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포항시

구룡포 골목길 톱아보기(1)

임병기(선과) 2012. 11. 1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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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님. 참 정겨운 이름입니다. 처음부터 그 이름과 함께 걸어온 님들과 뚜벅이로 구룡포읍 골목길을 톱아보았습니다. 구룡포 출신 보일러님의 정겨운 설명과 골목골목 숨은 비하인드 스토리에 웃음 그치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아쉬움을 달래며 12명이 동행한 흔적을 담아왔습니다.  

 

 

 

이동 동선도

 

 

구룡포 초입의 장승

 

장승도 이제는 변화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하겠지요?

 

 

읍사무소 입니다.

 

제기억과 달리 저지대를 높여 조성했다고 합니다.

 

 

읍사무소내 육모정에서 아침 요기를 하였습니다.  첨 뵙는 분들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군요

 

 

포가 설치되어 포경선으로 알았습니다.

 

오징어배 감선 정책에 따라 어떤 선주께서 기증한 오징어배라고 합니다.

 

고래를 포획하면 배분은 어떻게할까요?

 

발견자. 선주. 포수 순이라고 합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포경선의 포

 

힘겹게 찾아 전시중 입니다.

 

 

뚜벅뚜벅

 

 

성황당 터

 

새길 확포장과 함께 사라진 성황당

 

구룡포를 오가는 숱한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성지 입니다.

 

서글픕니다.

 

잊혀지고 사라진다는 것이...

 

입석 하나 세우고 배례단을 마련하여 복원하면 좋을텐데.

 

 

성황당 뒤로 펼쳐진 황금들녘

 

 

바다내음 물씬 풍깁니다.

 

울릉산 오징어 구별법도 배웠지만 영업 비밀!!!

 

ㅎㅎ

 

 

여름내내 잡히지 않던 오징어가 지금은 절정

 

 

오징어 말리기

 

 

 

 

병포리 당산나무

 

 

장수를 기원하는 실타래가 걸려 있습니다.

 

손주가 태어난 모양입니다.

 

 

우리전통마을에서 당산나무는 마을 지킴이 역활 뿐만 아니라 그늘을 제공하는휴게소, 마을 문화가 계승되는 장이기도 했다.

현재는 마을 동제도 맥이 끊어진 듯 보인다. 바닷가라면 풍어제도 성대하게 치루었을텐데. 고향 떠난 출향민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찾게되는......

 

 

바닷가에 새로난 길이 아닌 옛길 야트막한 언덕 좌우에 조성된 당산

 

당산목은 팽나무이다. 경상도에서는 포고나무라고도 불리운다. 키는 25m까지 자란다. 회색의 수피는 밋밋하지만 조그만 요철(凹凸)이 있다. 어긋나는 잎은 끝의 양쪽이 서로 같지 않으며, 가장자리에 끝이 무딘 톱니들이 있다. 홍갈색의 꽃은 4~5월경 새로 나온 가지에 취산(聚繖)꽃차례를 이루어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한 그루에 핀다. 수꽃은 새 가지 아래쪽에, 암꽃은 위쪽에 피는데, 수꽃은 4장의 꽃덮이조각[花被片]과 4개의 수술로 이루어져 있고 암꽃은 4장의 꽃덮이조각과 4개의 작은 수술, 1개의 암술로 이루어져 있다. 열매는 가을에 적갈색의 핵과로 익는다.

 

어린잎을 봄에 따서 날것으로 먹거나 나물로 먹으며, '팽'이라 부르는 열매는 8~9월에 따서 날것으로 먹거나 기름을 짜서 사용한다. 수피는 월경불순이나 소화불량에 쓰기도 한다. 목재는 심재와 변재 모두 담황회색으로 좀 단단하며, 틈이 벌어지지 않아 건축재나 가구재 또는 땔감으로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데 공원수나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자목으로 심으며, 바닷 바람에도 견디며 자라기 때문에 바닷가의 방풍림으로도 심는다. 양지바른 평탄한 땅에서 잘 자라며, 뿌리가 깊지 않고 오래되면 뿌리 위쪽이 두드러지게 굳어져 땅위로 나오기 때문에 옮겨심을 때 주의해야 한다...백과사전

 

 

 

그때도 저랬었는데?????

 

 

오징어선 주선 중. 좁은 공간에 여러명이 혼연일체가 되어 정박을 하더군요

 

 

채낚기가 아닌 그물로 잡은 오징어

 

 

트럭으로 옮겨 선별 중

 

 

해풍을 맞으며 건조중

 

 

오징어 덕장

 

 

조선소

 

신조보다는 수리, 폐선  해체 조선소 모습이다.

 

 

왠지 낯설지 않은 풍경. 초중딩 시절 수학여행을 떠올리는 듯

 

 

 

바닷가 용왕당.

 

무사한 항해와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신성구역

 

우리의 몫입니다.

 

지키고 계승해야겠지요.

 

 

2층 건물에서 얼음이 레일을 타고 내려와 타워에서 분쇄되어 출항하는 선박에 저장하는 중

 

 

자유롭지요?

 

 

트롤어선 부두

 

 

오징어배

 

 

구룡포 시장

 

할머니들은 상품을 팔기위한 목적 보다는 사람 만나는 것이 주목적 이지요

 

예전에는

 

시집간 딸 소식,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오가는 문화의 메카였지요

 

파장이면

 

싸움마져 정겨웁던...

 

 

뭘까요?

 

 

호박을 기가 막히게 긁어내더군요.

 

 

어물전

 

꼴뚜기는 안 보이네

 

ㅎㅎ

 

 

 

시장통 제일국수 공장 . 1960년대 창업한 국수공장. 간판은 당시 우체국장의 글씨라고 한다.

 

아래 글은 경북매일신문의 특집 기사를 가져 왔다. "구룡포 장터 제일국수공장, 할머니가 쌓인 국수 가락을 한 줌씩 저울에 올려 정확히 가늠하고는 아래 위 척척 길이를 맞춘다. 각을 세운 탁자 모퉁이에서 딱풀 한 점 콕 찍어 흰 종이 띠를 두른다. 벽에 기댄 밀가루 포대들과 긴 국수틀, 추가 달린 묵직한 저울이 할머니처럼 오래 그곳에 살고 있다.

감포가 고향인 이순화 할머니(72세)는 24살에 구평리 당수나무 부근으로 시집을 왔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휘휘 불어오는 바다 가까이에서 호롱불을 밝히고 시어머니와 시누이, 동서 내외가 함께 살았다. 몇 년 후 옹기장수가 세를 얻어 장사를 하고 있던 집을 샀다. 구룡포 장터에 있는 작고 허름한 일본식 목조 가옥이었다. 바람이 큰 날에는 집까지 파도가 밀려왔다. 시어머니께서 옹기장사가 팔다 남은 옹기를 그대로 받아 놓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하게 된 옹기장사. 오천 옹기공장에서 옹기를 가득 실은 달구지를 끌고 소가 비포장 길을 걸어왔다. 외상으로 한 달구지를 받아 다 팔면 갚고 또 받아 팔고. 그렇게 벌어 학고방 같던 집을 조금씩 수리하며 살았다.

옹기장사를 할 때 곁에 대보국수공장, 오천국수공장이 있었다. 당시 구룡포에는 영남국수공장, 털보국수공장등 모두 합치면 여덟 개나 있었는데 어디든 국수는 팔렸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해 옹기장사는 뒷전이고 날마다 놀러나갔다. 국수공장을 하면 일이 많으니 아무래도 술도 덜 마시고 덜 나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옹기장사를 접고 국수공장을 열었다. 기계를 사들이고 기술자를 고용해 2년 동안 부지런히 보고 배웠다. 일은 고되지만 벌이는 옹기보다 나았다. 할머니 나이 서른한 살에 시작한 일이니 꼬박 41년 동안 가내 수공업으로 국수를 만들어 온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식구는 많고 먹을 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시래기고 뭐고 된장 풀어 끓이다가 굵은 국수 가락 뚝뚝 분질러 넣고 양을 부풀리면 온 식구 둘러 앉아 허기를 채웠다. 잔치고 뭐고 큰일을 치를 때도 국수를 삶았다. 나무상자로 네 상자 다섯 상자씩 사다가 가마솥을 걸고는 커다란 채반에 줄을 달아 국수를 잔뜩 올려놓고 물이 팔팔 끓으면 푹 집어넣었다가 건져 찬물에 씻었다. 잘 익어 말간 국수를 한 덩이씩 돌돌 말아 광주리에 쌓았다가 그릇그릇 담아 싱거운 멸치 국물을 얹은 게 고작이었지만 손님들은 국수 그릇 앞에 행복하게 모여 앉았다.

밀가루는 포항 도매상에서 가져 왔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반죽이 적당치 않아 실패도 했다. 그러나 실패한 국수는 다시 반죽 할 수 있었으므로 몸이 고될 뿐 손해는 없었다. 국수는 굵기에 따라 20반, 22반, 24반, 26반, 27반등 여러 가지인데 숫자가 클수록 면이 가늘다. 지금은 크게 우동, 중면, 소면으로 나뉘지만 예전엔 우동면 보다 훨씬 더 굵은 면도 만들었다. 처음엔 나무로 된 반죽통이 달린 기계를 썼다. 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대꼬챙이로 일일이 받아 건지고, 걸고, 길이를 눈으로 가늠해서 칼로 잘랐다. 젖은 국수를 널고 말리고 걷어 재단을 마치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데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야속한 할아버지는 생각처럼 일을 많이 도와주지 않았다. 여전히 틈만 나면 친구 찾아 술 찾아 마실을 다녔다. 종종거리며 국수공장 일을 마치면 집안일이 할머니를 기다렸다.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겨우 빨래를 할 수 있었던 고단한 세월이었다.

“우리 영감? 살아계셨으면 나와 네 살 차이니 올해 일흔여섯 이지. 그렇게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던 양반은 결국 쉰둘에 위암 수술을 받았어. 그리고 예순에 돌아가실 때까지 대구 병원에 12번이나 입원을 했지. 수술하고 술만 안 잡쉈어도 더 살았을 텐데….”

할아버지께서 앓아누우면서 그나마 거들던 손을 놓자 할머니는 두 아들의 힘을 빌어야 했다. 아들들은 기특하게도 할아버지 빈자리를 야물게 채워 주었다. 큰 아들은 단기병으로 지서에 근무 할 때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쉬고 했는데, 아침에 퇴근하면 바로 일을 도왔다. 그리고 다음날엔 종일 마른 국수를 재단까지 해 주고 저녁 무렵 출근을 하곤 했다. 장터에 있던 국수공장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세월에 제일국수공장이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던 건 두 아들 덕이다. 모두 장성해서 번듯한 직장을 가졌지만 지금도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말마다 들어와서 할머니와 국수를 만든다. 제일국수공장은 이제 일주일에 한 번 국수틀이 돌아가고 건조장 가득 뽀얀 국수가 널린다.

밀가루와 소금 그리고 물이 국수의 모든 재료다. 국수를 만들기 이틀 전, 할머니는 고무통에 소금을 넣고 물을 부어 나무로 휘휘 저어 놓는다. 덜 녹은 소금과 이물질들이 가라앉고 난 뒤 맑은 소금물만 떠서 반죽에 쓰기 때문이다. 반죽통에 밀가루를 세 포대 붓고 그 위에 맑은 소금물과 맹물을 섞어 반죽을 하는데 이유는 소금물로만 하면 국수가 짜지기 때문이다. 간도 간이지만 물과 밀가루의 비율을 잘 맞춰야 되지도 묽지도 않은 반죽이 된다. 그건 오로지 할머니 몫이다. 반죽이 되면 작은 아들은 롤러로 납작하게 밀며 돌돌 감는다. 다 감으면 두벌치기에 들어간다. 처음 밀어 놓은 것을 두 장으로 겹쳐 다시 한 번 조이며 롤러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욱 납작하고 야물어 진다. 그 후에는 국수 크기에 따라 틀을 끼우고 국수 가락을 뺀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 국수를 걸칠 시누대를 차곡차곡 넣어 놓으면 탈카닥 탈카닥 국수 가락을 걸고 올라가고 저절로 알아서 적당한 길이로 잘라진다. 큰 아들은 얼른 시누대에 걸린 국수를 들고 뒷마당과 옥상에 굵기별로 분류해 넌다. 세월이 할머니와 아들들의 손발을 척척 맞게 했다.

 

국수를 널면서 할머니는 바람을 살핀다. 반죽 보다 바람에 더 민감한 것이 국수다. 바람이 많이 불면 촘촘하게 널고 바람이 잔잔하면 간격을 조금 넓혀 넌다. 반죽 실패는 드물지만 바람에 의한 실패는 지금도 간혹 생긴다. 갈바람이 불면 국수는 이내 바삭바삭해져 버린다. 너무 빨리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갈바람과 하늬바람이 섞여 오면 눈으로는 차이가 없어 보여도 삶았을 때 동강이 많이 난다. 햇볕에 말리는 국수는 뭐니 뭐니 해도 샛바람이 최고다. 할머니는 대보에서 구룡포쪽으로 불어오는 샛바람, 바다에서 불어오는 갈바람, 산에서 내려오는 하늬바람을 몸과 마음으로 감지한다.

국수 가락이 바람에 살짝 말라 빠닥빠닥해 지면 일단 걷어야 한다. 창고에 보관 했다가 다음날 오전에 한 번 더 말린 뒤 재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단에 필요한 도구는 간단하다. 약 25cm 간격으로 다섯 개의 쇠기둥이 양쪽에 선 재단틀과 손잡이가 양쪽에 달린 큰 칼, 그리고 매무새를 정리하기 위한 사각 나무판이 전부다. 건조장 바닥을 깨끗하게 쓸고 닦은 뒤 풀 먹인 듯 잘 마른 국수를 한 줄씩 걷어 틀에다 올리고 먼저 양끝을 자른다. 그리고는 쇠기둥을 기점 삼아 다시 세 등분으로 자른다. 큰 다발이 흩어지지 않도록 질긴 종이로 띠를 둘러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부러져 바닥에 떨어진 국수 가락은 하나하나 주워 따로 담는다. 세 종류의 국수를 모두 걷어 재단 작업을 하다보면 하루는 참으로 급히 저문다. 아들들이 제 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는 다시 주말이 올 때까지 탁자에 앉아 큰 다발을 풀어 작은 다발을 만들고 상자에 차곡차곡 담으며 간간이 장사를 한다.

제일국수공장 오래된 국수틀은 롤러가 세 개인데 요즘 나오는 기계는 큰 롤러가 여섯 개다. 손을 안 써도 자동으로 감기고 순서대로 알아서 척척 옮겨간다. 게다가 한 시간에 서른 포대나 국수를 빼는 기가 막힌 실력을 가졌다. 손도 모자라고 힘도 들어 그것으로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가격이 엄청나다. 게다가 기계의 크기도 제일국수공장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다. 아들들은 고생하지 말고 땅을 좀 사서 조립식 창고를 지어 인부도 좀 고용하고 건조도 열풍으로 쉽게 하라고 하지만 할머니는 그럴 생각이 없다. 돈도 돈이지만 큰 공장에서 만드는 국수가 하나도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큰 공장에서는 거대한 롤러로 밀기 때문에 색깔은 희고 매끈해 보인다. 그러나 선풍기나 열풍으로 건조를 시키므로 한 번 삶아 건져 놓았다가 다시 손님들에게 데워 낼 때는 떡떡 붙어서 잘 풀리지 않는다. 비가 다녀가고 눈이 다녀가 까다롭긴 해도 하늘이 베푸는 자연풍만큼 국수 맛을 옳게 내는 것은 없다는 걸 할머니는 잘 안다.

“오래 전 우동집들은 손으로 쳐서 면을 만들었어. 고등학교 중학교 졸업식날 짜장면 손님이 몰려오면 감당할 수 없어 우리 공장에 우동 국수를 주문하기도 했지. 물 한 양동이 달라해서 주면 그 물에 하얀 것을 넣어주며 그걸로 반죽을 해달라고 하데. 그 물을 손으로 만지면 매끈매끈 했어. 그게 뭔지 모르지만 우동 국수를 빼면 색깔이 노르스름하고 삶아 놓으면 유난스레 쫄깃쫄깃 했지.”

예전에는 날마다 국수를 만들었다. 하루에 40포대나 되는 밀가루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주말에만 약 30포대 정도로 국수를 만든다. 일손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국수 소비 역시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예식장이고 장례식장이고 쉽고 편하게 음식을 주문하는데다 무엇보다 먹고사는 일에 궁색하지 않은 시절이다. 슈퍼에 가면 갖가지 국수가 다 있는데도 아직 국수 삶아 파는 집에서는 제일국수공장 국수를 찾는다.

 

구룡포초등학교 앞 찐빵과 단팥죽으로 유명한 철규분식도 황외과 앞 할매국수집도 수십 년 단골이다. 장사하는 이들에겐 이윤을 남기라고 일반 국수보다 양을 조금 더 담는다. 요즘은 장기면에서 산딸기축제를 할 때 특산품 홍보를 위해 산딸기 즙을 가져와서 국수를 빼달라고도 하고, 또 콩이 몸에 좋으니 콩가루를 섞어서 콩국수를 해달라고 주문하는 식당도 있다.

장터에 세집이 나란히 앉아 국수를 만들던 시절도 옛말이다. 대보국수공장은 아저씨가 돌아가시자 일을 접고 포항 시내로 이사 나갔고 오천국수공장은 떡집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연일에도 셋이 합동으로 차린 국수공장이 있었는데 오래 전 큰 비에 그만 문을 닫았고, 오천에도 포항에도 이젠 가내 수공업으로 국수를 만드는 공장이 없다. 국수공장을 지나면서 봄 햇빛에 국수 마르는 냄새를 킁킁 맡던 기억도, 고운 국수 가락 몰래 끊어 똑똑 분질러 먹던 추억도 사라졌다.

“지금 걸린 간판 나이가 마흔한 살이야. 개업할 때 우체국장이 직접 나무판에 써서 걸어주었지. 그 양반은 혼자서도 국수를 자주 끓여 먹곤 했어. 글쎄 포르르 끓어오를 때 찬물을 솔솔 뿌리고 또 끓으면 찬물을 뿌려가며 잘도 끓였지. 우리집 국수를 유난히 좋아하던 그 양반도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국수가 한없이 기특하다. 이 가느다란 것에 묶여 세상 구경 한 번 옳게 못하고 살았지만, 아이들을 다 가르치고 시집 장가보내고 집도 사주게 했다. 국수를 만들며 시름을 건너왔고 국수를 주고받으며 이웃과 정분을 쌓았다. 그러나 이렇게 국수 가락 쥐고 노는 재미도 언젠가 힘이 달리면 그만 둬야 한다. 거친 손끝에서 뽀얗게 묶이는 국수 다발이 서서히 저무는 장터를 보고 있다. 탈칵탈칵 제일국수공장 국수틀 돌아가는 소리, 샛바람이 불면 좋아라 국수 가락 마르는 소리, 언제까지 그 노래 들을 수 있을까?"

 

 

현재도 영업중

 

 

내 안에 구룡포 있다...김윤배

 

 

갯바람보다 먼저 구룡포의 너울이 밀려왔다
너울 위에 춤추던 열엿새 달빛이 방 안 가득 고인다
밤은 검은 바다를 벗어놓고
내항을 건너고 있었다
적산가옥 낡은 골목을 지나
밤은 꿈을 건지는 그물을 들고 있다

 

너는 구룡포였으니 와락 껴안아도 좋을 밤이었다
 
내항을 내려다보는 비탈에 매월여인숙은 위태롭다
해풍이 얼마나 거칠었으면 구룡포
올망졸망 작은 거처들을 열매로 매달고
어판장 왁자한 웃음들 꽃으로 피웠을까
켜지지 않은 집어등 초라한 배경 위에
구룡포 잠시 머물다 떠난
사람들 아름다워 목이 메었던 것이다
 
너는 구룡포였으니 와락 껴안아도 좋을 웃음이었다

 

김윤배 - 194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시집 『겨울 숲에서』『떠돌이의 노래』『강 깊은 당신 편지』『굴욕은 아름답다』『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부론에서 길을 잃다』『바람의 등을 보았다』, 산문집 『시인들의 풍경』『최울가는 울보가 아니다』『온몸의 시학 김수영』, 동화 『비를 부르는 소년』『두노야, 힘내』 등이 있음.

 

201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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