문이다. 내기억 속의 석문은 아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래도 고맙다. 추억을 반추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고, 펜벗(?)에 대한 미련, 그리움이라면 더 솔직하고 아름다운 표현이겠지? 그런 나이도 되었고...

 

구룡포 상징이었던 구룡포  석문이 위치한 곳이다. 옛돌문바위는 교통 장애와 낙석으로 1988년 철거하여 읍사무소에 전시하였다가 다시 현위치에 원상복귀하였다. 새마을 운동에 사라진 우리 전통 민속, 무속을 복원하려는 지자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1400년대에 장기반도에는 구룡포리에소 동해읍 흥환리까지 등선을 넘는 25리에 3M 높이의 석책을 쌓아 말을 사육했던 장기목장이 있었다. 그 목장의 관문이 돌문이었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문지기 2명이 배치되어 말의 출입을 통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1625년 성벽 보수 기록과 1,066필의 말을 사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자동차 정비공장을 거쳐 구룡포 최초의 극장. 제일극장 자리였다고 한다. 시골 소읍의 극장의 영향력은 지대하였으며 6~70년대 문화교실로 단체로 관람한 영화에 대한 뒷담화가 최소 일주일은 교내에 퍼졌던 시절이었다. 청춘 남녀의 데이트 장소로 적격이었으며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의 여배우가 요즈음 걸그룹 인기를 상회하던 시대였다.

 

구룡포 사람이라면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소위 '리사이틀'을 기억할 것이다. 나훈아 남진 하춘화 문주란 이미자 김세레나 김상진..., 나역시도 고교 진학을 위해 대도시로 나오기전에는 그들만이 가수인 줄 알았다. 리사이틀이 열리는 날에는  확성기의 요란한 소음이 하루종일 소읍에 울리었었다. 또한 리사이틀은 요즘 가수 경연 처럼 무명가수의 등용문이었으며, 리사이틀 팀은 YG JYP SM에 버금 가는 자부심을 갖던 시절이었다. 코메디언 이주일이 하춘화 리사이틀 팀의 무명 사회자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지 않은가?

 

세월은 흘러흘러 80년대 제일극장도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수출제일주의를 표방한 국가 정책에 따라 많은 아버지 들이 열사의 나라 중동으로, 원양어선 취업 등으로 고향을 등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바닷가 소읍 구룡포는 어업의 특성상 출항하면 몇일 동안 집에 들어 올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며 대도시의 일부 유한 마담들이 카바레서 만난 제비의 사랑하는 싸모님이 되었듯이 어려운 가정살림을 도맡아 꾸려 나가던 주부들도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삼삼오오 즐거움의 장소를 찾게 된다.

 

구룡포지역도 세태의 트렌드에 부응하여 제일극장이 '바람바람 나이트'로 업종 전환을 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무수한 로맨스와 스캔달이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고 한다.  나이트의 산증인이 골목길 답사에 동행했지만 임바고Embargo 요청으로 상세한 표현을 하지않고 상상에 맡기겠다.

 

현재 영업 중인 영마트는 10년 후 무슨 업종으로 변할지 궁금하다!!!

 

 

구룡포 최초의 다방 자리에는 현재도 산호다실이 영업중이다. 70년대 후반 80년초 DJ가 있는 도시 음악 다방과 달리 시골다방은 읍내에서 가장 예쁜 미스김이 근무하는 어른들의 휴식 공간이었다. 미스 김에 꾀여 재산을 탕진한 파락호가 구룡포에는 없었을까? 지금은 다방도 찾기 힘든 세태가 되어 버렸는데 들어가서 쌍화차에 노란자를 띄운 모닝차 한 잔 맛 볼 걸 그랬나?

 

구룡포 술도가

 

6~70년대 눈에 익숙한 풍경이다. 정미소 주인과 더불어 소읍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유지가 술도가 주인이었다.배고프 시절 어린 나이에 누룩향, 꼬들꼬들한 고두밥의 유혹을 이기며 술도가 앞길을 통과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운좋게 얻어 먹은 술찌기미에 취해 비틀거렸던 경험도 있었을테고.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가게에서 받아오며 몰래 들이켰던 막걸리 맛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한 동안 식량자급자족을 위해 술제조를 금지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다시 황금기를 구가하는 우리술 막걸리의 화려한 변신을 기대해 본다.

 

 

정겹지 아니한가?

 

 

구룡포 구룡 생막걸리.

 

초원식당

 

구룡포 명물로 각광 받는 모리국수 집으로 식도락가, 여행 작가 들의 단골 추천 식당이다. 여러책에 가난한 시절 어부들이 먹던 음식이라고 소개했지만 주인 아저씨 말씀은 예전 구룡포에서 갱죽 또는 깔때기라고 불리었으며 모든 집에서 먹었다고 했다. 또한 '모리 국수'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며 빽빽하다는 의미의 '모리(森)'가 맞다고 했다. 이집은 다른 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날 잡은 고기, 해초와 집에서 직접 국수를 밀어 재료로 사용한다고 했다.

 

정이 담긴 매뉴판

 

주인 아저씨의 말씀과 달리 모리국수의 유래에 대해 몇가지 설이 전한다.

 

우선, 주민들이 잡고기와 해초를 넣어 끓이는 것을 보고 타지역 사람이 재료를 묻자 "나는 모리는데..."라는 설. 둘째, 빽빽하게 많은 재료를 넣어 끓인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 셋째., 여러가지 음식을 모아서 끓인다는 말 즉 경상도 방언 모디서가 모리로 변했다는 설이 회자된다.

 

 

밑반찬. 막걸리 안주로도 좋았다.

 

모리

 

음식 맛에 대해서는 패스!!!

 

 

우리의 이동 동선과 달리 바닷가에서 구룡포 공원 입구를 안내하는 이정표이다. 근대문화 역사거리? 적어도 나에게는 아직 낯설다. 오히려 일본인 적산 가옥 거리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극일과 이해에 앞서 욕지거리부터 튀어 나오니 어쩔거나?

 

 

구룡포 문화관광행정을 탓하기는 싫다. 쓰라린 역사의 아픔을 관광자원화 및 일본인 유치 목적으로 역사거리를 조성한 행정당국의 넓은 아량과 발빠른 행보에 갈채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여보세요!!! 병포리 당산 아시나요? 조선소 옆 용왕당 가보셨나요? 구룡표 성황당 터 위치 아시나요? 100년 전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과감히 복원하는 추진력은 어디로 가고, 수천년 수백년 이어오다 겨우 명백한 유지하는 우리 민속,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은 왜 가지지 않나요? 전시행정, 탁상행정, 결과만을 중시하는 업적주의라고 감히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군가 민속을 복원하라는 정책제안을 하면 분명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시겠지요? "귀하가 우리읍에 대한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예산 부족, 추후 예정"......

 

 

그나마 영화셑트장 같은 죽은 느낌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일본의 쓰나미 이후 일본인들의 부동산 매입이 급증하고 있다는 풍문이다. 부산을 비롯 남부 도시는 물론 대구까지 부동산 열풍이 거세다고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웃으며 답사했지만 이런저런 잡념이 파노라마로 스쳐 갔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관광이 활성화되어 일본인 관광객이 늘어나면 타지자체에서도 밴치마킹하여 우후죽순격으로 일본인 가옥거리가 방방곡곡에 복원되지 않을지 심히 우려된다.

 

 

적산가옥이 일본인 가옥 거리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동해안의 풍부한 어획 자원을 확보하여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그들의 수탈 행위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아가 거리 입구에 그런 내용의 안내문을 게시하여 의식없이 관광 목적으로 방문하는 젊은 세대에게 역사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용왕당-신사-용왕당,충혼탑으로 이름이 바뀐 구룡포 공원

 

 

구룡포 공원 진입 계단

 

 

계단 좌우 돌기둥에 새겨진 이름과 단체명은 용왕당과 충혼탑 복원공사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다.

 

 

돌기둥 뒷면에는 시멘트로 덧칠을 하였다. 이유가 뭘까? 일인들이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말살하기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용왕당 자리 앞에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돌기둥에는 당시에 헌금을 바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해방후 용왕당을 복원하면서 돌기둥 정면을 뒤로 돌려 이런 모습으로 남겼다고 한다. 서글픈 근세사의 단면이라 치부하기에는 여운이 씁쓸하다.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한 사람은 예외로 시멘트 덧칠을 모면했다.

 

과연 도가와야스부로는 구룡포의 쉰들러?

 

도가와 야스부로 공덕비

 

도가와야스부로. 화를 면한 일본인의 이름이다. 그는 구룡포 방파제, 구룡포-포항간 도로 개설 등 구룡포 발전에 기여한 일본인이었으며 살아 생전에 이 비석을 조성하고 기념 촬영까지 한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경부선이 그러하듯 사회간접자본 건설은 대한제국 국토 개발  목적이 아니라 수탈한 재화를 일본으로 용이하게 운송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구룡포 도로 항구 개발 역시 지역의 풍부한 어업자원과 안강 등의 곡물을 일본으로 이송하려는 의도임은 명약관화한 사실일 것이다. 비석은 일본에서 가져온 나무화석 재료로 세웠으며, 공덕비는 시멘트로 훼손이 된 상태이다. 비석 상부에는 상하로 6자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덧칠되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가 남기고픈 메세지는 무엇이었을까?

 

모든 사실은 차치하고 비의 위치를 살펴보자. 누가 보아도 구룡표 정수리에 해당되는 자리이다. 도가와야스부로의 의중이 짐작 가지 않는가? 신사가 철거되었다고 하지만 비는 용왕당, 충혼각 앞에 자리하여 민족정기를 억누른 체 동해바다 전망을 가리고 있다. 몇 십억을 투자하여 일본인 가옥거리를 조성하면서 비를 철거하여 다른 장소로 이전할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만약에 만약에 저 비석이 기단(口), 가로 비신받침(一), 비신(口)이 일본을 상징하는 일日(口+一+口)자로 생각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충혼탑의 옛기단

 

탑신이 결실된 일본 육군 기념비의 기단. 그참! 이기단위에 조국을 위해 산화한  영령을 기리는 충혼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제의 잔재를 지운 채 기단은 방치되어 있다.

 

 

새로운 기단위에 충혼탑이 제자리를 잡았다.

 

 

사자상도 신사에 위치했던 조형물이라면 이전이 옮다고 본다.

 

부동명왕

 

용왕각 앞 석불입상. 처음에는 목포 유달산 야불의 하나로 보였지만 숫자가 없었다. 조성시기는 대정육년(1917년)으로 기단에 부동명왕이 각자되어 있다. 부동명왕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화신, 혹은 대일여래를 지키는 사자이고, 수행자들을 보호한다.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는 굵은 노끈(索)을 쥐고, 눈은 부릅뜨고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분노신의 모습이다." 특히 일본에서 추앙받는다고 한다.

 

목포 유달산 88야불에 관한 자료를 가져왔다. 구룡포 공원의 부동명왕과 관련 참고하길 바란다.

 

일본인들이 세운 유달산의 88불이란 무엇인가? (자료제공: 목포문화원) ...한국석불문화연구원

 

목포가 개항된 후 일본인들의 불교가 목포에서 성행하게 되었고, 그들이 숭배하는 승려의 모습을 유달산에 새겨 놓기도 하였다. 그것이 유달산 일등봉 바위아래 현존하는 홍법대사와 부동명왕 암각이다. 이외에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유달산에 88개의 불상을 세워 일본불교의 성지로 조성하였다. 이를 “유달산팔십팔영장(儒達山八十八所靈場)”이라 불렀다.

 

이는 일본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홍법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 유학을 다녀와 일본 밀교를 전파한 홍법대사는 일본에서 시코쿠 지역을 순례하며 88개의 사찰을 세웠는데, 이곳은 지금 일본 승려들의 수행코스이자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목포에 살던 일본인들은 이를 축소 재현하여 사찰대신 88개의 불상을 유달산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유달산 내에 이 88개의 불상은 광복 후에 종교적인 이유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모두 파괴되거나 도굴되어서 현재는 불상들이 세워져 있었던 그 터와 파편들만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외부로 유출된 유달산의 88불 중 일부가 다른 곳에서 간혹 발견이 되고 있다. 88기 불상의 크기는 1미터 내외 정도로, 불상의 받침부분에 일일이 번호를 새겨 놓았고, 번호 밑에 그 불상을 시주한 일본인의 이름과 현재 거주지, 일본 내 출신지를 표기하였다. 그 내용들을 보면 목포에 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인 강진, 영암, 해남을 비롯해서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이름까지도 등장하고 있다.

 

유달산 바위에서 바로 조각을 한 것은 아니고, 외부에서 만들어 와 가지고 바위 위에 고정시켜서 세워 놓았음을 그 흔적을 통해 알 수 있다. 지금도 유달산을 등산하다 보면 일등봉부터 이등봉에 이르기까지 이 불상들이 안치되었던 장소의 흔적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유달산의 88개 불상을 순례하고, 맨 마지막에 일등봉 바위 면에 새겨진 홍법대사상 앞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왜 하필 유달산에 이런 유적이 조성되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개항장으로 활용되었던 곳이 목포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유달산이 일본 불교의 성지로 여겨질 만한 무슨 특별한 의미 부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

 

용왕각 충혼각

 

용왕각 본래 위치는 지금보다 뒷쪽이라고 한다. 현재 자리는 신사가 있었던 자리로 여기에 있던 부재들은 아직 구룡포 공원에 방치되어 있었다. 충혼각에는 한국전쟁. 4.19, 5.16에 산화한 영령 104위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선영들에게 부끄러운 후손이 되지 않도록 또한 용왕각을 우리 민속으로 받들기 위해서는 도가와의 공덕비를 시급히 옮겨야 하겠다.

 

 

신사의 부재

 

 

저 바다는 우리의 바다이다.

 

 

구령포 근대 역사관.일본인 가옥거리에 위치한  건물로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가 지은 2층 살림집으로 일본식 목조가옥이며 자재도 일본산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역사관은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복원의 화룡점정으로 금년 7월31일 준공되었다고 한다. 많은 자료에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칭찬 일색이지만 나는 아직 아니올시다!!!

 

 

1층 에서 바라본 1층 내부. 벽에 감실을 마련하고 불상을 봉안한 그림이다. 당시에 저 불상을 일본에서 가져왔을까? 아니면 가까운 경주가 안태 고향일까? 불상과 작은 크기의 탱화 등이 일본인 가가호호에 봉안되었었다고 가정을 하니 미치겠더라. 그것으로 끝. 실내로 입장하고픈 마음이 싹 가셨다. 이순이 가까워 오는 나이인데 나는 언제 철들까?

 

 

방파제 입구.도가와 야스부로가 축조한 구룡포항 확축공사 준공비. 좌측의 글씨도 훼손되어 있었다.

 

 

짧은 하루에 일제강점기, 6,7,80년 시대 상황, 문화 를 두루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을 그림으로 읽은 느낌이라면 언감생심 건방진 해석일까? 사이사이 최인호, 한수산 소설 분위기도 맛보고 김주영의 풍경속으로 뛰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구룡포 답사가 오랫동안 동면중인 옛님 답사를 활성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지만 아직 자신이 없다. 하지만 비정기적인 답사는 도모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글을 마친다. 함께한 우리님들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답사는 정情 입니다.

 

201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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